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날들의 기록 - 철학자 김진영의 마음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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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나는 늘 조금 울적하고 슬프다. 하지만 그 슬픔 안에 모종의 기쁨이 또한 들어 있음을 난 안다. 아마도 그 슬픔과 기쁨이 나에게는 사랑이고 조용한 날들이리라.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선생이 쓴 짤막한 글 모음집이다. 장문도 있지만 대부분 메모에 가까운 단상들이다. 700쪽인데다 리뷰 기한이 약속된 책이라서 빠르게 읽어야 했고, 그럴 수 있었음에도 도저히 책장이 빠르게 넘겨지지 않았다. 몇 장을 읽자 술술 읽기는 애초에 글렀다싶어서 제법 무게가 나가는 책을 들고 다니며 틈틈이 읽었다. 두어 장 읽고 10분은 생각에 잠겼다가 선생의 단생에 나의 단생을 끄적거리는 과정을 완독할 때까지 반복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정보다 읽기의 시간이 길어졌다.  





 



이 책의 글들은 선생이 암 진단을 받기 전에 썼는데 많은 글들에서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노년의 문 앞에 선 철학자는 자신이 치명적인 우울증으로 죽을 거라고 예감했다. 물론 우울증 때문은 아니었지만.


703.
존재의 밑바닥에는 누가 있는가. 거기서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난다. 외톨이인 한 사람.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한 사람. 더 없이 귀한 한 사람. 임종의 침상에 누운 한 사람.


ㅡ 


쓸쓸한 은퇴자의 모습, 시들어간다는 서글픔, 외로움과 고독, 작고 따뜻한 위안, 덜 고통스러운 것에 대한 감사함, 생각의 파편들, 고요와 언어, 문자와 문장에 담겨진 것들을 알고 싶어 터져버릴 것만 같은 마음, 벗어버리고 싶은 외투처럼 무거운 사랑, 인류 안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는 사랑, 죽음에 대한 두려움. 철학자로서, 가장으로서, 직업인으로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의 남자로서 그가 고독하고 쓸쓸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소한 따뜻함을 담아 쓴 글들이다.  


선생 자신에게 한 말들이겠지만, 아직 삶을 이어가며 이 책을 읽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어쩌면 선생은 독자가 이렇게 받아들이고 쓰는 것도 마뜩치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으면 치러야만 하는 일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사랑이란 서로의 슬픔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약한 자의 강함은 연대와 연민(혹은 사랑)에 있다고, 말씀한다. 그는 자신의 메말라가는 마음이 걱정스러운, 그래서 사랑의 마음이 자신을 떠나지 않기를 간구하는 사람이었다.  


선생은 슬픔에 대해 썼다. 쓸쓸함에 대한 슬픔, 사랑의 슬픔, 약자의 슬픔, 나쁜 권력에 대한 슬픔. 선생은 슬퍼한 다음에는 분노했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더 슬펐던 것 같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그래서 알겠더라고, 그 슬픔을. 그렇기에 그의 질병 같은 슬픔의 망상에 공감한다.  


ㅡ 


선생은 박물관의 돌도끼 하나를 보고 그 돌도끼를 사용했을 어느 인간의 삶의 궤적에 울컥해진다. 그런데 나는 이 마음이 왜 이렇게 와닿던지. 여러 산성을 걸을때마다 고작 짚신에 의지해 산길을 걸었을 이들과 이곳에서 무언가를 지키겠다고 죽어나간 수많은 생명들이 떠올라 마음이 내려앉고, 살아온 이들의 흔적을 쫓을 때면 말없이 눈물부터 차오르는 그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세상은 말로 넘쳐난다. 나는 말(speech)을 못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디에 가든 듣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서로를 향한 위안이 어려워지는 것 같다. 선생 역시 이와 같은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때로 자신의 말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발견하면 혼란에 빠진다는 그는 실상은 자신이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간파해주기를, 그래서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써 해방될 수 있음을 바랐다.   



선생은 2012년에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의 정치신학>을 읽으면서 그 책을 집필했을 당시 암 투병 중이었던 타우베스의 글이 유언장이나 생에 대한 마지막 도전이라고 썼다. 그 자신이 불과 5년 후에 유고집 <아침의 피아노>에 실릴 애도일기를 쓰게 될 줄, 선생 역시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10년은 공부하고 10년은 강의를 했으니 남은 10년은 글을 써야한다는 선생은 그러지 못하고 떠났다. 2014년 무렵부터의 글을 읽으면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이 전해지는데, 만약 이때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면 그는 아직 살아있을까? 너무 이른 나이에 떠나신 선생이 괜히 미욱하게 느껴져 원망이 슬며시 올라온다. 


몰락하는 자기의 육체를 수궁하는 일은 곤혹스럽다고 말하는 철학자. "자연의 시간에는 마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시간은 마디를 필요로 한다. 이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련은 깊어서 아프지만 지난 것을 떠나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청명하고 순결한 새 시간이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은 끊어지면서 또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p438)" 마치 그가 남긴 유언처럼 읽힌다.  



종종 지인이 김진영 선생의 책이 너무 좋다고 말하면 얘기한다. 좋아하는 것은 너님의 자유나 그분의 우울에 함부로 중독되지는 말라고. 


윤슬같은 문장들이 잔잔히 일렁인다. 
내 마음도 같이 일렁인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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