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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이산시의 자랑거리인 화가 한조는 지역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단순하고 평온한, 그리고 비교적 성공한 삶을 살았다. 그의 일상이 흐트러진 것은 마흔세 번째 생일날이었다. 마흔세 살의 첫 아침, 눈을 뜨면 맞아주던 아내는 간데 없고 전날 저녁에 벌였던 조촐한 파티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집안은 온기 한 점 없고 아내의 소형차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느닷없이 사라졌다!
그가 원할 때 늘 곁에 있었던 아내였건만 한조는 그녀의 전화번호, 그녀가 자주 가는 장소, 그녀의 가까운 친구도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아내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겨우 생각해 낸 핸드폰 단축키를 눌러 봤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기계음이 들려왔고, 그의 곁에 있는 반려견만이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들려오는 한조의 휴대폰벨 소리를 따라 간 곳은 아내가 지내던 작업실. 작업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그의 핸드폰과 서류봉투. 봉투 안에는 두툼한 A4용지 묶음이 있었고, 첫 장에는 <나에 관한 너의 거짓말>이라는 제목이 씌여 있었다. 언제든 남편에 대한 글을 쓰겠다던 아내. 아내가 쓴 소설에는 자신과는 너무 다른 한 파렴치한 화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아내는 왜 이런 글을 쓴 것일까? 아내는 두 사람이 사는 동안 내내 모델로서, 보호자로서, 연인으로서, 비서로서 모든 역할을 감당하며 변함없이 사랑으로 헌신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은 피해자이며 남편은 가해자라고 몰아붙인다. 문득, 한조는 열여덟 살의 여름이 떠올랐다. 용기가 없어 외면했던 부끄럽고 부도덕했던 그 과거와의 대면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평온했던 두 가족은 지수의 사망으로 인해 나락으로 곤두박질 친다. 지수의 부모는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어린 해리는 외삼촌 댁에 입양된다. 한 가장이 성폭행 살인자가 되면서 아내는 알콜 중독자로, 두 아들은 살인자의 자식으로 낙인찍혔다. 헌신하는 아내를 만나 성공한 화가로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한조가 한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배경에는 25년 전, 8월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추리소설 형식으로 진실 찾기에 나선 소설은 표면적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만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하나씩 꺼내놓는다. 다정하지만 의지가 되지 않는 가장, 가족에 대한 사랑보다 야망이 앞선 남자,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상에서 두려움으로 진실을 묻어둔 아이들. 욕망과 질투, 죄책감, 사랑 이 모든 감정들이 얽혀져 스스로조차 진실을 망각해 버린 사람들.
소설의 결말은 충격 이상으로 끔찍하고 슬프다. 딸의 죽음으로 가족과, 가족과 다름없었던 이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적의와 공포, 시간이 흐를수록 여고생 피살 사건을 불편해하고 비극적 사건의 연대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을 피해자로 생각하며 피해자 유가족에게 딸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월호 사건, 위안부 문제 등을 대하는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 모습과 겹쳐진다. 잘못은 어디부터 시작됐을까? 무엇보다 어린 소녀가 살아갈 힘이 복수였다는 사실이 많이 안타까웠다. 그런데 그조차도 오해에서 비롯됐다면 그녀가 쏟아부은 삶의 의미는 어디에 두어야 하나.
미스터리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독자의 감정선을 흔들어 놓는 작가의 탁월함은 이 소설에서도 빛난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마다 여운이 길었던 작품들처럼 이번에도 어린 소녀가 감당했던 아픔이 한동안 남아있을 듯 하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