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런한 끼니 - 홈그라운드에서 전하는 계절의 맛
안아라 지음 / 안온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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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에세이를 좋아한다. 요리를 일상에 담든, 일상을 요리에 담든 소소한 하루와 음식이 맞물린 글을 읽으면 책에 쓰여 있는 음식이 무척 궁금해진다. 미식가도 대식가도 아니고, 먹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으며(난 아직도 먹방을 무슨 재미로 보는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 요리를 잘하느냐고(혹은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그렇다'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음식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사먹는 것보다 만들어 먹는 게 더 좋기 때문이다. 외식은 귀찮고. 아무튼 희안하게 따박따박 음식과 요리에 관한 에세이를 읽는다.  

 

반려견을 들이고 반려견의 식이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식습관 및 몇몇 생활습관까지 조절하게 된 저자의 모습부터 몸의 회복을 돕는 음식이야기와 친한 지인들과의 추억담을 읽으며 음식이 주는 따뜻함이 새삼 와닿는다.  


읽으면서 "앗, 나도!" 했던 부분은, 잡곡밥과 김밥 이야기. 저자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잡곡밥이라고 했는데, 나의 소울 푸드가 잡곡밥이다. 종종 허기가 지면 잡곡밥 한 숟가락만 먹어도 금세 든든해진다. 그리고 '김밥에는 싸구려가 없다.(p48)'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특히 채소값이 비싼 요즘이라면 더욱 그렇다. 거기다 김밥소를 다듬고 조리하고, 금방한 잡곡밥에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돌돌말아 썰어내기까지의 노동의 과정과 정성을 생각하면 김밥을 싸구려라고 말할 수 없다(어제도 김밥을 말았다).  


분명 음식과 요리에 대한 책이지만, 막상 읽다보면 삶에 대한 이야기다. 직장에서의 반복되는 작업,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로운 관계, 버림과 정리, 과하지 않음과 소박함에서 오는 편안함, 살아가는 데 매번 찾아오는 숱한 고민들, 타인의 삶에서 배우는 지혜와 용기, 선순환되는 선의와 호의, 그리고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는 위로. 


무엇을 먹고 싶다, 보다는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책이었다. 








<책에서 소개한 음식 중 만들어 볼 음식> 


♣ 감태흑임자김밥 _ 아직 감태로 김밥을 만들어보지 못했다. 한 번쯤 해봐야지 했는데, 마침 이 레시피가! 


♣ 카레쳐트니와 렌틸오거트카레 _ 사실 카레는 그다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다. 그런데 들어가는 재로를 보니 맛이 궁금해지네. 


♣ 채소고기와인찜 _ 주로 간장베이스 + 청주로 찜하는데, 이 레시피에는 와인을 잠길 정도로 사용한다.  


♣ 복숭아홍차시럽 _ 가장 좋아하는 과일, 복숭아. 그냥 먹기에도 부족하지만 이번 여름에는 조금만 만들어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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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카베 악바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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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생 스물여덟 살, 한 청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사이러스 샴스. 
태어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비행기 격추 사건로 사망했고, 이후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조국 이란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성장하는 내내 전혀 기억이 없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이방인으로서 갖는 내재적 불안감을 안고 살아왔다. 청년은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위대한 예술 작품을 창작하고 싶고, 그로써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찮게 살다가 이름없이 죽어간 부모의 삶과 죽음보다는 자신의 죽음이 그들보다는 의미가 있기를 바란다. 의미있는 죽음에 집착해 죽기 전에 의미있는 글을 쓰고자 한다. 그래서 '순교 프로젝트'를 결심하고 그에 맞는 인물을 찾아낸다. 예술가 오르키데. 말기암을 진단받고 삶의 끝에 놓인 스스로를 작품화하는 중년 여성 예술가와 마주한다. 
 





 



이 소설은 두 세대를 아우르며 이해하는 화해의 장이자 한 청년의 성장기이고, 삶과 사랑, 애도와 그리움을 담은 연서戀書다. 1980년대를 중년의 나이로 지나온 알리와 로야 세대, 2010년대에 이십 대 청춘을 보내고 있는 사이러스 세대. 소설은 이렇게 30년간의 시간을 넘나들며 서술한다. 각 장章마다 제사題辭 가 있는데 사이러스가 쓴 시나 산문이다. 이 글들은 죽음을 맞은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는데, 이는 사이러스의 방식대로 그들의 인생을 기리는 것으로 읽힌다. 


