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보물창고 세계명작전집 4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최지현 옮김 / 보물창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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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을 알고 있는 책에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세상은 넓고, 인류의 역사는 유구하며, 책은 너무나 많고, 
거기다 계속 - 무서운 속도로 -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 단위로 신간 목록을 확인하며,

'읽을 책'들을 찍어두는 것이 나의 끊을 수 없는 습관이다.


그런데, 그런 내가 유독 인생길에서 정말 자주도 만난......

고등학생 시절 10권 전집까지 읽어 노년까지의 여정까지...궁금할 것 없이 알고 있는 이 인물에

30년만에 다시 반해버렸다.

그녀의 재잘거림에 키득거리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기까지 했으니!


보물창고에서 새로 펴낸 이 '빨간 머리 앤'은 

지금까지 내가 읽어 본 '빨간 머리 앤' 중 가장 두껍다.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언제 다 읽지?'했던 걱정은 잠시... 그 날을 넘기지 않았다. (내려야 할 역은 넘겼을 뿐!)

두꺼운 만큼 즐거움도, 뿌듯함도, 감동도 배가되었다.

'역시 완역본을 읽어야 해!'하며 속으로 여러 번 부르짖었다.


'레이첼 린드 부인은...'하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모퉁이마다

반가운 옛친구를 마주치는 듯했다.


'진지한 세상에 비해 햇살이 너무 현혹적이고 무책임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늘 약간 못미덥다는 햇살을 보곤 하는 마릴라 아주머니,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말 한 마디 하지 않으면서도 고집을 부리는 방법을 알고' 있고,

늘 수줍게 속삭이는 매튜 아저씨,

에이번리의 모든 것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며 '하지 말라고 한 것들만 하고 싶어지게' 하는

신실하고도 신랄한 린드 부인......

각자의 단점이 있지만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 뿐 아니라,

'기쁨 가득 새하얀 길', '반짝반짝 호수', '눈의 여왕' 등...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네들이 그리워진다.

반짝이는 눈과 엄청난 활기, '천사처럼 착해지고 싶은 소망'을 가진 앤은

마릴라와 매튜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모든 아이들이 부모에게 주는 축복이 이것이겠지.

슬프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 욕심을 채우고자 이 행복을 질식시키기 시작하지만.


모든 것이 '영혼이고 불이고 이슬'이기에

인생의 기쁨과 고통을 남들보다 세 배 이상 강하게 느끼는 앤을 걱정해

차분하고 한결같은 성격으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그렇게 모범적인 앤을 예전의 앤보다 좋아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마릴라의 지혜로움이 부러워진다.


다시 만난 앤은 '못생겼지만 사랑스러운 희망의 아이콘', '엉뚱하고 재미있는 아이'가 아니라

한 순간도 헛되이 흘려버리지 않는 생명력이 있는 아이다.

모든 시간,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자각하려 애쓰고, 배운 것을 잊지 않으려 하며

어떤 좋은 것들이 있어도 자신과 자신의 사람들이 가장 소중함을 아는.


"난 나 이외의 어느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아."

앤의 자신 있는 한 마디를, 반짝이는 그 영혼과 눈을 느낄 수 있는 또렷한 목소리를 들으며

아직도 그녀만큼도 자라지 못한, 못난 어른인 내가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내 아이... 또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나 이외의 어느 누구도 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자라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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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주목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3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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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떻게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
이것이 애거서 크리스티가 풀어낸 가장 위대한 미스터리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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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시집 클래식 보물창고 34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옥용 옮김 / 보물창고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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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책꽂이에 빼곡히 꽂혀 있는 책들 중 80년대에 출판되어 정말 누렇게 된 책들인데 정리하지 못하는 책들이 
헤르만 헤세의 책들이다.
크눌프, 지와 사랑, 이 고독한 밤을 위하여...... 
그 이름만으로 따뜻하게 위로받는 느낌을 주는 작가가 헤세 아닌가 싶다.


90년대에 십대를 지나왔던 이들이라면 '데미안'의 마력을 누구나 기억하고 있지 않으실런지...
정확히 말하면 '데미안'이 아니라, '싱클레어'의 마력이지만.
'새'와 '알'과 '아프락싸스', 당최 이해하기 힘들었던 그 비유들이 - 어쩌면 그 때였기에 더 아무런 설명도 필요로 하지 않고 -
가슴을 퍽 치고 들어왔던 충격은 아직도 서늘하게 남아 있다.

