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일인자 1 - 1부 ㅣ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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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가문 사람이 마지막으로 집정관이 된지 400년이 지났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내, 두 아들, 두 딸과 함께 팔라티누스 언덕의 낮은 지역에 위치한 소박한 집에서 살고 있고, 신임 집정관 행렬을 따르는 처지였다. 출세하기 위해서 그에게 필요한 건 고귀한 혈통이 아니라 돈이었다. 
 
5년 전 법무관을 지낸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통상적인 경우라면 3년 전에 집정관이 되어야했다. 그러나 그는 절대 집정관에 출마할 수 없을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실력과 상관없이 한미한 가문 출신인 그에게 로마는 최고 권력자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누나는 제 살 길을 찾아 결혼을 해 이른 나이부터 가난뱅이 술꾼 아버지를 돌아봐야했던 극빈자 술라는 집정관을 한다고해도 부족하지 않는 파트리키 귀족의 후손이었다. 정부 니코폴리스와 클리툼나와 엮여 사는 자신의 처지에 넌더리가 난 술라 앞에 나타난 카이사르의 막내딸 율릴라. 열여섯 살 소녀는 술라에게 플잎관을 건네며 당돌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방대한 고대 로마사를 소설로 엮으면서 그 시작을 카이사르부터 출발한다는 점만으로도 작가가 충실하게 자료를 수집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소설의 전개 과정에서 서술하는 로마의 전반적인 상황을 읽고 같은 생각이 들었다. 로마사는 군대, 정치, 사회 제도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중간에 포기하는 독자가 적지 않다. 그런데 작가는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살리고 상상력을 입혀 재미를 더해 감칠나게 읽힌다. 물론 배경이 되는 사건이나 제도, 관습 등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인물들과의 정서적 관계 등은 허구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예를들어 신전 광장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푸스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가 로마 시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탈리아 동맹시들은 이탈리아 반도를 함께 수호한다는 목적 아래 로마의 군사적 비호를 받으며 자국의 병사들을 제공하는 대가로 특별한 지위와 혜택을 누리고, 이탈리아 동맹시들은 로마에 군대를 보냄으로써 공통의 대의를 위해 싸우며 반도의 민족들을 단결시켜준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이겨봐야 별 소득도 없는 외세와의 전쟁에 이탈리아 군대가 동원되어 의미없는 희생과 손실을 감수한다. 더구나 로마가 제공하는 로마 시민권은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에서 열리는 선거에 투표권조차 없을만큼 이류 시민권에 불과하며 그 혜택은 미미하다. 마리우스는 로마와 이탈리아가 상호 평등한 연합체라는 것을 상기시키지만, 루푸스는 그것은 형식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이 정지척으로 동등한 위치가 아님을 주장한다. 로마 시민권에 대한 문제점을 비문학으로 읽으면 지루해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처럼 로마 사회의 관습, 노예와 해방노예, 로마 평민의 교육 방식, 로마가 제국을 운영하는 방식, 로마의 환경 여건 등 역사적 사건과 사회 문제 등을 서신과 대화 방식으로 이해하기 쉽게 서술했다.  
 
