등대
미야모토 테루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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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리에서 침묵한 채, 바다를 나아가는 사람들의 생사를 지켜봐온 등대가 고헤에게는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 보였다. 하늘색과 바다색과 안개 속에서 등대는 스스로의 빛깔을 지우고 숨죽인 듯 보이지만, 해가 지면 어김없이 불을 밝혀 항로를 비춘다. 숱한 고생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름 없는 인간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저것은 조부다. 저것은 조모다. 저것은 아버지다. 저것은 어머니다. 저것은 란코다. 저것은 나다. 저것은, 앞으로 살아갈 내 아이들이며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다. 저마다 다채로운 감정이 있고, 용기가 있고, 묵묵히 견디는 나날이 있고, 쌓여가는 소소한 행복이 있고, 자애가 있고, 투혼이 있다. 등대는, 모든 인간의 상징이다. 보라. 이것이 인간이고 인생이라고 등대는 들려주건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301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받은 중화소바집. 아내 란코와 함께 운영하며 가게를 지켜 나갔지만,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으로 큰 상실감을 겪은 고헤는 가게를 휴업한다. 그렇게 아내가 죽은 지 이 년, 책을 읽다 아내에게 온 1987년의 엽서를 발견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등대 순례를 했다는 엽서의 내용과 누가 왜 엽서를 보냈는지 모르겠다고 한 란코의 모습이 떠오른다. 친구네 반찬가게에 갔다 한켠에 걸린 재작년의 달력 속의 등대의 모습을 보며 이대로 계속 안에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고헤는 등대를 보러 가기로 결심한다.

《등대》는 아내를 잃고 큰 상실감에 빠진 고헤의 모습을 통해 상실을 끌어안으며 일상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고헤에게는 등대란, 아내가 껴둔 엽서 속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나가는 과정이기도, 성인이 된 자식들과의 어색한 거리감을 다시금 되찾아가는 과정이기도, 어떤 요리에도 완성된 맛 같은 건 없다는 아버지의 말을 통해 그 하나의 맛, 자신만이 가진 맛을 찾아나가며 재생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낮의 등대의 모습은 기억에 남지만, 밤의 등대를 바라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조금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불을 밝히며 이정의 역할을 하며 묵묵히 서 있는 등대의 모습을 통해 각자만의 의미를 찾는 시간이다. 개인적으로 《등대》 속의 등대의 이미지와 비채서포터즈로 이전에 읽었던 《하얀 마물의 탑》 속의 등대의 이미지가 너무 대비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어, 읽는 입장에서는 이것 또한 하나의 스토리로 엮여져 더욱 인상에 깊게 남겨진다.

모든 인간의 상징을 표현하는 등대의 모습을 보며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등대의 빛이 가닿는 느낌이다. 잔잔한 듯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도록 등대가 길잡이가 되어줄 것만 같다. 불빛이 너무 가까우면 진짜 모습이 보이지 않듯, 너무나 가까이 있던 나의 일상의 반짝이는 소중함과 새로운 것을 경험하며 느끼는 짜릿함을 다시금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코앞의 비둘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너무 가까워도 보이지 않는구나. 휘황한 빛의 전구판은 너무 멀어서 처음에는 화살표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 주위에는 그런 일이 숱하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딸, 아들, 몇 안 되는 친구.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는 멀리서만 봐왔는지도 모른다. 삼각형도 육각형도 멀리서 보면 전부 원으로 보인다. 아니, 너무 가까워서 진짜 모습이 보이지 않기도 한다. 206

평온해 보이는데 실은 위험이 소용돌이치는 장소도 있다. 무서워 보이는데 막상 들어가보면 즐거운 일이 많은 장소도 있다.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고 한숨짓는 사람도 많은 행복과 만나왔을 터다. 다만 행복이라 느끼지 않았을 뿐이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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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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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타는 성당 종탑에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 이미 숨진 상태로. 비가 내린 어느 날 저녁에. 그것, 그날 내린 비가 절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엘레나는 알고 있다. 모두들 입을 모아 자살이었다고 말한다 해도. 그들이 아무리 자살이라고 우기든, 아니면 침묵을 지키든, 금방 비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어두컴컴할 때 리타는 절대 성당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박할 사람은 없다. 47


2022 부커상 인터내셔널 파이널리스트

처음부터 의문이 가득한 리타의 죽음. 성당 종탑에 목을 맨 리타를 발견 후 신고를 하며 출동은 미사 이후에 오라고 말하는 신부님. 리타는 비가 오는 날이면 성당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는 말을 귀 기울여주지 않는 경찰. 자살했다는 주장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리타의 남자친구.

