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문은강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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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도 전투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박지우. 그래서 취업 전선에 목숨 걸 듯 달려들지 않았는데,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루저 취급이다. 욱하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결제해버린 '캄보디아에서 한 달 살기ㅡ원더랜드 호텔'. 앙코르와트나 가보자 하는 마음에 도착한 호텔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이는 한국어 잘 하는 친절한 현지인 직원 린과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불친절한 사장 고복희였다. 
 
소설은 캄보디아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고복희의 현재를 시작으로, 대한민국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그녀와 주변 인물, 그리고 박지우를 통해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읽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오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문장이나 극 중 상황에 큭큭대며 웃다가도 담겨져 있는 내용에, 마음에 추가 하나씩 달린다.  
 
사람들은 모든 청년이 대기업을 선호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의 가치는 상관없이 목표를 경제적 성공에 두지 않으면 열정박약, 의지박약 취급이다. 본인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말하면 실력이 없어 포기하는 거라고 지레짐작이다. 그런데 이 시대 젊은이들은 학교라는 곳에 입학하는 그 순간부터(어쩌면 입학 전부터) 이미 충분히, 너무 심하게 열심히 살고 있다.  
 
93.
"모두가 빡세게 살아서 제가 빡세게 사는 건 티도 안나요. (...) 뭔가 이루고 싶으면 죽도록 하라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때 죽도록 하는 사람들은 진짜 죽어요. 살기 위해 죽도록 하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예요."
 

 
 
우리가 정작 걱정해야할 것은 목표는 있지만 목적 없는 삶이 아닐까? 성적 1등급, 입시, 취업이라는 목표는 있다. 그 다음은? 취업만 하면 인생은 마침표인가? 그리고 좋은 대학은 왜 가려고 하는가? 취업을 위해서? 그럼 돈을 많이 벌기만 하면 인생은 성공인가? 목적 없이 목표만 세우고 주변을 둘러볼 틈도 없이 달리기만 한다. 그리고는 지쳐버린다.  정신없이 달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잠깐만'이라고 팔을 잡아줄 이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15쪽을 읽고 있다가 불현듯 몇 년 전에 방영했던 드라마 <직장의 신>이 떠올랐다. 고복희는 김혜수 배우가 연기했던 '미스 김'처럼 정확한 루틴이 있는 인물이다. 아침 다섯 시 기상, 단정한 단발머리, 호텔 청소 순서, 무엇보다 스스로 만든 오 분 스트레칭.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는 원칙을 고수하고 주변의 말이나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다. 어물거리는 법이 없다. 의사표현은 확실하게, 정도에 어긋나지 않으며 개인 사정 따위는 원칙 앞에서 요지부동이다. 이쯤되면 '뭐 이런 인정머리 없는 냉혈인간이 있어?'하겠지만, 오히려 지켜야할 것을 지키고, 해서는 안될 짓을 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는 고복희는 매력 폭발이다. 
 
오히려 연대를 외치고 교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김인석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폭력을 불사한다. 교민 사회의 발전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서. 원더랜드를 뺏기 위해 고복희 폭행을 사주하고, 그것을 거부한 직원 안대용을 향해 사정없이 주먹을 휘두른다. 
 
136.
살려고? 살려고 했으면 그래서는 안 되지. 더 독해야지. 그렇게 나약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런 놈들은 사회에 어떤 이바지도 못한다. 

 
어쩌면 아이들은, 청년들은, 성공담이 정답인 양 조언하거나 할 수 있다는 막연한 격려와 응원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버티며 공정한 원칙을 지키는 어른들에게 더 힘을 얻지 않을까?  
 
조금 우울할 수 있는 소재를 유쾌하게 버무린 소설이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정의롭지 않은 방법을 쓰는 이들이여, 고복희를 벤치마킹하라.  
 
 
.

고복희는 이해할 수 없다.