1권에서는 혈통과 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한 시대를 휘어잡을 남자들의 야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고대시대의 혈통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타고난 실력자이지만 서자 출신의 누미디아 왕족 유구르타의 발목을 잡는 것은 혈통, 그 이상으로 능력자이고 재력까지 갖춘 마리우스의 발목을 잡는 것 또한 혈통이다. 그와 반면 최고의 혈통을 가졌지만 돈이 없어 출세길이 막힌 카이사르와 술라를 보면서 이러한 모순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시대성을 감안해 굳이 여성의 위치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을까싶지만 율리아와 율릴라의 대조, 출세를 위해 이혼을 요구하는 마리우스, 남편의 출세를 돕겠다고 이혼을 받아들이는 마리우스의 아내, 아버지라는 절대자를 피했더니 남편이라는 간수를 만나게 된 율릴라를 보면서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이 부분과 연계해서 카이사르가 흥미로운데 가정에서는 지극히 민주주의 방식을 채택하지만 정치는 왕정체제를 추구한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민주주의 역시 자신의 말을 잘 따를 경우를 전제한다. 더구나 결과적으로 딸들의 결혼은 정략혼이 되었으니 사실 여부를 떠나서 소설만으로도 그가 독재의 야심을 오래 전부터 가져왔고, 이를 하나하나 실현해나갔음은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어떤 책을 읽든 개인적으로 술라는 여전히 비호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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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형사 동철수의 영광
최혁곤 지음 / 시공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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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부서 중에 미수반이 있다. '미제 사건 수사반'이 아니라 '미심쩍은 사건 조사반'이라는 의미로써 경찰청 넘버1과 넘버2의 여의도 입성을 위해 꽃길을 걷는데 걸림돌을 제거하는, 즉 뒤치다꺼리 전담을 위한 별동대다. 이 부서의 총책은 은퇴한 지방경찰청장 출신 동철수 영감이고, 그의 행동대원은 언론사 기자 출신 형사 박희윤 경장, 그리고 40대 중년 주혜순 경위가 있다. 동철수 영감은 미수반 임무를 여가생활로 여기는 듯 하고, 일명 주바리로 불리는 주혜순 경위는 특채로 들어온 박 경장을 경찰로 인정하지 않고, 결국 발에 땀나도록 뛰는 건 박희윤 경장이다. 그런데 이 영감님이 엉뚱하게 내뱉는 말들이 예사롭지 않다. 박희윤은 그가 의도한 것인지, 얻어 걸린 것인지 아리송송하다.  









췌장암으로 투병 중인 가수왕 하필이 죽었다. 췌장암으로 삶을 비관한 자살로 결론이 나고 대중이 그의 죽음을 잊어갈 즈음 돌발 변수가 터졌다. 한 유력 신문에서 팬들로 추정되는 몇몇이 하필 자택 근처에서 서성대는 걸 봤다는 목격자 제보가 나왔다. 박희윤은 사건을 재수사하는 과정에서 하필의 죽음이 여러 사람의 이권과 맞물려 있음을 알아낸다. 하필의 죽음은 자살일까, 타살일까? 그의 유언장에 들어있는 내용은 그가 말한대로 일까? 삶과 죽음 자체가 반전인 가왕의 인생이여.


유명한 유튜버 탁해서가 자신의 해혼식을 마친 날, 개인 노천탕에서 머리에 심각한 부상을 당한 채 발견된다. 단순 사고라고 결론이 났지만 때마침 해혼식에 참여한 동 반장과 박 경장은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는다. 직업은 못 속인다고 함께 일하는 카메라맨과 친구인 군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 본 결과 탁해서의 현재 개인 방송 수익은 현저하게 떨어졌으며 고향집과 해혼식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목적이었음을 알게 됐다. 노천탕에서 사라진 탁해서의 목욕 가운과 허전한 탁해서의 서재 책상의 알 수 없는 무엇이 형사의 촉을 자꾸 건드린다. 누가 알았을까, 무심코 내뱉은 몇 마디가 사달이 될 줄은... . 


서촌의 유명한 냉면집 <행복면옥>의 백 사장이 자신의 식당 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강력한 용의자는 보험금 수령인이자 유산 상속자인 백 사장의 아들 백명섭인데 경찰측에서는 심증은 있으나 확실한 물증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 다른 한 명은 피해자 사망 시각에 식당에 들렀다는 주방장 김철현. 그러나 그 사람 역시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그와중에 명섭이 언급하는 심야손님. 백 사장이 반겼다는 의문의 심야손님은 누구이며, 범인이 노린 것은 무엇일까? 경쟁가게 효자면옥, 돈을 못 받은 사채업자, 알리바이가 애매한 주방장, 유산과 보험금 수령자인 아들. 그리고 더없이 안타깝고 슬픈 사건의 진실.  


예전에 유명 연예 기획사에서 일했던 중년 남자가 자신의 연립주택에서 음독자살했다. 무대 사고가 있기 전까지 촉망받았던 뮤지컬 여배우가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 뒷마당에서 살해된 채 발견됐다. 이 두 사건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사건의 시작은 십수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물고 물리는 복수의 고리. 




소설마다 등장하는 소재는 현대 사회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거나 혹은 수시로 일어나 무심코 지나갈 법한 사건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더 경각심을 가져야하는 사건들이기도 하다.  