여성과 모성이라는 굴레에서 절실하게 벗어나고 싶었던 로야.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양계장과 아들 사이러스 외에는 삶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알리. 이 두 사람 외에도 지 노바트, 아라시 잔 등 전쟁과 억압 속에서 한 시대를 살아낸 그들의 삶을 통해 독자는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공유한다. 



사이러스는 화가 오르키데와 순교에 대해 대화하면서 자신의 삶을 털어놓으며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오르키데의 말과 질문을 들으면서 사이러스는 자신의 진짜 자아가 무엇인지 본인 스스로 모르는 것에 답답해한다. 어머니의 허망한 죽음, 평생 양계장 노동자로 살면서 아들이 성인이 되자 마치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죽음을 맞은 아버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하찮은 죽음에 대한 혐오로 인해 의미있는 죽음에 매달렸지만, 정작 중독에 허우적거리며 자아를 찾지 못했던 것을 깨닫는다. 사이러스는 오르키데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동안 겪어왔던 험한 경험들이 무의미하기만 한 건 아니기를 바란다. 자신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지 말라고,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고, 그러니 스스로에게 나이들 기회를 주라고 말하는 오르키데. 비로소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결핍과 그리움을 인정하고, 자신을 위해 슬픔과 외로움의 시간을 버텨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사이러스.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은 고작 사나흘에 불과했지만 사이러스에게는 그 어떤 시간보다 유의미했을 터다.  


이십대 청년은 의미 있는 죽음을 찾아 헤매지만, 진정 찾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살아야할 이유였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삶에 확신을 가지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확신이 늘 정답의 길로 이끌지도 않는다. 소설에는, 타인의 시선에서는 성공한 삶이었으나 한평생 부채감을 벗어버리지 못했던 이도 있고, PTSD의 고통을 껴안으며 살아가는 이도 있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행복한 날보다는 참고 견뎌야하는 시간이 훨씬 많은 게 인생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함을, 소설은 말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소설의 분위기가 우울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읽으면서 복선으로 등장하는 몇몇의 지점과 암시하는 장면들 그리고 시대와 인물을 교차하는 서술방식은 미스터리 형식을 갖추고 있어 은근한 긴장감을 자아내고, 몽환적인 사이러스의 꿈속 대화는 읽는 사람의 슬픔을 건드린다. 그리고 마지막에 터지는 반전. 그 반전 또한 너무 애달퍼서 마음이 아프다.  


주인공 사이러스뿐 아니라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독자가 있다면 위로가 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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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2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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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마을 태고를 배경으로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공간을 이루고, 그 공간이 다시 시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다.  


미하우와 게노베파, 크워스카와 나쁜 인간의 시간.
파베우와 미시아, 루타와 이지도르의 시간.
포피엘스키와 게임(신)의 시간.
그리고 아델카의 시간. 


두 차례의 전쟁과 냉전 시대, 민주화 운동, 산업화를 겪으며 태고인들은 때로는 피해자가 되고, 때로는 박해의 목격자가 된다. 독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 인류의 삶과 그 안에서 약자로 살아야했던 여성, 장애인, 부랑아 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특히 게노베파와 크워스카에서 시작되어 아델카까지 이어지는 여성 연대기는 독자들에게 가슴 뭉클해지는 진한 여운을 안긴다.  






 
 
짧게 끊어가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형식을 취하는 소설의 화자들은 각양각색이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뿐 아니라 전쟁 중에 태고에 들어온 외지인들, 태고인이지만 비주류에 해당하는 인물들, 태고의 동물과 식물, 신, 천사, 게임 등 여러 화자들이 등장한다. 출생, 성장, 젊음, 사랑, 병病, 노화, 선善, 악惡 등 이 세상에 생명을 부여받고 온 존재라면 한 번쯤은 겪게 되는 것들을, 우리는 이 소설에서 다채로운 색깔로 만날 수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공평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각자만의 시간과 속도로 살아간다. 저마다 다른 그 시간들이 맞물리면서 커피 그라인더가 돌아가듯 그렇게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게 삶이다. 