감정을 다툰다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누군가 영역에 침범해오면 아까운 기력을 쓸 수 밖에 없다. 힘이 넘치는 사람은 주변을 성가시게 하는 대신 다른 것에 주의를 돌리는 것이 어떨까. 환경오염이나 난민을 위한 대책 같은 훨씬 생산적인 문제로. - P61

한국이나 여기나 똑같다. 그걸 깨닫고 나니 슬퍼졌다. 뭣 좀 해보려고 하면 다 실패다. 행동 하나하나 실수투성이다. 바보같이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바닥 언저리를 맴도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밑바닥까지 떨어진 것 같았다. - P86

원래 사는 게 고달픈 거라고. 이 정도 고생은 다 하면서 산다고. 먹고 사는 일의 부당함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 그건 강금자가 삶을 견디는 방식이었다. - P157

다 함께 모여 춤추는 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동그란 지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찍어 놓은 발자국으로 빼곡할 것이다. 저마다의 흔적을 남겨놓고 떠난 이들은 분명 즐거웠을 것이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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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접시 건강법 - 만성염증을 치유하는
이경미 지음 / 판미동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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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으로 치유할 수 없는 병은 의술로도 못 고친다. 음식이 약이 되게 하고, 약이 음식이 되게 하라. / 히포크라테스

평소 염증 소인이 커 구내염이나 다래끼를 번갈아가며 달고 사는 나로서는 제목만으로 확 끌리는 책이다. 영양제나 그외 건강 보조식품을 워낙 챙겨 먹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이 간도 크다, 겁도 없다는 말도 꽤 듣는 편(딱히 대단한 소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게을러서). 어차피 끼니는 먹으니 식사로 염증을 잡을 수 있다면 좋겠다싶어 읽는다.

일단 만성염증이란?
면역반응을 유발한 원인이 완전히 제거되어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이 급성염증이고, 방어 시스템이 시원치 않아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되는 상태가 만성염증이라고 한다. 즉 몸에 면역 체계를 위해 싸우는 과정인 착한 염증이 급성염증이고, 우리 몸의 정상 조직이 손상되는 나쁜 염증이 만성염증이라는 사실.

만성염증의 증상은 통증, 지속적인 피로와 불면증, 기분 변화, 위장관 증상, 체중 증가, 회복이 잘 안되는 (감기를 비롯한) 감염성 질환 등이 있다고. 뿐만 아니라 고혈압, 비만, 당뇨, 아토피, 암, 치매를 유발하기도 한단다.

만성염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는 황사와 미세먼지, 중금속, 환경 호르몬, 무심코 먹는 진통제, 소염제, 항상제도 영향을 미친다. 그외에도 스트레스, 트랜스지방, 정제 곡물과 설탕, 잔류 농약 등이 있는데, 익히 알고 있지만 쉽게 간과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1부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식단을 영양의 관점이 아니라 염증의 관점에서 살펴보라는 글과 항염증 식사 체크리스트를 어떤 식품을 먹느냐보다 어떻게 먹느냐에 대한 질문들이 중요하게 질문되어있다는 점이다(생각보다 점수가 낮게 나와서 놀랐다).

2부에서는 식품을 선택하고 세척, 조리하는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팁을 전달한다. 무엇보다 무엇을 먹을지보다는 무엇을 먹지말지가 더 중요하다고. 일단 아침 식사는 거르지 말고, 점심은 (과식이 아닌) 푸짐하게, 저녁은 가볍게. 그리고 전체적인 식사는 소식을 기본으로.

다양한 색깔의 채소, 통곡물, 홀푸드, 건강한 단백질과 지방, 깨끗한 물 섭취에 대한 내용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사람들이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세세하게 실어놨다. 그 중에서 내가 미처 몰랐거나 잘못 알고 있어서 "응?!"했던 부분들을 적어본다.

96.
지방을 적게 먹는다고 체지방이 적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영양소든 사용되지 않고 남은 것은 체지방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그보다는 남은 에너지, 잉여 칼로리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탄수화물은 그만 먹는 것이 아니라 잘 먹어야 하는데 글루텐이 적은 곡물이 염증을 낮춘다고 한다. (보리와 귀리가 글루텐 함유가 높다는 사실! 엄마는 보리 맹신자인데 조금 걱정이 된다.) 약품의 캡슐에도 글루텐이 사용된다고. 캡슐 영양제도 남용하면 안될 듯. 그리고 이번 기회에 LDL콜레스테롤과 HDL콜레스테롤의 차이를 확실히 알았고, HDL콜레스테롤이 높아서 총 콜레스테롤이 높게 나왔다면 안심해도 된단다.

오메가ㅡ3(씨앗류, 견과류, 들기름, 해조류, 등푸른 생선)는 늘리고 오메가ㅡ6(믹스커피, 밀크초콜릿, 각종 튀김, 과자류, 패스트푸드, 식물성 유지)는 줄여라. 들깨 특유의 향을 워낙 싫어하는 것, 달고 짜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데 튀김 음식을 좋아하는 나의 취약점. 오메가ㅡ6 지방이 만성염증과 밀접한 관계라서 고민이 되네.

