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날들의 기록 - 철학자 김진영의 마음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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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나는 늘 조금 울적하고 슬프다. 하지만 그 슬픔 안에 모종의 기쁨이 또한 들어 있음을 난 안다. 아마도 그 슬픔과 기쁨이 나에게는 사랑이고 조용한 날들이리라.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선생이 쓴 짤막한 글 모음집이다. 장문도 있지만 대부분 메모에 가까운 단상들이다. 700쪽인데다 리뷰 기한이 약속된 책이라서 빠르게 읽어야 했고, 그럴 수 있었음에도 도저히 책장이 빠르게 넘겨지지 않았다. 몇 장을 읽자 술술 읽기는 애초에 글렀다싶어서 제법 무게가 나가는 책을 들고 다니며 틈틈이 읽었다. 두어 장 읽고 10분은 생각에 잠겼다가 선생의 단생에 나의 단생을 끄적거리는 과정을 완독할 때까지 반복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정보다 읽기의 시간이 길어졌다.  





 



이 책의 글들은 선생이 암 진단을 받기 전에 썼는데 많은 글들에서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노년의 문 앞에 선 철학자는 자신이 치명적인 우울증으로 죽을 거라고 예감했다. 물론 우울증 때문은 아니었지만.


703.
존재의 밑바닥에는 누가 있는가. 거기서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난다. 외톨이인 한 사람.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한 사람. 더 없이 귀한 한 사람. 임종의 침상에 누운 한 사람.


ㅡ 


쓸쓸한 은퇴자의 모습, 시들어간다는 서글픔, 외로움과 고독, 작고 따뜻한 위안, 덜 고통스러운 것에 대한 감사함, 생각의 파편들, 고요와 언어, 문자와 문장에 담겨진 것들을 알고 싶어 터져버릴 것만 같은 마음, 벗어버리고 싶은 외투처럼 무거운 사랑, 인류 안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는 사랑, 죽음에 대한 두려움. 철학자로서, 가장으로서, 직업인으로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의 남자로서 그가 고독하고 쓸쓸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소한 따뜻함을 담아 쓴 글들이다.  


선생 자신에게 한 말들이겠지만, 아직 삶을 이어가며 이 책을 읽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어쩌면 선생은 독자가 이렇게 받아들이고 쓰는 것도 마뜩치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으면 치러야만 하는 일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사랑이란 서로의 슬픔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약한 자의 강함은 연대와 연민(혹은 사랑)에 있다고, 말씀한다. 그는 자신의 메말라가는 마음이 걱정스러운, 그래서 사랑의 마음이 자신을 떠나지 않기를 간구하는 사람이었다.  


선생은 슬픔에 대해 썼다. 쓸쓸함에 대한 슬픔, 사랑의 슬픔, 약자의 슬픔, 나쁜 권력에 대한 슬픔. 선생은 슬퍼한 다음에는 분노했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더 슬펐던 것 같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그래서 알겠더라고, 그 슬픔을. 그렇기에 그의 질병 같은 슬픔의 망상에 공감한다.  


ㅡ 


선생은 박물관의 돌도끼 하나를 보고 그 돌도끼를 사용했을 어느 인간의 삶의 궤적에 울컥해진다. 그런데 나는 이 마음이 왜 이렇게 와닿던지. 여러 산성을 걸을때마다 고작 짚신에 의지해 산길을 걸었을 이들과 이곳에서 무언가를 지키겠다고 죽어나간 수많은 생명들이 떠올라 마음이 내려앉고, 살아온 이들의 흔적을 쫓을 때면 말없이 눈물부터 차오르는 그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세상은 말로 넘쳐난다. 나는 말(speech)을 못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디에 가든 듣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서로를 향한 위안이 어려워지는 것 같다. 선생 역시 이와 같은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때로 자신의 말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발견하면 혼란에 빠진다는 그는 실상은 자신이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간파해주기를, 그래서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써 해방될 수 있음을 바랐다.   



선생은 2012년에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의 정치신학>을 읽으면서 그 책을 집필했을 당시 암 투병 중이었던 타우베스의 글이 유언장이나 생에 대한 마지막 도전이라고 썼다. 그 자신이 불과 5년 후에 유고집 <아침의 피아노>에 실릴 애도일기를 쓰게 될 줄, 선생 역시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10년은 공부하고 10년은 강의를 했으니 남은 10년은 글을 써야한다는 선생은 그러지 못하고 떠났다. 2014년 무렵부터의 글을 읽으면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이 전해지는데, 만약 이때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면 그는 아직 살아있을까? 너무 이른 나이에 떠나신 선생이 괜히 미욱하게 느껴져 원망이 슬며시 올라온다. 