돈벌이를 위해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질되는 개인방송, 화려한 연예계의 외롭고 잔인한 약육강식 생존 방식,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피해를 입는 가게 주인들, 개인의 재능과 적성과는 무관하게 강제하는 가업과 가족간의 갈등, 신념과 맞바꾼 정경유착의 이면, 직업과 명성을 상품화하는 전문직 종사자들, 탈세와 절세의 경계에서 줄타기기를 하며 문어발식 학원 사업을 벌이는 사학재벌, 그리고 언론이든 경찰이든 고위층 퇴직자의 종착역은 여의도 입성 등 비일비재로 일어나 해당하는 피해자들을 더이상 주목하지 않는 현 세태를 꼬집는다.


에피소드마다 작가가 짚어내는 부분에는 외면받은 피해자들이 있다.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연예 지망생들, 은퇴한 가왕, 황혼이혼의 노년, 빠르게 변해가는 요식업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냉면집 사장, 주목받지 못하고 고집불통 늙은이로 전락한 4선의 영광에 빛나는 전 국회의원 등 외면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는 유쾌하고 훈훈하게 담아냈다. 지금도 현재진형행임에도 잊고 있었던 사회문제를 개성 강한 주인공들을 통해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게 인간적으로 그려냈다. 좋은 작가를 만났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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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한 조각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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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올슨, 당신은 어떤 분인가요?" 
 

동생 앨과 함께 사는 크리스티나의 집에 어느날 한동네에서 사는 벳시가 그림을 그리는 앤디라는 청년을 데리고 온다. 두 사람은 짧은 기간에 연인 관계에서 결혼까지 하는데, 이후 그들이 크리스티나의 집에 이젤을 놓으면서 수시로 들락거리자 조용하던 집이 북적거린다. 크리스티나는 이 두 사람을 보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크리스티나는 세 살 때 열병을 앓은 후 발이 변형으로 뒤틀려 걷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녀의 부모는 딸이 일곱 살 되는 해에 장애를 치료해보려고 했지만 어린 소녀는 두려움으로 검사를 완강히 거부했고, 부모는 더이상 이에 대해 권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애로 인한 어떠한 호소도 받아주지 않았다.  


크리스티나의 집안은 대대로 모험가다. 그녀의 외조부모는 거친 바다에서 모험하며  반평생을 보냈고 바다에서 세 아들을 잃었다. 스웨덴 출신인 아버지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다섯 살에 예테보리항에서 뉴욕으로 출항하는 무역선을 탔고, 20대를 바다에서 보낸 후 엄마와 결혼해 쿠싱에 정착했다. 외할머니 마메이는 손녀에게 모험심과 가보지 못한 세계와 바다에 대한 동경, 그리고 강인한 생명력을 심어주었다. 어린시절부터 크리스티나는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고 싶었다. 그녀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세상을 두루 다닐 수 없더라도, 적어도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었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남았다.


병약해진 아버지와 어머니를 돌보고, 아버지가 당한 사기로 가난까지 감내해야하는 생활, 동생 샘을 비롯해 주변의 사람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외톨이이며 황량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크리스티나의 결핍과 자격지심은 독이 되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상처입힌다. 언제부터인가 집안의 트러블 메이커가 되어 버린 크리스티나는 어린 시절에 비록 고집이 셌지만 자기의 감정만 생각하지 않았건만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일평생 병약한 어머니 대신 가족들 뒷바라지를 해왔던 크리스티나의 상실과 허무는 헤아릴 수 없다. 그런 그녀 앞에 별처럼 나타난 꼬마 벳시. 그리고 십수년이 지나 벳시가 데려온 앤디. 그는 많은 부분에서 크리스티나와 닮아있다. 앤디 역시 한쪽 다리가 불편하고, 지나치다 싶을만큼 고집이 세며, 독립적이면서도 결국 부모의 벽을 넘지 못했다. 호기심이 왕성하고, 제약받는 신체와 가족이라는 현실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는 것 또한 아주 흡사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의 내면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소설에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과 시인 에밀리 디킨슨이 자주 등장한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나 말년에 은둔하며 시를 썼던 에밀리 디킨슨 삶에 크리스티나가 깊이 이입했다면, <보물섬>은 그녀가 상상해온 자유와 낯선 세상을 향한 동경을 상징한 것일테다.