딸이 자살이 아닌 살해당했다고 생각한 엘레나는 딸의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쉽지 않은 발걸음을 내딛는다. 파킨슨 병을 지닌 엘레나는 움직임에 많은 제약이 있다. 소설 첫 시작부터 엘레나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묵직하게 느껴지며 몰입감을 준다. 느리지만 한 걸음에 담겨있는 힘이 나에게도 전해지며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 소설은 이십 년 전 리타가 도왔고 구해줬던 이사벨에게 가기까지의 여정과 엘레나와 이사벨의 만남으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의문이 가득했던 리타의 죽음이 이사벨을 만나며 한순간에 휘몰아친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린 느낌이 들며 나는 혼돈의 한가운데로 떨어진다.

우리는 자신에게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 모두에게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종종 잊곤 한다. 나에게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내가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뒤바뀌기도 한다. 이사벨을 만나며 쉽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깨지기 시작한다.

리타는 자신이 멋대로 판단한 타인의 기준이 자신에게 닥쳐오며 깨닫게 된 건 아니었을까. 엘레나도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딸의 모습과 다른 딸의 모습들을 알게되면서 어쩌면 딸의 죽음에 대해 엘레나는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것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른채 가슴 깊숙히 숨겨두었던 건 아니었을까.

파킨슨 병을 통해서 우리가 기대해 온 모든 것에 대한 억압과 제한을 표현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추리 소설의 형식을 띄지만 사건의 흐름보다는 경직해져가는 몸의 감각들이 더욱 두드러지며, 소설을 통해 여러 질문들을 던져내고 있다. 이 질문들을 떠올리며 다시금 뒤집어보며 생각하는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생각하는 것과 내가 경험하게 된다면 달라질 것들을 어쩌면 나는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알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게 너무 다르군요. 엘레나가 말한다. 뭐가 다르다는 거죠? 내가 생각했던 것하고도 다르고, 내가 여기, 당신네 집에 오려고 마음먹었을 때하고도 너무 달라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여기 오지 않았을 거예요. 212

난 그 아이를 사랑했고, 그 아이도 나를 사랑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거야 의심할 까닭이 없겠죠. 이사벨이 말한다. 우리만의 방식으로요. 엘레나가 덧붙여 말한다. 하지만 이사벨로서는 굳이 그런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에 바로 대답한다. 그런 건 언제나 우리 자신만의 방식대로 이루어지죠.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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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마물의 탑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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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몬코에게 들키면, 그걸 제대로 보면 그냥 끝이에요." 97


호러미스터리의 거장 미쓰다 신조가 선보이는 방랑하는 청년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 《하얀 마물의 탑》.

태평양전쟁을 겪은 하야타는 큰 상실감을 느끼면서도 패전 후의 일본 부흥을 위해 가혹한 노동 현장을 돕겠다는 결의를 해 광부에 이어 등대지기가 된다. 두 번째로 발령받은 곳은 고가사키등대. 거친 파도와 안개로 접안할 수 없는 상황에 "……허연 게 춤을 춰서 말이야." 어부가 툭 흘리는 혼잣말에서부터 무언가 불길한 감각이 전해져온다.

등대를 꺼려하는 여러 사람들, 도대체 고가사키등대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등대로 가는 험난한 여정과 기묘한 분위기의 조합에 절로 긴장감이 넘친다. 부스럭 부스럭, 톡톡, 사사사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가 내는 소리에도 놀라게 된다. 힘겹게 등대에 도착한 하야타, 그리고 듣게되는 등대장의 이야기.

나도 나름 예상했던 것을 맞췄다는 기쁨도 잠시, 깜짝 놀랄만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소름이 쫘악 돋는다.

등대라는 공간에서 고립되고 폐쇄적인 느낌이 드는데 거기에 더해 각종 등대의 괴담도 담겨있어 절로 으스스해진다. 보통 공포를 자극하는 어둠과 빨강, 이번엔 무언가 불가사의한 존재를 '하얀색'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하얀색도 충분히 무섭다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끝나고도 왠지 시선이 느껴지는 꺼림직한 느낌을 주지만, 그럼에도 하야타의 새로운 여정이 기대된다. 다음 책이 나오기 전까지 첫 번째 이야기 《검은 얼굴의 여우》를 읽으며 기다려야겠다.


"등대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소문이 돌아도 이상할 게 없는, 오히려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전혀 전해지지 않는,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자네는 모르나??" 159

시라몬코의 공포는 더욱더 그를 옥죄어왔다. 아무리 변경의 등대로 가더라도 절대 안심할 수 없다. 슬금슬금 조금씩 다가온다. 어디든 쫓아온다. 포기하지 않고 다가온다. 그리고 그들은 빠르든 느리든 언젠가 그것에 들킨다.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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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 in 상하이 도미노
온다 리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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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그날이다. 강강은 확신했다. 천재일우의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다. 124​


온다 리쿠표 '패닉 코미디'의 화려한 금자탑
또다시 촤르르르 쓰러지기 시작한 운명의 도미노,
이번엔 중국 상하이다!