그런 그의 시집은 참으로 의아하게도...처음 만나본다.
모든 글이 '시' 같은 그가 '삼류시인'으로 혹평을 받았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하지만, 헤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2000편이 넘는 시가 노래로 작곡되었고, 
20세기 독일 시인들 중 가장 많은 시가 노래로 작곡되었다고 하니
전문가들에겐 혹평을 받았을지언정 대중들에게선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왠지 숙연한 마음으로, 일찍 일어난 어느 아침 시집을 펴 본다.


보물창고에서 '이옥용'님의 번역으로 펴낸 이 책의 특징은
'화가' 헤세의 그림들로 삽화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아, 그림까지 잘 그리시다니... 정말 질투나게 하는 양반이시다... ㅜㅜ

잔잔한 음악이, 플룻이나 오보에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참 고우신 분'이다.


가장 짧은 시들 중 하나다.
지극히 소박한 행복을, 안온한 마음이 전해온다.
'시선 낮추고 느끼렴.'은
어쩌면 그 분이 평생 동안 자신의 글을 통해 우리에게 얘기하고자 하셨던 것 아닐까?


<플루트 연주>라는 시 속의 연주자는 바로 헤세 아닌가?
'세계의 비밀스런 의미'를 비밀인 채 그대로, 아직은 알 수 없는 선과 지혜의 선물이라고
온화하게 속삭이며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만드니 말이다.


그리고 여기, 나를 살짝 웃게 만들었던 시가 한 편 있다.



'그 어디에도 고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탕자'의 절망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는 등잔에게 시를 읊는 시인의 슬픔이,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쓴다.'는 자포자기 속에서 나온 듯한 솔직함(아니면, 치기?)이 
평생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꿈을 놓지 못하는 무명의 예술가들을 그려보게 한다. 
아니, 나아가... 때론 힘에 부치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든 평범한 이들, 잊혀진 이들을 
위로하는 듯하다.


흰 구름을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자매요 천사들'이라고 했던 헤세. 
그 분이야말로, 잠 못 들 만큼 외롭고 슬픈 사람들의 천사가 아닐까?

마음이 어두어질 때, 빛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한번씩 꺼내어 읽어보고 싶은 따뜻하면서도 힘있는 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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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노어 & 파크 - '2013년 보스턴 글로브 혼북 상' 수상작, '아마존' 2013년 최고의 책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31
레인보우 로웰 지음, 전하림 옮김 / 보물창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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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잊지 못할 하나의 이름이 있다면, 아마 그건 '첫사랑'일 것이다.

아직도, 아주 시시콜콜한- 부끄럽고, 유치하고, 시시하기까지 한 - 일화까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삶의 초반부에 뿌리박혀 있는 잔상들......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그 때로 돌아가 그 설렘 속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바로 그 때의 이야기......<엘리노어&파크>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두 사람의 이름만으로 이루어진 제목은

이 이야기 또한 '세기의 로맨스'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주인공은 베로나 최고 명문가의 그 도시 최고의 미남 미녀였던 로미오와 줄리엣관

사뭇 다르다.

작은 체구에 동양인 혼혈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무시당하기 십상인 파크와

첫등장부터 독자까지 뜨악하게 만드는 뚱뚱한 데다 이해불가능한 패션의 소유자인 엘리노어.

상상만으로도 정말 안쓰럽고 엄청나게 안 어울리는 두 사람이다.

 

 

그런 둘이, 통학버스 안에서 음악과 만화책을 통해 교감을 나누기 시작한다.

처음엔 그저 어색함을 덜기 위한 것이었던 파크의 작은 배려가

어느 새 두 사람에게 '가장 즐겁고 설레는 일'이 되어간다.

 

 

 

 

엘리노어의 가정환경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다.

그 결과물인 그녀의 외모와 소극성 때문에, 엘리노어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다.

파크만은 알아차린다.

엘리노어의 반짝이는 유머감각과 감성을.

