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와 철학자들 클래식 보물창고 16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율희 옮김 / 보물창고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괄량이와 철학자들』이라는 제목부터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센스 앤 센서빌리티', '오만과 편견', '인간과 초인' 등...다수의 'and'가 등장하는 제목들과는

피츠제럴드답게 사뭇 다르다.

알고 보니, 피츠제럴드가 습작을 하며 여러 출판사에 보내 출간을 의뢰했던 초기의 중요 작품들을 함께 묶은 첫번째 단편집이다.

말괄량이로 번역된 'Flapper'는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으며 도발적이었으며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들의 역할과 위치를 고민하고 의문을 제기했던 그 시대의 '신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단편집의 첫번째 작품 <앞바다의 해적>에 나오는 '아디타'가 이 신여성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소개해 준다.

피츠제럴드의 뮤즈였던 '플래퍼'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는 데에는 단 몇 페이지면 충분하다.

자기 배를 탈취하고 자신을 납치한 해적 칼라일 앞에서도 거침없는

그녀의 모험심과 용기, 당당함에, 그 순수한 젊음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질투 섞인 한숨을 내쉬게 된다.

거기에, 피츠제럴드는 '그녀의 아름다움, 젊음과 더불어 변색되어 갈 용기(p.48)'를 언급하여

우리를 한 번 더 한숨짓게 하지만,

100년이 지난 현대의 인간들에게 이러한 '용기'는

젊을 때에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천연기념물'임을 예측하진 못했으리라.

세번째 단편 <머리와 어깨>에는 진정한 '말괄량이와 철학자'가 출연한다.

열세 살에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한 비범한 천재 호레이스는

희극 뮤지컬에 출연하는 여배우 마샤를 만나고,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미국 철학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가 될 기회를 던져 버리고

한 회사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호레이스가

아내의 권유로 (건강을 위해!) 시작한 체조는 곡예 수준이 되고,

임신한 마샤 대신 생활을 책임지기 위해 나선 곡마장 공연에서 곡예사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그리고, 지루함에 지친 마샤가 쓴 책은 격렬한 찬사 속에 미국 문학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으며

이렇게 이 가정의 '머리와 어깨' 역할은 완전히 반전되는 것이다.


삶을 책임지기 위해 버려야 했던 자신의 꿈을, 아내에 대한 혼란스런 공감과 함께 기억해 내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의 밤은

생활에 물들기 전엔 어느 면에선 '신동'이었고 '철학자'였던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되어

이 작품은 말할 수 없이 비현실적이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슴 아픈 '희비극'이 된다.

일곱 번째 단편 <델리림플 잘못되다> 또한 전쟁 영웅으로 고향에 돌아와 대환영을 받지만,

2주일 만에 당장 일할 곳을 찾을 수 없어 겨우 식품 도매상의 창고에서 일하게 된다.

전쟁에선 그에게 수많은 훈장을 안겨 준 지성과 상황 파악 능력과 위기 대처 능력이

현실 생활에선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 델리림플.

서두르라....... 이것이 인생 규칙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어떻게 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p.280)

뭔가를 원할 때 골치 아픈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선과 악'이라는 기준을 버리기로 결심한 델리림플은

밀린 하숙비 15달러를 해결하기 위해 강도짓을 하고,

'자신의 이성을 앞선 감상적인 것들에 맞서는 반항아(p.287)'를 자처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려간다.

여덟 편의 단편들 하나 하나가 다 빛이 난다.

현실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시선과

웃음과 슬픔 중 어느 하나가 더 무겁다고 할 수 없는 묘한 균형 감각이

서정적이며 예리한 필체와 아이러니하게 어우러져

여러 번 나를 놀라게 한 피츠제럴드.

물질적 풍요와 성공에 대한 야망, 잃어버린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실망과 환멸,

삶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낭만과 환상을 담아낸 그의 작품들을 모두 읽어보고 싶다.

이 시간 이후, 나 또한 아디타처럼 다그치게 될 것 같다.

"달빛이 비치니 나에게 거짓말을 해 봐요. 거짓말처럼 근사한 이야기를 들려줘요." (p.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