150.
필수 아미노산을 함유하고 있는 단백질 식품을 완전식품이라고 하는데 달걀과 콩, 우유가 대표적인 예죠. 이것은 영양학적으로 완벽한 식품이라는 것이 아니라, 단백질을 이루는 8개의 필수 아미노산을 모두 함유한다는 의미에서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커피는 2잔 이하면 약, 4잔 이상은 독. 알기 쉽게 얘기하자면 커피 전문점 Tall 사이즈 2잔까지는 안전하다는 것. 나는 하루에 드립 500ml 정도 마시니 나쁘지 않은 듯.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고온 조리시 증가하는 에이지 독소, 특히 팬에 구운 스테이크와 닭튀김 함량이 가장 높다. 결국 고기는 구워 먹지 말라는 건데, 오늘 저녁 고기 파티하겠다는 이들은 어쩌나... . 그리고 설탕보다 더 해로운 것이 고과당 옥수수 시럽이고, 꿀도 소량을 사용해야 한단다. 그외에도 다양한 파이토케미컬 과일과 채소, 농약 함유량이 많은 농식품, 만성염증을 유발, 줄이는 식품 목록 등을 올려 수시로 참고하기에 좋다.

2부에서 얻은 결론은 부대찌게, 닭튀김, 피자, 파스타 류는 최악의 음식이요, 발효식품(우리나라 전통 식품 포함)과 색깔이 화려한 채소가 으뜸이라는 거.

3부에는 식사법에 대해 다룬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건강에 제대로 도움이 되려면 소화 흡수 과정이 원활해서 영양소가 최종적으로 잘 도달할 수 있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잘 씹어야한다, 더 오래 자주. 그래야만 위가 부담이 없다.

255.
위산 억제제 등을 자주 복용하면, 위의 위산이 중화되어 약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단백질 소화 효소가 활성화되지 않아서 단백질 식품의 소화가 쉽지 않겠죠. (...) 위산 억제제를 장기간 복용하거나 위축성 위염 등을 않을 경우, 우리 몸의 기능에 중요한 칼슘 같은 미네랄들이 이온 형태가 되지 못해 흡수가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위산 억제제를 오랜 시간 복용하면 뼈가 약해지는 골다공증과 이로 인해 골절이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와 있습니다.


책에 있는 장누수증후군 자가 진단 테스트를 체크해봤는데, '누수 가능성 있음'으로 나왔다. 다른 항목은 지수가 다 0이였는데, '자주 발생하는 염증 질환', 최근에 보이는 '빈발되는 피로' 지수가 있어 이런 결과가 나왔다. 정크 푸드는 거의 안 먹지만 소염제 사용을 줄이고, 요즘들어 좀처럼 하지 못하는 운동을 빨리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3부의 핵심은 마인드리스 식사와 마인드풀 식사이다.
마인드리스 식사는 습관적으로 먹거나 다른 활동(TV시청, 스마트폰 검색 등)을 하며 먹는 것, 간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 등 이외에도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먹기'를 말한다.
그에 반해 마인드폴 식사는 감정적으로 먹지 않기, 음식을 먹는 과정에 주의를 기울이기, 음식을 충분히 맛보고 즐기기, 의식적으로 음식을 선택하기, 자신과 자신의 몸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처럼 음식과 먹는 행위가 단순히 '먹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마인드풀 식사 실천법을 보면 식사는 나를 사랑하는 한 방식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건강은 지식이 아니라 성찰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비단 식사나 건강 뿐일까. 사실 현대 사회는 손가락 한 개만 있어도 세상에 모를 일이 없을 만큼 정보와 지식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 무수한 지식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으며, 유저인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는가? 익명으로 떠도는 누군가의 말에 휘둘리고 있지는 않은가? 건강 식사법 책을 읽었는데,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의 생활과 생각의 패턴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Tip.
책의 맨 뒤에 함염증 식단표와 관련한 도서, 웹사이트, 관리 앱이 나와 있으니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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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詩作 - 테드 휴즈의 시작법
테드 휴즈 지음, 김승일 옮김 / 비아북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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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시인 테드 휴즈의 글쓰기 지침서다. 이 책은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이들을 위한 BBC의 프로그램 <듣기와 쓰기>를 위해 작가가 직접 쓰고 준비했던 내용을 모은 책이다. 
 