삶의 근원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노년기가 되면 만물을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혜안이 트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여전히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은 것에 대해 탄식하는 이지도르처럼, 우리는 늘 의문과 회한을 품는다. 하지만 만물이 존재하는 수만큼 삶의 형태 또한 그 수에 비례할테니 정답이 있을 리 없다.   


태고로 대변하는 우주적 관점과 신화, 자연과 인간의 합일, 정신과 물질, 선과 악(또는 천사와 악마), 육체와 영혼, 삶과 죽음의 넘나들이가 판타지처럼 아름답게 그려지는 소설이다. 한 세대의 죽음은 다음 세대의 탄생을 알린다. 이렇듯 죽음이 곧 끝이 아님을, 토카르추크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이 처음 출간된 직후에 읽고 6년만에 재독이다.  
처음에 읽었을 당시 상당히 인상 깊게 읽었던 이 책을 두 번째 읽을 때에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만족스러운 재독이었다. 전혀 기억에 없었던 부분들을 채우는 시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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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불탈 때 - 인간을 향한 자연의 마지막 경고, 초대형 산불이 울리다
조엘 자스크 지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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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경북 의성에서 시작한 산불은 경북 지역을 초토화 시켰고, 동시간대 산청에서도 초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진화는 데 수일이 걸렸으며 엄청난 규모의 토양을 회색빛으로 삼켰고,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이재민이 되었다. 이에 따른 인명 및 물적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노력으로 단시간에 해결할 수 없는 숲이 사라졌다. 이에 앞서 2023년에 발생한 하와이 초대형 화재는 도시 전체를 삼켜버렸다. 이제는 우리가 초대형 산불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 달라져야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숲의 식민화, 불 산업 복합체 및 산업형 삼림, 생태계의 규제와 계획, 국토 개발, 기후 온난화,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 '불의 문화'의 변화, 메가파이어와 통제된 불의 구분, 산불 예방에 대한 단순 이원론적인 접근 지양, 화염 테러 등 여러 측면에서 대형 화재를 다룬다.  


2010년 이후에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산불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띤다. 과거 산불은 계절의 영향에 따른 예측 가능하고 제한된 범위 안에서 발생했다면 현재의 산불은 '메가파이어'라는 극단적인 현상인데 이 불길은 비정상적이고 발생 예측이 불가하며 한 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는다. 저자는 머리말을 통해 이 글의 목적은 메가파이어 현상에 공동 행동을 촉구하는 여론 촉진제로 삼아 인간 존재의 조건을 보존하기 위한 행동을 촉구하는 제안을 포함한다고 밝혔다. 또한 초대형 산불은 인간이 적응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비극적이고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며, 우리가 일으켰고 결국 우리에게 그 피해가 돌아오는 메가파이어에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를 물어야 할 때라고 얘기한다. 


초대형 산불은 약 20년 전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반면, '메가파이어'라는 용어는 최근에 출현했다. 여기서 '메가'는 화재로 소실된 산림이나 땅의 규모뿐만이 아니라 심각하고 지속적인 화재로 인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생명체가 숨쉴 수 없게 하는 볼모지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메가파이어는 숲의 본질이 변형될 수 있고, 대규모 상수원의 오염, 도시 전체 폐쇄로 인한 이주민 발생을 염두해야 한다. 불은 자연을 재생시키고 풍요롭게 만드는 본질을 가지고 있고, 산불은 숲 생태계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하지만 불이 자연적 존재에서 사회적 존재로 가주될 때 불은 더이상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대다수의 대형 산불은 사람에 의해 발생한다. 지중해 지역의 경우 자연적 원인으로 발생하는 산불은 전체의 2%밖에 되지 않는다. 인간 때문에 발생한 산불의 비율이 전체 95%에 달한다. 문제는 초대형 산불 발생이 점점 더 잦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한 번 산불이 발생한 이후 그 다음 새로운 산불이 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숲의 재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숲이 회복하기까지 약 50년이 걸리는데 잦은 산불은 나무가 자랄 틈을 주지 않고, 기후 변화로 인한 폭우와 폭설은 토양을 모조리 쓸어내린다.  


ㅡ 


야생의 세계에 질서와 규율을 도입한다는 것은 불확실한 자연적 사건들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겠다는 숲의 식민지화다. 이는 야생을 대상으로 하는 영토 정복, 국토 개발 정책들과 닿아 있다. 수십억 달려 규모에 달하는 불 산업 복합체는 환경 보호나 안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경제적 이익의 논리에 따라 개발되고 있다. 


