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1
페터 한트케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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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그래, 인간은 얼마나 쉽게 외로워지는가 






 
1인칭시점 소설로서 화자는 주인공 약사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제3의 인물이다.  


시내에 변변한 호텔 하나 없어 하룻밤 묵는 건 고사하고, 지나 길에 잠시 들르는 사람도 없는, 그래서 아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지역, 탁스함.  


그곳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주인공 약사는 약제 연구뿐 아니라 버섯 전문가이자 중세 서사시를 애독하는 사람이다. 그는 번듯한 직업과 아픈 마을 사람들을 돌봄에도 불구하고 지역 내에서 존재감이 전혀 없는 아웃사이더다. 심지어 자신의 존재가 가족들에게 방해물이라고까지 여긴다.  


그는 본연의 직업보다는 자신이 거주하는 마을 탁스함의 이곳저곳을 순례한다. 그 과정에서 벌목꾼, 신부, 가출한 아들을 둔 부부 등의 이야기들을 흘러가듯 듣게 된다. 그렇다고해서 약사가 그들에게 조언이나 어떤 위로를 건네는 것은 아니다. 간혹 자신의 주장을 격하게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저 흘려듣는 것으로 그친다. 깊은 밤, 돌아온 집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누구도 손대지 않은 듯한 주름하나 없는 매끈한 침대와 베개. 이것 역시 그가 유령같은 존재임을 보여준다.  


부유하듯 떠도는 남자의 일상에 변곡점을 찍은 사건은 숲에서 불시에 당한 폭행과 그로인한 실어증이다. 


ㅡ 


그는 폭행 사건 이후 '승리자'라고 불리는 여인을 쫓아 길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한때 명성을 날리며 유명했던 시인과 스키 선수, 두 명과 동행한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산타페'라는 도시다.  


산타페를 중심으로 스텝 지역까지 샅샅이 훑고 다닌 약사. 그러다보니 길이 훤해져 길을 잃는 일도 없고, 잃는다해도 태연하게 넘기게 된다. 어느새 그 지역 사람들보다 더 길을 잘 알게 된 약사는 그녀를 찾아다니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다. 문득 '삶이라는 게 그런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어느 길로 가야할지 막막하다가도 가다보면 길이 되고, 길을 잃은 것 같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에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기도 한다. 저자는 왜 약사가 그토록 그 여인을 찾아헤매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 역시 읽는 동안 어느새 약사가 그녀를 찾게 되는지의 여부나 이유보다 그의 여정에 이입되어 마음이 머문다. 


실어 상태를 오히려 자유라고 표현하는 약사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때로는 하고 싶은 말도 삼켜야하는 것. 자유와는 다른 맥락일 수 있겠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체념이 아닌 편안함. 길 위의 여정, 실어증, 상념이 그를 일상에서 한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날 길 위에서 하룻밤 기거할 곳을 찾는 약사에게 한 은둔자가 잠자리와 먹거리를 내어주는데, 그 은둔자는 화자의 실종된 친구인 안드레아스 로저다. 구면인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이 부분 역시 격하게 공감이 되었다. 서로의 경계를 지켜주는 예의. 안드레아스 로저에 대한 서사가 구체적으로 서술되지는 않지만 읽는 이들은 그의 여정 역시 다방면으로 약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동굴 반대편에서 마주한 아들과 아버지. 아들은 아버지가 그를 쫓아낸 것이 아니라 그가 아버지를 떠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짧은 해후는 약사가 짊어진 짐 가운데 하나를 덜어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점토벽 위로 드리운 그림자('승리자' 여인)는 약사에게 그가 자유라고 믿는 실어상태를 떨쳐버리라고, 불안정한 자유는 자유가 아님을, 그의 침묵은 결코 침묵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현실로, 당신의 세계로 돌아가 새롭게 말하고,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내라고 얘기한다. 약사는 되돌아가는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하지만, 그는 떠도는 와중에도 도시의 약국들을 일일이 살폈었다. 이것은 자신이 돌아갈 곳을 무의식 중에라도 잊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건 아닌지. 


소설 속 약사는 여정을 마친 뒤에 대단한 자아를 찾은 것도, 부부와의 관계가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집을 떠나지 못하는 아내를,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대다수의 많은 부부 혹은 동반자들이 마찬가지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면서 마침내 자신의 집이 편안한 공간이 된다.  



탁스함도, 잘츠부르크도 벗어난, '유일무이'한 산타페(그리고 스텝 지역)라는 공간과 약사의 여정은 삶이 갖는 다채로움과 풍요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승리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실패자에게 정해진 운명이라는 말, 즉 자신의 삶을 살아낸 사람들은 모두 승리자이리라. 


소설에서는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날'을 언급하는데, 아마도 외적으로는 숲에서 구타를 당했던 그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약사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의 삶 자체가 이야기다.  


'눈부신 햇빛 속에서 이런 밤의 어둠이 지속될 수 있다면!' (p47)
이토록 아름다운 역설이라니. 


모두들, 각자의 '산타페'를 만들어 가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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