몰락하는 자기의 육체를 수궁하는 일은 곤혹스럽다고 말하는 철학자. "자연의 시간에는 마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시간은 마디를 필요로 한다. 이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련은 깊어서 아프지만 지난 것을 떠나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청명하고 순결한 새 시간이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은 끊어지면서 또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p438)" 마치 그가 남긴 유언처럼 읽힌다.  



종종 지인이 김진영 선생의 책이 너무 좋다고 말하면 얘기한다. 좋아하는 것은 너님의 자유나 그분의 우울에 함부로 중독되지는 말라고. 


윤슬같은 문장들이 잔잔히 일렁인다. 
내 마음도 같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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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1
페터 한트케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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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그래, 인간은 얼마나 쉽게 외로워지는가 






 
1인칭시점 소설로서 화자는 주인공 약사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제3의 인물이다.  


시내에 변변한 호텔 하나 없어 하룻밤 묵는 건 고사하고, 지나 길에 잠시 들르는 사람도 없는, 그래서 아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지역, 탁스함.  


그곳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주인공 약사는 약제 연구뿐 아니라 버섯 전문가이자 중세 서사시를 애독하는 사람이다. 그는 번듯한 직업과 아픈 마을 사람들을 돌봄에도 불구하고 지역 내에서 존재감이 전혀 없는 아웃사이더다. 심지어 자신의 존재가 가족들에게 방해물이라고까지 여긴다.  


그는 본연의 직업보다는 자신이 거주하는 마을 탁스함의 이곳저곳을 순례한다. 그 과정에서 벌목꾼, 신부, 가출한 아들을 둔 부부 등의 이야기들을 흘러가듯 듣게 된다. 그렇다고해서 약사가 그들에게 조언이나 어떤 위로를 건네는 것은 아니다. 간혹 자신의 주장을 격하게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저 흘려듣는 것으로 그친다. 깊은 밤, 돌아온 집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누구도 손대지 않은 듯한 주름하나 없는 매끈한 침대와 베개. 이것 역시 그가 유령같은 존재임을 보여준다.  


부유하듯 떠도는 남자의 일상에 변곡점을 찍은 사건은 숲에서 불시에 당한 폭행과 그로인한 실어증이다. 


ㅡ 


그는 폭행 사건 이후 '승리자'라고 불리는 여인을 쫓아 길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한때 명성을 날리며 유명했던 시인과 스키 선수, 두 명과 동행한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산타페'라는 도시다.  


산타페를 중심으로 스텝 지역까지 샅샅이 훑고 다닌 약사. 그러다보니 길이 훤해져 길을 잃는 일도 없고, 잃는다해도 태연하게 넘기게 된다. 어느새 그 지역 사람들보다 더 길을 잘 알게 된 약사는 그녀를 찾아다니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다. 문득 '삶이라는 게 그런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어느 길로 가야할지 막막하다가도 가다보면 길이 되고, 길을 잃은 것 같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에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기도 한다. 저자는 왜 약사가 그토록 그 여인을 찾아헤매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 역시 읽는 동안 어느새 약사가 그녀를 찾게 되는지의 여부나 이유보다 그의 여정에 이입되어 마음이 머문다. 


실어 상태를 오히려 자유라고 표현하는 약사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때로는 하고 싶은 말도 삼켜야하는 것. 자유와는 다른 맥락일 수 있겠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체념이 아닌 편안함. 길 위의 여정, 실어증, 상념이 그를 일상에서 한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날 길 위에서 하룻밤 기거할 곳을 찾는 약사에게 한 은둔자가 잠자리와 먹거리를 내어주는데, 그 은둔자는 화자의 실종된 친구인 안드레아스 로저다. 구면인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이 부분 역시 격하게 공감이 되었다. 서로의 경계를 지켜주는 예의. 안드레아스 로저에 대한 서사가 구체적으로 서술되지는 않지만 읽는 이들은 그의 여정 역시 다방면으로 약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동굴 반대편에서 마주한 아들과 아버지. 아들은 아버지가 그를 쫓아낸 것이 아니라 그가 아버지를 떠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짧은 해후는 약사가 짊어진 짐 가운데 하나를 덜어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점토벽 위로 드리운 그림자('승리자' 여인)는 약사에게 그가 자유라고 믿는 실어상태를 떨쳐버리라고, 불안정한 자유는 자유가 아님을, 그의 침묵은 결코 침묵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현실로, 당신의 세계로 돌아가 새롭게 말하고,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내라고 얘기한다. 약사는 되돌아가는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하지만, 그는 떠도는 와중에도 도시의 약국들을 일일이 살폈었다. 이것은 자신이 돌아갈 곳을 무의식 중에라도 잊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건 아닌지. 