작가는 하루에 한 가지씩 주제를 정해 아홉 번의 지침을 내놓는다. 동물, 날씨(바람, 비, 안개), 사람, 생각하는 법, 풍경, 소설 쓰기, 가족, 달 등 우리가 일기에서 써봤음직한 내용을 다루고 있고, 구체적인 글쓰기 방법을 알려준다. 
 
내가 기억해 두려고 하는 부분은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는 일', 작고 단순한 대상에 집중하는 정신 운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른 실천은 집중한 다음, 정해진 분량과 시간 내에 대상을 묘사하는 운문 형식의 글을 써보는데, 서술은 세밀하고 과학적으로 자세하게, 가능한 한 대상을 모든 방면으로 확장하고 비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시로 D.H.로런스의 <모기>를 들어본다(전문은 길어서 조금만). 
 
언제부터 그런 기술을 구사하셨지,
무슈? 
 
그렇게 긴 다리로 뭐든 버티겠어?
그렇게 갈래갈래 찢어진 다리로,
뭐 그렇게 기고만장해? 
 
그건 네 무게 중심을 위로 들어 올려서
나한테 착륙할 때 공기처럼 가볍게
무게 없이 서기 위한 건가,  이 유령아? 

 
여기까지만 읽어도 관찰력과 묘사가 좋음을 알겠다. 재미도 있고. 
 
또 다른 부분은 처음부터 풍경을 묘사하기는 쉽지 않으니 자신이 경험한 것을 독백으로 써보라고 한다. 여행의 경험을 곱씹어봐야겠다. 
 
작가는 시 뿐만 아니라 소설 쓰기에도 지침을 내놓는다. 먼저 단순한 글쓰기. 상상력을 풀어놓고 펜으로 빠르게 따라가라(제2의 천성이 될 때까지 계속 해보라는데, 계속 한다고 천성이 되기는 하는건지). 사물, 사람, 장소에 대한 글쓰기의 모든 핵심은 그것들이 실제 거기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내고, 독자들을 위해 기록하는 것이라고. (생각보다 쉬운 일이라는데 글쎄... .)
소설을 쓰는데 올바른 방법은 없고, 오로지 재미있게 쓰는 것 뿐. 재미있는 글은 자신이 진심으로 관심있는 것에 대해서만 쓸 수 있단다. 그래서 글을 쓸 때 단지 호기심을 느끼는 것과 자신의 삶의 일부분인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학창 시절에는 소설을 쓰고 싶었고, 지금은 묵직한 에세이와 시를 쓰고 싶다. 그래서 틈이 나면 글쓰기 책을 뒤적이곤 하는데 마음을 담아서 전달하는 시는 여전히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누구한테든 보여줄 수 있는 시  한편을 완성할 그날까지. 써! 보자. 

 

 
본문에도 인용됐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 
 
 
밤의 비 그리고 낮의 비 그리고 밤의 비가
그친다, 창백하고 숨 막히는
새벽빛에.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은 본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나무들 아랫길에는 새로운 자줏빛
국경이 생겼구나
경계의 안쪽에는 밝고 옅은 잔디밭:
11월이 남긴 잎사귀가 전부
떨어져버렸네, 개암나무와 가시나무 그리고
더 커다란 나무들로부터. 이곳의 나무들은
죽은 잎사귀는 떨어뜨리지 않았다
회색 풀밭, 녹색 이끼, 번트오렌지 고사리 위에서,
바람은 다시 불어;
물푸레나무가 벗어버린 어린잎들
길 위에 드문드문 깔아놓았다
놀다가 거기 새겨지기라도 한듯한
작고 까만 물고기처럼.
무수히 많은 나뭇가지에 아직 힘겹게
헐벗은 채 매달려 있는 것은
돌능금 나무 한 그루의 사랑스러운 열두 알
노란 사과들.
그리고 각각의 잔가지들이 골짜기 속으로 다시
떨어뜨리는, 셀 수 없는 크리스털
어둡고 밝은 빗방울.