그래서, 스스로 정말 정말 곤란하다 자각하면서도 엘리노어에게 빠져든다.

엘리노어 역시.

 

 

 

 

'이렇게 똑바로 쳐다보는 느낌이 어떨지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도려낸 다음 내장을 몽땅 다 낚시 바늘로 꿰어서 

 끌어내는 느낌이랄까.'


 '내 첫사랑의 심정도 이러했던가......'해 보게 하는 구절 구절.
 눈길 한 번에, 미소 한 번에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 같긴 했었던 것 같은 기억이......

 그래......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버스에서 엘리노어를 놀리던 학교 짱이자 어릴 적부터의 친구인 스티브를

태권도의 뛰어 돌려차기로 차서 이를 부러뜨리고, 그 대가로 피범벅이 되도록 맞은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파크는 엘리노어가 자기 여자친구라고 선언한다.

 

 

 

그 날을 계기로 엘리노어는 파크의 집을 드나들게 되고,

파크의 한국인 엄마는 엘리노어를 '이상한 백인 여자애'라며 싫어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마트에서 동생들을 데리고 장을 보고 있는 엘리노어를 보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엘리노어를 이해하고 연민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느꼈던 부분이다.)

 

 

두 사람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느낀다.

답답했던, 눌려 있던 일상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공기가 된다.

 

 

 

이 소설의 큰 재미는 두 사람의 서술이 엇갈리는 데에도 기반하고 있는데,

초반부엔 머뭇머뭇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서로에게 다가서는 마음들에,

우리보다 뒤늦게 알아차리는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도 당황하는 모습에 웃음이 난다면,

그저 눈에 띄지 않고 무사히 하루를 버티자는 것이 좌우명이었던 왜소한 소년 파크가

학교 짱을 상대로 분노의 일격을 가하는 사건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나서는

그야말로 '핑크빛 무드'를 각자의 감성과 서술법으로 풀어내는 것에 

"아유, 귀여워라!!"하는 탄성을 절로 지르게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그저 끝없이 사랑스러운 사랑은 

처음부터 엘리노어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의붓아버지 리치로 인해 단번에 

위기에 처하고 만다.

두려움에 떠는 엘리노어를 차에 태우고, 그녀의 외삼촌의 집이 있는 먼 곳으로 운전하는 파크.

그녀와의 작별이 그에겐 절대 끝이 아니건만,

엘리노어는 마음으로 그에게 영원한 안녕을 고한다.


 

 



그야말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현대판을 완성시키려는 것인지.

가장 찬란한 순간에 안타까운 이별로 '완전무결한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엘리노어.

그 바보 같으면서도 고집스러운 마음이, 똑같은 소망을 가졌었던 옛날을 떠오르게 한다.

그저 행복해야 할 시간에 참으로 뜬금없으면서도 당연한 것처럼

'이제 헤어져야 하는 건가?'

하는 독백이 가슴속에서 흘러나온 날,

나 또한 이 찰나부터 시들어가고 빛을 잃어갈 사랑을 지켜봐야 할 것이 두려웠었다.



거의 1년......

파크의 편지와 선물은 엘리노어의 방안에 뜯기지도 않은 채 쌓여가고

엘리노어는 할 말을 찾지 못한다.

가슴을 누르는 기다림의 무게에 방황의 날들을 보내는 파크.


나 역시 조바심을 내며 '진짜, 설마, 이렇게 끝나는 거야? 그건 아니지, 엘리노어?'하던 찰나,

파크에게 엽서 한 장이 날아든다.


"삶이 우리에게 서로를 주었다가 이렇게 맥없이 다시 가져가 버릴 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던

파크의 믿음이 엘리노어에게 가 닿은 것처럼.



5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이 너무 짧다.

빠져들어 읽으면서도, 읽어야 할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웠던 책이다.

작가에게 2탄을 내 달라고 시위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를 첫사랑의 추억으로(난 그저 바라만 보다 끝났었지만...), 그 설렘으로 데려다 준 이야기,

요즘의 아이들에게 진짜 사랑이 뭔지, 진짜 마음으로 서로의 '공기'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줄 책이다.

제발 이런 사랑을 꿈꾸기를.