산업적 이익을 위해 숲을 장악하는 것은 메가파이어의 발생을 촉진한다. 특히 아프리카와 남미에서는 경제적 수익성(단일종 나무)을 위해 체계적인 산불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는 심각한 산림 파괴를 초래한다. 산업형 산림(플랜테이션 숲)은 그 자체로 불에 타기 매우 쉽기 때문에 환경을 화염에 노출시켜 위태롭게 만든다. 이는 산림의 불량화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단일림은 오래된 숲에 비해 지구 온난화와 산불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다. 따라서 생물 다양성의 빈곤화는 산불이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우리 스스로 제공하는 셈이다.  


대형 산불은 지구 온난화의 원인이 되고, 이는 다시 산불 발생의 원인이 된다. 대형 산불은 같은 지역에서 자동차들이 1년 동안 배출하는 것보다 더 많은 많의 이산화탄소를 몇 개월 만에 발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메가파이어로 인해 오염된 물이 유출되면 강 전체를 오염시킨다. 따라서 대형 산불의 빈도 및 강도 증가는 아주 위험한 미래를 전망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산불은 진압보다는 예방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진압 패러다임이 우선하고 있고 산불을 싸워야할 적으로만 여기는 한 메가파이어에 적합한 예방 지침을 세우지 못한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 줄어들수록 산불의 심각성은 커진다. 저자는 호주 원주민의 사례를 들어 산불 예방 정책을 일관성 있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이원론적 철학보다는 상호 보완성과 상호 변형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과거에 불을 쓰던 관행과 불에 관한 전체론적 과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인간과 환경이 접촉하고 만나고 서로 맞춰 가며 영향을 주고받는 영역의 역할을 했던 불의 문화. 저자는 메가파이어와의 싸움과, 통제된 불과의 싸움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짚는다. 후자의 경우 무조건적인 진화는 오히려 메가파이어 확산에 유리한 가연성 물질이 축적되도록 부추긴다. 통제된 불이 금지된다면 숲은 유리 덮개 속 자연이 되고 만다. 우리는 인간과 자연을 완벽히 분리시키며 살 수 없다. 


ㅡ 


메가파이어 피해자들은 파괴와 그들 역사의 상실 등 붕괴를 경험한다. 방화로 인한 산불은 방화범에 의해 그 파괴력이 최대치로 향한다. 이는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테러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방화는 갑작스럽게 발생해 대응이 늦어지고 확산 속도가 빨라서 강력한 파괴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낮은 비용, 적은 에너지 소모, 언론의 주목, 범인을 찾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방화로 인한 대형 산불의 원인은 방화에 있지만 산불을 가속화, 극대화시키는 것은 지구 온난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기억해야한다.   


가뭄 홍수는 물론 산불까지 자연을 과학기술로 완정히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함과 환상이 가져온 부주의, 온실가스와 기후변화가 자연현상이며 저절로 해결될 거라는 안이함과 불감증. 황폐해진 땅, 생태계 훼손, 문명 소멸은 인간의 특정한 파괴 행위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메가파이어로 인해 우리가 겪는 것은 토지, 집, 자연의 경관 등 물리적인 소멸뿐 아니라 깊은 상실감과 무력감, 불안과 우울, PTSD다.  


메가파이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인종, 지역, 성별, 계층 등의 조건을 모두 떠나서 새로운 형태의 연대와 환경 윤리의 공유다. 따라서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는 익명적으로 연결된 거대 사회를 어떻게 인류 운명 공동체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이다. 저자는 인간들끼리의 토론과 추론이 아닌,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관계를 구축하고 인류의 공동 경관을 보호하는 새로운 사회 계약의 체결을 말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에세이 『농업』에서 지속 가능하도록, 미래 세대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세상을 설계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윤리적 원칙임을 주장했다. 이것보다 더 우선해야 할 가치가 있을까? 



책을 읽고 쓰면서 이번만큼은 나의 개인적 소견이나 책의 평가보다는 저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일목요연하게 써내려간 저자의 글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그래서 우리가 시급히 고민하고 대안을 세워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를 바람한다. 