비 온 뒤 (에드워드 토마스)

 

 

 

대상을 정하고 나면 길이를 지정하고 제한 시간을 설정하는 것이 좋다(10분 남짓이 이상적인 최소치). 이렇게 인위적으로 제한선을 조성하면 긴장감이 생기고, 각자의 소질을 깨치는데 도움이 된다. 서두를 것을 강요하면 우리의 진부한 버릇들이 무너지게 되며, 모든 것을 재빨리 표현하면서 평소에는 잠재되어 있던 수많은 것이 저 스스로 쏟아져 나오게 된다. 장벽을 부수고, 죄수들을 탈옥시키자 - P34

주제를 가능한 한 명확하게 잡고, 가급적이면 구체적인 일화에서 가져오는 것이 좋다. - P69

사람에 대한 상상적 글쓰기를 할 때는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제약을 두지 않음으로써 글쓰기가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시를 읽고 쓰는 일의 즐거움이나 치유 효과에 대해 말할 때면 이 방법이 제시된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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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7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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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ㅡ 조나단 스위프트

조지 오웰이 극찬했다는 걸리버 여행기. 초등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 본 책이다. 언제부턴가 완역본을 읽어봐야겠다고 별렀건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기회가 되서 읽는다. 지금 아니면 영영 안 읽을것 같아서.

총4부로 구분했는데, 1부는 남녀노소 다 아는 릴리펏(소인국) 여행기, 2부는 브롭딩낵(거인국) 이야기, 3부는 라퓨타(날아다니는 섬) 외 여행기, 4부는 후이늠국(말의 나라) 여행기로 이루어져 있다.

1.
남태평양으로 출항하는 앤틸롭스 호의 의사로 항해하는 걸리버. 동인도 제도로 가는 길에 폭풍을 만나 태즈메이니아로 떠밀려 암초에 의해 좌초된 후 조수의 도움으로 육지에 도착. 쓰러지듯 드러누워 잠을 자고 깨어보니 머리카락부터 발까지 묶여 있고, 자신의 몸 위를 오르내리는 신장 15cm의 사람들. 걸리버는 릴리핏(소인국) 왕국에서 그곳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고자 노력한 덕분에 일정 부분 자유로운 몸이 된다. 그러던 중 적국인 블레푸스쿠 제국이 침공해오자 비상한 전략으로 적의 배를 모두 항구에 끌어오고 이 일로 가장 높은 명예직인 '나르닥'에 임명된다. 하지만 황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소변으로 불을 끈 행동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러 온 상대국의 고위 사절을 만난 것이 불충의 표시로 여겨져 걸리버는 난감한 상황에 놓인다. 때마침 릴리펏 황제의 약속을 빌미로 블레푸스쿠 제국을 방문한 걸리버는 우연히 보트를 발견하고 블레푸스쿠 황제에게 양해를 구하고 소인국을 떠난다.

1장을 읽다가 시대 배경을 알고 읽으면 이해하기가 수월할 것 같아서 17세기 유럽의 정황을 좀 찾아봤다. 몰랐던 역사는 아니지만 일일이 대입해서 읽으려니 조금 번잡스러워서 일단 읽고 다시 짚어보기로 했다.

릴리펏의 흥미로운 법률은 정직한 사람은 교활한 자를 만나면 막아낼 방법이 없으므로 사기 범죄는 사형. 행정의 두 가지 주축은 포상과 징벌, 징벌만으로 단속하는 것은 잘못된 정책이라는 것, 또한 배은망덕 즉 배신은 인류 전체의 공공의 적일만큼 중죄. 재밌는 것은 인간의 남녀는 성적 욕망에 의해 결합되고 그에 따라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므로 자식은 부모에게 고마움의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다고(우리 나라 부모들이 들으면 분기탱천할 일).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공직에 사람을 뽑을 때에는 후보의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더 더 중시한다는 것.

70.
도덕적 성품을 가진 사람이 무지에 의해 저지른 오류는 공공 이익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패한 경향이 있는 데다 그 자신의 부패한 심성을 숨기고, 돋보이게 하고, 옹호하는 능력을 가진 자의 고의적인 술수는 공공 이익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


2.
귀국한 지 두 달만에 배에 오르는 걸리버. 항해가 시작된 지 1년여만에 폭풍을 만나 적도에서 밀려 육지에 도착한다. 선원들은 해안 근처에 있었고, 내륙 깊숙이 들어간 걸리버는 원주민 거인 농부를 마주하고 그의 집에 잡혀간다. 처음에는 잘 대해주는가 싶더니만 이웃의 사악한 제안으로 구경거리가 되버리지만 소문을 통해 걸리버를 알게된 왕비의 부름으로 궁전에서 머물고 왕에게 신임을 얻어 좋은 대우를 받으며 생활한다. 그러기를 2년, 집이 그리운 걸리버는 탈출을 꾀하기 위해 바닷가로 바람을 쐬러 나가고, 마침 그가 들어가 있던 상자를 독수리가 물어 가던 중 바다에 떨어트려서 영국 선박에 구조된다.

