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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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후안과 '나'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팰리스에 사는 노인 후안 게이는 죽어가면서 자신을 찾아온 청년에게 '잰 게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완성하라는 유언과 함께 대부분의 페이지를 검게 칠해 지운 책 두 권을 남긴다. 그 여자의 이름은 얀, 또는 잰, 또는 헬렌.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책이, 첫 챕터에 등장하는 '팰리스'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떠돌이들이 머무는 사막의 '펠리스'는 현실 세계이면서 동시에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기거하는 듯한, 계절이 바뀌고 밤과 낮의 길이가 달라지는, 영적이고 몽환적이기까지 한 환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후안은 이곳을 '유령 마을'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물리적으로 죽고 영혼만 남은 자들이라는 의미, 다른 하나는 살아 있음에도 살아 있는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작가는 소설 곳곳에 이중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문구와 상황들을 많이 배치한 것으로 읽힌다. 예를 들어 제냐가 공황이 와서 꼼짝 못한 채로 눈물만 흘리는 어린 후안을 시장에서 발견했을 때 던진 질문("길을 잃었구나, 그렇지?") 역시 단순한 '길'만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제냐의 그림책에 대한 내용을 비롯해 많은 부분들에서 발견된다. 
(4부에 이르면 '나'와 후안이 머무는 곳을 왜 '팰리스'라고 부르는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취급되던 시대. 동성애를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착각. 동성애에 씌어지는 범죄화, 낙인, 병리화. 그에 따른 그들의 정신적 붕괴 유도. 인종주의와 동성애 억압은 자연스럽게 우생학으로 이어진다. 발언권을 잃고, 아무도 기억하기를 꺼리는 이들의 목소리와 기록들. 두 권의 책,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그어진 검은 줄 밑에 있는 문장들은 억압당하고 삭제 당한 그들이다.  


낙인찍인 이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기 위해 대항 서사를 만들고자 했던 잰의 저항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검게 칠해져 삭제를 강요당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이제는 귀기울여보자.   


논픽션처럼 전달되는 이 소설은 여느 퀴어소설보다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곧 죽을 듯 말라서 뼈만 남아 힘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후안의 목소리에서 낙담이나 절망보다는 처절한 저항을 느낀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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