인생에서 우연은 필연이다​


《도미노》에서 은근한 활약을 펼쳤던 이구아나 다리오의 장례식으로 《도미노 in 상하이》 편이 시작된다. 역시나 디데이에 이르기까지 무언가 심상치않은 일이 또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전해져오는데. 이제 그 느낌 아니까, 어떻게 도미노가 펼쳐질지 기대가 되며 읽게 된다.

《도미노》와 《도미노 in 상하이》 실제 출간이 16년 간의 간격임에도 자연스레 이어지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전작을 읽지 않아도 상하이 편을 보는데 큰 지장은 없을것 같지만, 그래도 《도미노》 속 관계들을 알고보면 더 재미가 플러스되니 이왕이면 이어서 보는 것을 더 추천한다. ​

이번 상하이 편은 《도미노》에 등장했던 반가운 인물들 덕분에 조금은 친숙한 느낌을 가지며 시작한다. 제일 인상적이었던 캐릭터들과 함께 추가되는 다양한 인물들과 동물들 (+유령까지) 덕분에 더욱 빅 재미가 몰아친다.
아주 작은 물건에서 시작해 군데군데에서 일어나는 작고 큰 사건들이 하나같이 호텔 청룡반점으로 모여든다. 《도미노》보다 더욱 두툼한 두께로 더 큰 스케일의 도미노가 쓰러지기 시작한다.

와, 이번 상하이 편은 '강강'과 '다리오'가 다했다, 다했어. 정말 '강강'은 끝까지 평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에리코의 활약상까지. 아! 유코도 빠질 수 없지! 정말 인상적인 캐릭터들이 넘쳐난다.  

온다 리쿠, 내게 《유지니아》와 전혀 다른 분위기와 매력을 보여준 《도미노》 시리즈로 더 큰 인상이 남게 될 것 같다. 왠지 어디선가 한 조각으로 시작해 도미노가 또 쓰러지고 있는건 아닐까하는 상상이 끊이지 않는다.

"그 모든 일이 지금 청룡반점에서 일어나고 있단 말이야?" 478

"우리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지?"
"네, 옛날 생각이 나네요."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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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 도미노
온다 리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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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봉투는 쉽게 구겨졌다.
'시제품'이 없다.
그 순간, 싸늘한 공포가 온몸을 뒤덮었다.
잃어버렸다. 말도 안 돼.
글자 그대로 온몸이 싸늘해졌다. 상반신에서 핏기가 가신다. 54​


온다 리쿠표 '패닉 코미디'의 경쾌한 출발점
복잡하기로 악명 높은 무더운 한여름의 도쿄역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도미노가 시작된다


온다 리쿠는 《유지니아》의 묘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만나게 된 《도미노》 시리즈의 '패닉 코미디'는 과연 어떤 분위기일지 궁금해졌다. 첫 시작부터 등장인물 한마디에 나와있는 28명의 등장인물을 보고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히 읽다보면 금새 익숙해지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꾸덕꾸덕 덥고 습하고, 비가 내렸다 그쳤다하는 7월의 오후. 우산이 날아가는 장면에서부터 뭔가 심상치않은 일들이 벌어질 것 같다는 강력한 예감이 전해져온다. 우산에서 시작해 도미노같은 형상이 촤르르르 이어진다. 왜 이렇게 많은 등장인물이 필요했을까 싶었는데, 도미노 형상을 위한 크나큰 준비라는 것을. 전혀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각자 다른 곳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모여드는 상황들이 눈송이에서 눈덩이가 되듯 점점 커지게 된다. 돌고도는 폭탄, 과연 폭탄의 운명은...?

캐릭터마다 각자만의 개성이 드러나 있어서 읽는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겐지와 요시히토 장면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동상이몽같은 장면에 엄청 빵빵 터졌다. 같은 상황, 전혀 다른 감상. 정말이지 '패닉 코미디'답게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진지하면서도 웃긴 장면들이 너무나 넘쳐났다. 심각할수록 왜 웃긴거지? 정신없는 날씨도 한몫한것 같다. 마지막까지 불안의 한줄기는 남겨두고 끝나 더욱 많은 상상을 일으킨다. 정말 굉장한 하루였다.

후속작 《도미노 in 상하이》 등장인물을 슬쩍보니, 중복된 등장인물들이 있어 벌써부터 더욱 궁금해진다.​



"정말 굉장한 하루였어요." 344

그것은 또 다른 도미노의 이야기이며, 앞으로 쓰러질지도 모르는 다른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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