2장에서의 압권은 브롭딩낵(거인국) 왕과 걸리버어 대화다. 두 사람은 정치, 경제, 군대 등 국가를 운영하는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서 논쟁을 벌인다.
새 귀족으로 선출되는 사람은 어떤 자질을 지녀야 하는가, 승진의 동기로 공공 이익과 위배되는 뇌물과 특정 정당의 이익 강화 등이 작용하는가, 돈이 많은 자가 통속적인 유권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가, 유력한 귀족의 견해를 비굴한 노예처럼 추종하지 않는가, 변호사들이 정의의 보편적 지식에 대하여 교육을 받은 사람인가 등 왕은 그에게 영국에 대해서 수많은 질문을 쏟아낸다.

159.
"이처럼 열렬히 의회 입성을 바라는 신사가 선거 때 들어간 비용과 노고를 보상받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겠는가? 타락한 정부 부처와 연계하고, 허약하거나 사악한 군주의 의도에 영합하여 공공선을 희생시키면서 그 비용을 회수하려 하지 않을까?"

또한 군대와 전쟁에 대한 왕의 의견도 눈에 들어온다.

160.
"우리의 채권자는 누구인가? 그들에게 변제할 돈을 정부는 어디에서 마련하는가? 국왕은 그처럼 돈이 많이 드는 대규모 전쟁 이야기를 듣고서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161.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하여 역사적 설명을 해주었더니 왕은 깜짝 놀랐다. 그 사건들이라는 것이 음모, 반란, 살인, 학살, 혁명, 추방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일들이 탐욕, 파당, 위선, 배신, 잔인, 분노, 광기, 증오, 시기, 욕정, 악의, 야심 등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라고 진단했다.

왕은 걸리버가 자랑스럽게 화약 만드는 기술과 어마어마한 효과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왕은 '왕을 위해서' 화약을 만들겠다는 그의 제안을 듣고 공포스러워한다. 그런 파괴적인 무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묘사하는 걸리버가 오히려 괴이하다고 여긴다. 왕은 차라리 끔찍한 무기의 비밀은 아느니 차라리 왕국 절반을 포기하겠다고까지 한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덧붙임까지.
또한 영국의 법률에 대한 왕의 통찰은 어떠한가.

162.
"법률은 그 법률을 왜곡하고 혼란을 주고 회피하려는 자들의 개인적 이익과 능력에 의하여, 임의로 설명되고 해석되고 적용되었지. 나는 자네 나라의 일련의 제도들 중 당초 시작될 때에는 그런대로 용납할 만한 제도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네. 하지만 그 제도들의 절반 정도는 이미 사라져 버렸고, 나머지 절반은 부정부패에 침식되어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어 버렸어. (...)"

걸리버는 실용 위주의 학문과 군대는 권력투쟁으로 인한 내란을 대비해 힘의 균형을 조율하는 수단일 뿐, 절대 군주의 권력을 얕잡게 보는 거인국의 왕과 시민들을 무지하다고 본다.

166.
유럽에서는 그 개념조차 희마한, 선량하지만 불필요한 양심이라는 문제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걸리버는 거인국 왕의 입을 빌어서 영국의 과거와 현재를 꼬집고 있다. 존재하지 않은 나라의 왕이 한 말이기에 망정이지...... .