소설 속 약사는 여정을 마친 뒤에 대단한 자아를 찾은 것도, 부부와의 관계가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집을 떠나지 못하는 아내를,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대다수의 많은 부부 혹은 동반자들이 마찬가지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면서 마침내 자신의 집이 편안한 공간이 된다.  



탁스함도, 잘츠부르크도 벗어난, '유일무이'한 산타페(그리고 스텝 지역)라는 공간과 약사의 여정은 삶이 갖는 다채로움과 풍요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승리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실패자에게 정해진 운명이라는 말, 즉 자신의 삶을 살아낸 사람들은 모두 승리자이리라. 


소설에서는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날'을 언급하는데, 아마도 외적으로는 숲에서 구타를 당했던 그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약사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의 삶 자체가 이야기다.  


'눈부신 햇빛 속에서 이런 밤의 어둠이 지속될 수 있다면!' (p47)
이토록 아름다운 역설이라니. 


모두들, 각자의 '산타페'를 만들어 가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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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이후의 어른 -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우리들의 대화
모야 사너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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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하는 일을 피해 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권 중 하나는 늙어갈 권리라는 축복이다. 육체의 쇠퇴라는 영예가 기다리고 있고, 당신은 그 현실에 익숙해져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4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어 십대 청소년기를 시작으로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 등 각각의 생애시기에 위치한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경험과 생각들을 저자가 공유하며 쓴 책이다. 








 
이 책은 '어른 됨'에 대한 오랜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고, 글쓴이도 30대 중반으로서 '어른 되기'에 혼란스러워하는 중년 여성이다. 저자는 이 책이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이 아니며, 독자가 그녀의 탐구에 동참자가 되기를 제안한다. 탐구는 귀 기울여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독자 역시 저자와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읽고), 그들의 경험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게 될 질문을 발견한다. 그래서 저자에게도, 그가 만난 인터뷰이들에게도 훨씬 더 가깝게 공감하며 이입해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사람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감정의 무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어른이 되는 과정에 있어서 겪는 상실감, 외로움, 두려움은 성장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인생 자체가 완전하기 어렵지 않은가. 어느 시대, 어느 연령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인생이란 일정 부분 늘 불안정하기 마련이다.  


타인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는 일은 경쟁 사회에서 비일비재한데,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현상을 더욱 악화시키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인별에는 불행한 사람이 없다는 말처럼). 인생을 자신의 속도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타인의 삶의 방식과 속도를 나 자신과 분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 동감한다. 


특히 중년기를 다룬 챕터에서 앨릭스가 '자신을 잃어버린 것들로 정의하지 않고, 가진 것들로 정의하기 시작했다'는 부분이 있다. 이것을 바꿔보면 내가 가지지 않은 것이 아닌 내가 가진 것들로 나를 정의할 수 있을 때 어른이 어른으로서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흔 살인 포그가 정말이지 자신은 어른이라고는 생각 안 한다는 말에 나는 새삼 어른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해본다. 저자는 포그에게 죽어가는 일에 대해 어떻게 느끼냐고 묻는다. 이 질문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준비'를 답으로 대신하는 포그는 이 과정이 나름대로 위안이 되는 일이라고 하면서 더 이상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나도 포그의 나이가 되면 그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까? 가장 와닿았던 말은 '더 이상은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ㅡ 


나는 때로는 내가 어른스럽다고 느끼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부지기수다. 우리가 이상화한 완벽한 인간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어른도 없다. 이 책의 뒷표지에 '목적지가 아닌 하나의 과정으로, 계속해서 어른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라고 쓰여있듯, 스스로 어른 됨에 대한 노력과 성찰이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하루하루 더 나은 인간으로, 어른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한 생애가 아닐까싶고. 