앤디가 그림 안에 자신을 그려넣어 화폭 안에서 현실 너머 자유의 세계에 도달했던 것처럼 크리스티나 역시 그의 그림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찾을 것이다. 평범하고 싶어서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중년의 나이에 스스로를 젊은 아가씨로 생각한다는 크리스티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늘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했던 크리스티나의 인생이, 앤드루 와이어스의 그림을 계기로 소설의 마지막을 이루고 있는 문장들처럼 벅찼기를 바람한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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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렘 - 미래학 학회 외 14편 ㅣ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40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외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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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봤던 그 작가를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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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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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시의 자랑거리인 화가 한조는 지역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단순하고 평온한, 그리고 비교적 성공한 삶을 살았다. 그의 일상이 흐트러진 것은 마흔세 번째 생일날이었다. 마흔세 살의 첫 아침, 눈을 뜨면 맞아주던 아내는 간데 없고 전날 저녁에 벌였던 조촐한 파티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집안은 온기 한 점 없고 아내의 소형차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느닷없이 사라졌다! 


그가 원할 때 늘 곁에 있었던 아내였건만 한조는 그녀의 전화번호, 그녀가 자주 가는 장소, 그녀의 가까운 친구도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아내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겨우 생각해 낸 핸드폰 단축키를 눌러 봤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기계음이 들려왔고, 그의 곁에 있는 반려견만이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들려오는 한조의 휴대폰벨 소리를 따라 간 곳은 아내가 지내던 작업실. 작업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그의 핸드폰과 서류봉투. 봉투 안에는 두툼한 A4용지 묶음이 있었고, 첫 장에는 <나에 관한 너의 거짓말>이라는 제목이 씌여 있었다. 언제든 남편에 대한 글을 쓰겠다던 아내. 아내가 쓴 소설에는 자신과는 너무 다른 한 파렴치한 화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아내는 왜 이런 글을 쓴 것일까? 아내는 두 사람이 사는 동안 내내 모델로서, 보호자로서, 연인으로서, 비서로서 모든 역할을 감당하며 변함없이 사랑으로 헌신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은 피해자이며 남편은 가해자라고 몰아붙인다. 문득, 한조는 열여덟 살의 여름이 떠올랐다. 용기가 없어 외면했던 부끄럽고 부도덕했던 그 과거와의 대면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평온했던 두 가족은 지수의 사망으로 인해 나락으로 곤두박질 친다. 지수의 부모는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어린 해리는 외삼촌 댁에 입양된다. 한 가장이 성폭행 살인자가 되면서 아내는 알콜 중독자로, 두 아들은 살인자의 자식으로 낙인찍혔다. 헌신하는 아내를 만나 성공한 화가로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한조가 한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배경에는 25년 전, 8월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추리소설 형식으로 진실 찾기에 나선 소설은 표면적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만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하나씩 꺼내놓는다. 다정하지만 의지가 되지 않는 가장, 가족에 대한 사랑보다 야망이 앞선 남자,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상에서 두려움으로 진실을 묻어둔 아이들. 욕망과 질투, 죄책감, 사랑 이 모든 감정들이 얽혀져 스스로조차 진실을 망각해 버린 사람들. 


소설의 결말은 충격 이상으로 끔찍하고 슬프다. 딸의 죽음으로 가족과, 가족과 다름없었던  이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적의와 공포, 시간이 흐를수록 여고생 피살 사건을 불편해하고 비극적 사건의 연대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을 피해자로 생각하며 피해자 유가족에게 딸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월호 사건, 위안부 문제 등을 대하는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 모습과 겹쳐진다. 잘못은 어디부터 시작됐을까? 무엇보다 어린 소녀가 살아갈 힘이 복수였다는 사실이 많이 안타까웠다. 그런데 그조차도 오해에서 비롯됐다면 그녀가 쏟아부은 삶의 의미는 어디에 두어야 하나.  


미스터리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독자의 감정선을 흔들어 놓는 작가의 탁월함은 이 소설에서도 빛난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마다 여운이 길었던 작품들처럼 이번에도 어린 소녀가 감당했던 아픔이 한동안 남아있을 듯 하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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