3.
집으로 돌아온지 두 달만에 다시 항해에 나선 걸리버. 출항 후 1년도 되지 않아 해적에게 붙잡힌다. 해적들은 주로 네덜란드인으로 보이는데, 선장은 일본인(일본이 17세기에 이미 무역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만 해적으로까지 진출했을 줄이야). 해적으로부터 나흘치 식량을 싣은 카누에 태워져 바다를 표류하는 벌을 받은 걸리버는 어느 섬에서 공중에 떠 있는 섬을 발견, 그곳에 사람이 산다는 점을 확인하고 구조요청을 한다.
그를 구조한 나라는 특이한 용모를 가진 라퓨타. 라퓨타 시민의 머리는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치기꾼을 데리고 다닌다. 치기꾼의 업무는 상대방의 입이나 오른쪽 귀를 막대기의 끝에 달린 주머니로 살짝 쳐서 주의를 일깨우는 것인데, 문득 '치기꾼은 누가 쳐주지?'하는 궁금증이... . 학문은 오로지 수학과 음악 뿐인 이 섬은 베틀의 북과 유사한 형태의 천연자석으로 공중에 떠있다. 이를 운영, 유지하는 방식도 참으로 수학적이다(그래서 수학을 중시하는지도...).
걸리버가 다음에 향한 나라는 발니바니와 글럽덥드립 섬을 차례대로 방문하는데 글럽덥드립은 '마법사의 섬'이다. 읽다보면 마법사의 섬인지, 유령의 섬인지 구분짓기 애매하지만 유령을 불러내는 게 마법이라면야... 걸리버는 그들에게 부탁해 알렉산드로스 대왕, 한니발, 브루투스, 데카르트 등 고대의 영웅과 지식을 소환해 궁금했던 것들을 묻는다. (이건 나도 해보고 싶다.) 걸리버는 유령들을 통해 지난 백 년 동안 인류가 얼마나 퇴보했는지 통찰한다.

248.
그들의 후손은 투표권을 팔고, 선거에서 온갖 더러운 술수를 쓰고, 궁정에서나 배우는 모든 악덕과 부정행위를 습득하게 되었다.

다음은 럭낵 왕국. 이 왕국도 인상적이다. 이곳에는 불사로 태어나는 '스트럴드브럭'이 있다. 왕국을 통틀어 1천 1백 명이 넘지 않을만큼 소수다. '죽지 않는 삶'. 진시황이 들었다면 무덤에서 뛰어나올 일이겠지만, 이들의 일생을 들어보면 씁쓸해진다. 젊은이의 쾌락과 안식의 항구로 떠나는 노인의 자연스러운 죽음을 누릴 수 없는 불사자. 그래서 독선적이고, 역정을 잘 내고, 탐욕스럽고, 심술궂고, 자만심이 강할 뿐만 아니라 남들과 친분을 쌓지도 못하고, 자연적인 애정에 무관심하다. 스트럴드브럭끼리 결혼한다면, 두 사람 중 젊은 사람이 여든이 되자마자 국법에 따라 혼인 관계가 해제된다. 80년을 살게 되면 그들은 국법상으로 죽은 사람이고, 그 어떤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 그들은 고국에 살면서도 외국인처럼 살아야하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 굳이 이런 제재가 없더라도 함께 인생을 공유한 이들이 떠나가는데 나 혼자 남는 '불사의 삶'이 좋을리가...... . 걸리버는 럭낵에서 일본으로 가 그곳 황제의 도움으로 유럽 대륙을 5년만에 다시 밟는다.

3부에서는 각주를 통해 알 수 있는 작가의 문자 유희도 재미있다.


4.
걸리버는 귀가한지 5개월만인 1710년 9월에 선장으로서 배를 다시 탄다. 그러나 해적으로 돌변한 선원들에 의해 포로가 되고 어느 섬에 버려진다(배를 오래 탔다고 아무나 선장이 되는 게 아니다).
그곳은 의심 혹은 불신의 개념이 없는 나라, 후이늠. 후이늠의 어원은 '자연의 완성'이다. 걸리버가 마주한 후이늠의 나라는 말이 주인이다. 그 나라에는 '야후'라는 종이 있는데, 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한 미개한 종족이다.

281.
이런 가증스런 짐승이 완벽한 인간의 형태를 지닌 걸 알았을 때, 내가 느낀 공포와 놀라움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사실 그 짐승의 얼굴은 평평하고 넓었고, 코는 납작했고, 입술은 컸고, 입도 넓었다. 하지만 이런 모양은 모든 미개한 나라에서 흔히 발견되는 얼굴 모양이다.

그래서 나중에 걸리버가 주인이라고 부르는 후이늠은 그가 야후라고 오해하지만 걸리버의 예의 바른 태도와 언행으로 야후와는 다르다고 인정한다.
4부에서는 특별한 사건이나 에피소드는 없지만, 걸리버와 주인 후이늠의 대화가 눈길을 끈다. 언어의 구성은 간결하지만 부정적인 어휘가 없는 후이늠의 언어. 그래서 그들에게는 거짓, 사기, 위조, 위협, 강탈, 절도, 탐욕 등의 개념이 없다.