이제 엘리노어와 파크의 이야기에서 튕겨져 나온 난,

아직 이런 사랑을 할 기회를 가진 아이들에게 무한한 동경과 질투를 느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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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와 철학자들 클래식 보물창고 16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율희 옮김 / 보물창고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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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와 철학자들』이라는 제목부터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센스 앤 센서빌리티', '오만과 편견', '인간과 초인' 등...다수의 'and'가 등장하는 제목들과는

피츠제럴드답게 사뭇 다르다.

알고 보니, 피츠제럴드가 습작을 하며 여러 출판사에 보내 출간을 의뢰했던 초기의 중요 작품들을 함께 묶은 첫번째 단편집이다.

말괄량이로 번역된 'Flapper'는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으며 도발적이었으며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들의 역할과 위치를 고민하고 의문을 제기했던 그 시대의 '신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단편집의 첫번째 작품 <앞바다의 해적>에 나오는 '아디타'가 이 신여성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소개해 준다.

피츠제럴드의 뮤즈였던 '플래퍼'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는 데에는 단 몇 페이지면 충분하다.

자기 배를 탈취하고 자신을 납치한 해적 칼라일 앞에서도 거침없는

그녀의 모험심과 용기, 당당함에, 그 순수한 젊음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질투 섞인 한숨을 내쉬게 된다.

거기에, 피츠제럴드는 '그녀의 아름다움, 젊음과 더불어 변색되어 갈 용기(p.48)'를 언급하여

우리를 한 번 더 한숨짓게 하지만,

100년이 지난 현대의 인간들에게 이러한 '용기'는

젊을 때에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천연기념물'임을 예측하진 못했으리라.

세번째 단편 <머리와 어깨>에는 진정한 '말괄량이와 철학자'가 출연한다.

열세 살에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한 비범한 천재 호레이스는

희극 뮤지컬에 출연하는 여배우 마샤를 만나고,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미국 철학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가 될 기회를 던져 버리고

한 회사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호레이스가

아내의 권유로 (건강을 위해!) 시작한 체조는 곡예 수준이 되고,

임신한 마샤 대신 생활을 책임지기 위해 나선 곡마장 공연에서 곡예사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그리고, 지루함에 지친 마샤가 쓴 책은 격렬한 찬사 속에 미국 문학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으며

이렇게 이 가정의 '머리와 어깨' 역할은 완전히 반전되는 것이다.


삶을 책임지기 위해 버려야 했던 자신의 꿈을, 아내에 대한 혼란스런 공감과 함께 기억해 내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의 밤은

생활에 물들기 전엔 어느 면에선 '신동'이었고 '철학자'였던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되어

이 작품은 말할 수 없이 비현실적이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슴 아픈 '희비극'이 된다.

일곱 번째 단편 <델리림플 잘못되다> 또한 전쟁 영웅으로 고향에 돌아와 대환영을 받지만,

2주일 만에 당장 일할 곳을 찾을 수 없어 겨우 식품 도매상의 창고에서 일하게 된다.

전쟁에선 그에게 수많은 훈장을 안겨 준 지성과 상황 파악 능력과 위기 대처 능력이

현실 생활에선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 델리림플.

서두르라....... 이것이 인생 규칙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어떻게 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p.280)

뭔가를 원할 때 골치 아픈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선과 악'이라는 기준을 버리기로 결심한 델리림플은

밀린 하숙비 15달러를 해결하기 위해 강도짓을 하고,

'자신의 이성을 앞선 감상적인 것들에 맞서는 반항아(p.287)'를 자처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려간다.

여덟 편의 단편들 하나 하나가 다 빛이 난다.

현실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시선과

웃음과 슬픔 중 어느 하나가 더 무겁다고 할 수 없는 묘한 균형 감각이

서정적이며 예리한 필체와 아이러니하게 어우러져

여러 번 나를 놀라게 한 피츠제럴드.

물질적 풍요와 성공에 대한 야망, 잃어버린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실망과 환멸,

삶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낭만과 환상을 담아낸 그의 작품들을 모두 읽어보고 싶다.

이 시간 이후, 나 또한 아디타처럼 다그치게 될 것 같다.

"달빛이 비치니 나에게 거짓말을 해 봐요. 거짓말처럼 근사한 이야기를 들려줘요."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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