그래서 내면의 성장 능력으로 어른에 대해 정의하고, 어른은 완성형이 아닌 과정이라는 인터뷰이의 말이 인상적이었고, 무척 공감되더라는. 어른이 되는 일은 어느 시기에 달성되는 것이 아닌 우리 삶의 마지막까지 멈추지 않다고 진행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중년의 한가운데 있는 나는 사실상 성장에 관련한 책을 피치못할, 혹은 필요에 의한 일이 아니라면 거의 읽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한 줄 한 줄 꼭꼭 씹어 읽었다. 여기에 등장한 인터뷰이의 경험이 대부분 나와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느꼈던 혼란과 고민들 중 일부분에서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느 새로운 인생 따위는 없다. 우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스스로 깨닫든 말든 바로 지금 자신의 삶 한복판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고. 


서로에게 소년, 소녀같다는 말이 덕담이 되고,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는 세상이라면 더 이상 어른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꽤 오래 전부터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좋은 어른으로 살고, 좋은 어른으로 죽고 싶다는 소망. 완벽한 '어른'이란 없다. 그저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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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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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읽는 비비언 고닉의 책이다. 
일전에도 읽으면서 느낀점이지만 나이, 문화, 성장 배경, 살고 있는 도시와 환경이 다른데 어쩜 이렇게 찰떡 공감을 자아내는지 신기할 정도다. 








도입부에서 레너드와의 우정에 대한 짧은 이야기로 이 책을 시작하는데 이미 훅 이입이 되더라는. 나는 저자가 레너드를 대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알겠더라고. 어떤 대상을 절친이라고 여기지만(물론 상대와는 별개로 나만의 생각이다), 시도때도 없이 과하게 자주 만나는 것은 주춤하게 되는 그 마음. 너무 잘 알지.  


우정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고하면서 하나는 서로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관계고, 다른 하나는 활기가 있어야만 같이 있을 수 있는 관계라고 말한다. 친구들과 주변의 지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봤는데, 일리 있는 말이다. 사람마다 관계를 맺는 데에 미묘하게 조금씩 다르다는 생각이 예전부터 들어더랬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 차이를 잘 이해하면 좋은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일테고.  



한 에피소드가 끝나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 혼잣말로 중얼거리거나 책 한 켠에 연필로 살짝 메모해 놓은 문구들. 
누군가를 도와주려면 제대로 도와야지, 햄버거에 탄산을 빼먹는 건 반칙이지, 암.
삶에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나아가는 것 뿐, 내 뒤에 누군가가 있을텐데 뒤로 갈 수는 없지 않나. 잠시 쉬어가는 건? 당연히 괜찮지.
조언을 해주는 것 이상으로 조언을 듣는 것 역시 그 사람의 인격에 달려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세상 일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겸손해야 하는 거고.
인생은 어차피 고독한 거야, 너나할 것 없이.
자유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이디스 워튼, 아무도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는 헨리 제임스. 누구의 말에 더 동감하지? 


ㅡ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평생 내적으로 분열된 상태에 있다. 성장하길 원하는 동시에 성장하지 않길 원하고,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폭력으로 실현되는 정의구현에는 박수를 보낸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고통 그 자체는 아픔의 원친인 동시에 안도감의 원천이다. 정의와 원칙을 수호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그것이 나에게 작은 불편함이라도 끼치게 된다면 얘기는 얼마든지 달라진다. 이렇듯 우리는 심리적으로 단 한 순간도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최소한의 것만 남기도 다 덜어낸 공간에 투영된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내면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일테다. 



에피소드 중에서 가슴이 답답했던 것 하나. 버스 요금을 냈다는 노인과 그가 요금을 내지 않았다는 버스 기사가 맞서고 있다. 기사는 결국 그 노인이 요금을 내지 않아서 운행을 중단하고 승객들을 모두 하차시킨다. 난감해 하는 사람, 욕을 하는 사람, 순순히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 결국 노인이 버스 타기를 그만두고서야 다시 운행을 하는데, 그 소동이 한 시간 정도 소요됐다. 여기서 기가막힌 노릇은 아무도 노인의 버스 요금을 대신 내주는 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게 정서의 차이일까? 아무튼 나는 그냥, 한숨이 나왔다.


ㅡ 


도시는 늘 번잡하고, 자주 황량하다. 과도한 경쟁과 삭막해져가는 인심과 빠듯한 살림살이에 푸념을 늘어놓지만, 늦은밤 창가마다 켜지는 불빛이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의 주변인들 중에는 전원주택을 지어 외곽에 사는 것이 바람이라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나는 도시를 떠나서 살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한 번도 도시 밖에서 일상을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러니저러니해도 도시에서 살 수 밖에 없다. 