※ 도서지원

자연 재해와 범죄 사건은 경계가 명료하지 않고 복잡하게 얽힌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는다. 인간의 동기와 자연의 원동력은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명확하게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너무도 긴밀하게 얽혀 있기에, 기존의 논증 방식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이 이 초대형 산불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문제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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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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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한바탕 소동으로 10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 애나를 떠올리는 사이 바움가트너.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활기 넘치는 애나는 케이프 코드의 파도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가 파도와 마주쳐 등이 부러져 죽었다. 







여러 등장인물의 삶의 이력을 통해 본 각 세대의 시대상과 젊은 시절의 초상을 작가 특유의 다정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죽은 아내를 놓지 못했던 노교수의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고, 부모들의 삶에 대한 기억 등 독자는 아내 애나의 글과 그 글들을 정리하는 바움가트너를 통해 누구나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폴 오스터는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역사 즉 관계와 의존, 상실과 외로움, 제 삶을 살아낸 후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애도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게 이야기한다. 


앙헬 플로레스의 손가락 절단 사건은 바움가트너가 10년 전 아내를 잃은 상실과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아내가 떠난 후 몇 달 동안 의식이 분열된 자신의 모습은 플로레스가 겪을지도 모를 환지통과 같은 선상에 있는데, 바움가트너 역시 애나가 죽은 후 여섯 달 동안 그녀에 대한 '환지통'을 경험했다. 그 여섯 달 동안 바움가트너는 방향 감각을 상살한 채 비합리적인 충동에 휘둘리고 흔들리며 지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몇 권의 책을 이어서 써냈다. 다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우정을 쌓으며 때로는 다른 여자에게 호기심을 가졌다. 오히려 애나의 죽음 이후 훨씬 더 생산성 있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애나를 사랑했던 내면 한 부분을 영혼의 깊은 곳에 영원히 죽은 채로 묻어둔 것이었음을, 그는 불에 타 쪼개져벼린 냄비를 보고 깨닫는다. 바움가트너는 환지통의 궁극적인 치료법은 없다고 말한다. 폴 오스터는 인생이란 곡절마다 겪는 환지통을 완화해가며 살아가는 일임을 말한다고 읽혔다. 그렇다면 환지통을 어떻게 완화할 수 있을까. 



기억과 애도, 그리고 연결됨.
소설 후반부가 인상적이다. 대학 후배인 톰은 바움가트너에게 애나의 시로 논문을 쓰고 싶다는 젊은 여성 비어트릭스 코언을 소개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이후 바움가트너와 비어트릭스는 이메일을 통해 우정에 가까운 관계가 되고 애나와 똑닮은 그녀를 딸처럼 사랑하게 된다. 또한 비어트릭스의 방문을 대비해 정원을 손질하는 데에 소설 첫 부분에 등장했던 검침원 에드의 재등장까지, 이는 폴 오스터가 소설 내내 썼던 '연결됨'을 아주 잘 보여주는 설정이다. 사람과 사람,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 기억과 상실 등 인생 전반에 있어 거의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없이 고립된다면 우리는 살아갈 힘을 잃는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떠올랐던 사람들이 있었다. J 씨, M 선생님을 비롯한 몇 분들. 특히 바움가트너의 어머니에 대한 서술을 따라가자니 자연스레 은섬 씨의 삶이 겹쳐졌다. 물론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주변 인들물과의 관계 방식도 다르지만 1900년대를 지나온 이들의 삶과 그들 스스로 부여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에는 분명 비슷한 정서들이 있다. 나는 제 삶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이들에게 늘 감동을 받는다.   



가제본 책을 받았을 때는 아직 정식 출간 전이었다. 
내용적으로 구구절절 쓰고 싶은 얘기들이 많지만 출간 이후 읽을 독자들을 위해 남은 이야기들은 별도의 독서노트에 써둔다. 삶을 관조하는 따뜻하고 다정한 폴 오스터의 시선이 훈훈하게 들어오는 소설이다.  


가히, 그의 아름다운 마지막 소설이라 하겠다.



※ 가제본 도서지원   

외로움은 사람을 죽여요, 주디스. 그건 사람의 모든 부분을 한 덩어리씩 먹어 치우다 마침내 온몸을 삼켜 버려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이 없는 것과 같죠. 운이 좋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 그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중요해질 정도로 가까워지면, 삶은 단지 가능해질 뿐 아니라 좋은 것이 돼요.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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