비비언 고닉의 글은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읽혀진다. 부모 세대와의 이해, 우정과 애정의 경계, 연애와 결혼, 대중 안에서의 외로움, 부모가 된다는 것, 노동자 계급 이민자들의 삶, 비혼 여성에게 향하는 편향된 시선, 노년의 쓸쓸함, 중산층에 진입하지 못한 도시 생활자의 소외감 등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책을 펼친 독자들과 닿아있다.   


늦은밤, 차 한 잔 놓고 읽는 그 기분이 참 좋더라. 




26.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지 못한 사람은 어떤 타인에게도 우정을 기대할 권리가 없다.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으뜸가는 의무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 적대적일 뿐 아니라 자기를 섬기는 타인의 가장 선한 마음조차 꺼꺼어버리고 '세상에 친구 따윈 없다'며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불평까지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카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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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테리 이글턴 지음, 정영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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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진정한 절망은 우리가 더는 말을 할 수 없을 때 일어난다.  



저자는 본인의 관점뿐 아니라 철학, 문학, 예술, 사회학 등 다각적으로 불러들여 고대부터 현대까지 각 시대의 사상가와 철학자, 그리고 문필가들의 관점을 통해 비극을 탐조한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비극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예술적 의미의 비극은 매우 구체적인 사건이고, 비극이라는 형식은 특정 문명이 역사적 순간 동안 갈등과 씨름하는 형식으로서 나타난다. 비극은 실제로 정치적 제도로서 시작됐고, 예술 차원에서 미적 감상이며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또한 공민도덕을 심는 데 도움을 주는 윤리 정치적 교육의 한 형태이기도 했다. 그리고 비극은 폭넓은 정치적 역할을 해왔다. 


저자는 비극적인 정신이 근대적인 것의 탄생과 더불어 소멸한다고 말한다. 세속적인 가치, 계몽된 정치, 인간사의 합리적 운용, 우주의 궁극적 불가해성을 믿는 시대에는 비극이 살아남을 수 없으며, 비극은 공리주의적 윤리나 평등주의적 정치를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 같은 일부 근대 비평가들은 비극이 합리적 설계를 드러낸다고 주장하지만, 비극적 예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에는 고통 자체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나 롤랑 바르트의 말들을 생각해보면 고통과 슬픔을 토해내는 비극이야말로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책에서 언급된 이들과는 달리 오히려 근대성이 비극을 망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새로 연장 및 촉진해 주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그 이유로는 인간 이성의 한계, 인간 주체의 연약함과 자기 불투명성, 익명의 타자들 속에서 개인의 무작위 노출, 힘과 자율성에 가해지는 제약, 사회질서의 복잡한 밀도와 세계화(여기에는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인터넷 등 사회 집단과 개인적 차원도 포함될 듯 하다) 등을 드는데, 이는 고대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자기 자신으로 인해 정복당할 위험이 커졌기 때문이라는 건데 기후변화나 자연 재해 등 거시적인 관점에서도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이야말로 위기라는 발터 베냐민의 말을 들면서 조지 엘리엇이 <미들마치>에서 쓴 '반발이라는 사실 자체에 들어 있는 그 비극의 요소'를 짚는데, 이것은 우리가 해당 상황에 요구되는 감수성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조용한 절망 상태임을 얘기한다. 문득 비극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비극보다 더 암울하고 절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ㅡ 


저자는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대표적인 비극적 소재로 꼽는 근친상간이라는 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개인은 주체와 객체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필연적으로  완전히 자기동일성을 이룰 수 없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늘 연기가 따르며, 이는 사람의 정체성의 한 속성이 된다고 얘기한다. 


'자신을 아는 것은 자기 동일적이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둘로 쪼개 대상으로 바꾸고 그렇게 바로 그 행동 자체로 암묵적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p68)' 즉, 자기 결정적이라는 것은 자기 동일성에 반하는 것이자 동시에 상호적이라는, 그래서 인간의 관계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동인과 동인 사이의 경계가 명확할 수 없으며, 개인의 작은 행위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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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의존이라는 이중 결정에서 상당한 비극적 갈등이 생긴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에 대해 캐물어봤자 돌아오는 건 본질 따위는 없으며 일관성이나 확신 없이 오락가락하는 존재일 뿐이란다. 그러나 비극을 부르는 극적 행위는 새로운 종류의 자기 이해로 가는 길을 여는, 이성을 넘어서는 이성의 한 형식이라고 저자는 얘기한다. 이렇게 읽다보면 비극은 다차원적으로 인간 세계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필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야망은 인간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다. 문제는 야망이 지나치게 '과잉'된다는 데에 있는데, 이는 스스로를 속박하고 자기표현에 장애가 되어 자멸하는 원인이 된다. 모든 순응에 대한 거부와 복수도 같은 맥락이고. 과잉에 제동을 걸 수 없는 것이 비극이라고 볼 수 있을까? 


18세기 전환기 무렵부터 비극에는 '비극의 철학'이라는 새로운 담론이 수반된다. 예술 자체로부터 정치적.종교적.철학적 비전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흐름은 자유를 매개로 한 법, 자연, 필연 사이의 갈등을 숙고함고 동시에 비극적 예술의 핵심으로 간주한다. 위대한 비극은 혁명적 행동이자 급진적인 힘에 갈음하는데, 사회적 질서의 핵심이면서도 표현 불가능한 것을 행동으로 표현한다. 


저자는 비극에 있어 원죄는 특정한 개인에게 부여되는 것이 아닌 보편적이고, 상호 피해의 가능성은 인간의 상호의존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로스메르의 말을 빌어 죄에 뿌리를 둔 대의에서 승리는 얻을 수 없지만 인간 삶이 서로 엮인 상황에서 그렇지 않은 대의가 어디 있겠냐고 묻는다. 자유가 굴레가 되고, 자기완성이 자기 혐오가 되고, 진실이 거짓에 기초하는 변증법. 이러한 모순은 우리 사회에 늘 존재하고 끊임없이 딜레마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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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것이라는 관념은 철학으로부터 예술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등장한다. 철학이 예술과 연극으로 확장된 데에는 합리주의적 철학에 의해 비극이 죽어가고, 이에 자유와 필연 사이의 갈등이 합리적으로 정리될 수 없다해도 존재론적으로는 해소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뭔 말인가 싶겠지만, 앞뒤의 내용을 읽어보면 충분히 동감하는 내용이다. 아주 단순하게 얘기해 보자면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생명이 죽어야 하고,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한켠에서는 자기 버리기와 충성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예술 작품에서 비극을 내재한 자유와 필연은 동일한 것으로, 혹은 때때로 대립적으로 구현된다. 


헤겔이 비극의 진리가 화해에 있다고 한 반면에 괴테는 화해라는 관념은 비극적 감수성에 이질적이라고 보면서 모든 비극적인 것은 처리할 수 없는 대립에 있으며 해결이 가능해지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고 말했는데, 개인적으로 괴테의 주장에 더 공감하게 된다. 헤겔식 결말은 안도감은 있지만 어딘가 감정이 절정에 도달하지 못한 채 꺼져버리는 느낌이 크다. 내 감성이 너무 '비극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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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1장에서는 홀로코스트나 굴라크를 비극이라고 칭하지 않고, 비극적 묘사가 될 수 없다고 썼다. 아마 극단의 강제 노동과 집단 대학살에서 우리는 어떠한 카타르시스도, 어떠한 깨우침도, 어떠한 익살도 얻을 수 없으며, 가치나 이해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비극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없을만큼 참혹하고 무참하다. 저자가 조지프 콘래드를 들면서 삶의 거짓이 파괴적인 동시에 본질적이기에 비극적이라는 말이 납득이 된다. 


내가 그동안 비극 혹은 비극적이라고 여겼던 것들에 대한 생각들의 일부분은 전환되었다. 인간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고양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는 사실, 의기소침하고 불행한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무엇이든 비극이 될 수 없다는 말을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어쩐지 비극은 점점 사라지고 있고, 슬픔을 슬픔으로, 고통을 고통으로 드러내지 못해 숨어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되어가고 있기에, 그렇기 때문에 비극이 사라진 인간의 삶은 오히려 더 황폐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굳이 따지자면 대부분의 인생이 희극보다는 비극에 더 가깝지 않을까. 살아가기 위해 비극적 체험을 외면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 그래서 어쩌면 비극을 다룬 예술이나 문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면하고 치유받는 것일지도... . 




236.
비극은 역사 자체보다 강력한 현상으로 거대하게 떠오른다. 비극적 비전만이 궁극적 진리의 현현으로서 인간 실존에 의미를 주입한다. 비극적 위기의 순간에만 우리에게 모든 경험적 또는 심리적 우연을 쳐낸 순수한 자아 경험이라는 특권이 주어진다. 비극 예술은 다른 아닌 '존재' 자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인간의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현실이 되는 것"으로, 인간 노력의 정점이며 신비한 황홀경의 계기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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