주인 후미늠은 걸리버에게 두 나라가 전쟁을 하는 통상적인 원인이나 동기를 묻는다. 걸리버가 대답하기를, 군주가 통치할 땅이 부족하다고 여겨서, 타락한 대신이 군주를 부추겨, 사람들의 의견 차이로, 어떤 권리도 없는 제3의 영토를 마음대로 차지하고자, 상대방이 서로 원하는 것을 빼앗고자.

302.
미개한 삶의 방식을 교화하겠다는 명분만 내세우면 학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로 늘 전쟁이 벌어지므로, 군인이라는 직업이 모든 직업 중에 가장 명예롭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군인은 자신을 단 한 번도 모욕하지 않은 사람을 냉혹하게, 최대한 많이 죽이고자 고용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주인 후미늠은 답한다.

304.
나는 '그나이'(이곳의 맹금이다)의 잔혹성이나 말의 발굽을 깎아내는 날카로운 돌을 비난하지 않네. 그건 원래 그런거니까. 마찬가지로 이 나라 야후의 혐오스런 특징을 비난하지는 않네. 하지만 자네 나라의, 소위 이성적인 척하는 짐승이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다면 그거 정말 극악무도한 일이야. 왜냐하면 타고난 야만성 보다 정신적 능력의 타락이 더 나쁜 것이니까 말이야.

흠...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인간세계에는 극악무도한 일이 너무 심하게 자주 일어난다.

둘은 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걸리버의 이야기를 들은 주인은 말을 받는다.

304.
모든 이를 지키고자 만들었다는 법이 왜 누군가를 몰락하게 만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 그대들은 스스로를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자연과 이성이야말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보여 주는 지침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네.

또한 건강과 질병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걸리버는 모든 질병의 원인은 과식에 있다며 배고프지 않아도, 목마르지 않아도 마시는 식탐과 식탐만큼이나 위험한 돈과 권력의 탐욕에 대해서도 말한다(걸리버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인간의 바닥을 다 드러내고 있다). 이제 걸리버는 후미늠의 검소한 경제 생활과 미덕에 매료되어 남은 생을 그들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후미늠들이 그를 내보내고 싶어한다.

4부를 읽다보면 나 자신이 사람인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자연을 훼손하고, 법과 규칙은 힘없는 자들이나 지키고, 필요를 넘어서는 과도한 부의 욕심, 끊임없는 식탐, 식탐으로 인해 생기는 질병, 전쟁이 생존인 제국주의. 이성의 동물이라는 인간의 분별력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조너선 스위프트는 묻고 있다.

소인, 거인, 기형의 모습을 한 사람, 불사자를 거쳐 마지막에는 가축인 말을 등장시켜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메세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일까. 인간 사회의 민낯을 제대로 까발렸다.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시대가 17-18세기 기독교 사회임을 감안하고 이 작품이 풍자소설로서 왜 극찬을 받는지 알 수 있는, 통쾌한 소설이다.

표지 삽화는 1860년판 <걸리버 여행기>에 수록된 삽화.
사이사이 삽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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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성이 고민입니다 - 혼자이고 싶지만 외로운 과학자의
장대익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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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절차를 거쳐 형성된 보편적 경험 지식입니다. (장대익) 
 
사회성의 진화를 연구하는 진화과학자가 쓴 심리학 책이다.
관계, 외로움, 평판(관종), 경쟁과 배려, 영향, 공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관련한 책들이 워낙 많기도 하고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들도 많아 익숙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미처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던 부분들도 있다.  
 
 
1.
혼밥. 혼술의 사회적 현상은 왜일까? 저자는 '사회생활에 지쳐서'라고 생각한다. 이에 적극 동조하는 이유는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끔하기 때문에. 아무리 허물없는 가족이라고 해도, 이꼴저꼴 다 지켜봐서 내 바닥을 다 아는 절친이라고 해도 지켜야 하는 최저의 선이 있다. 때로는 진심 혼자이고 싶을 때, 없나? 
 
2.
'던바의 수'에 의하면 인간의 긴밀한 사회적 관계의 최대치는 150이라고 한다. 이는 완전 절친, 절친, 좋은 친구, 친구의 범위를 말한다. 그러면서 밀접하게 교류하는 친구가 500~1000명 정도가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회적 천재이거나 정신이상자라고. 물론 요즘같이 SNS로 교류하는 세상에 절친 타령이 시의적절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글쎄 소셜에서 사진으로 만나는 이들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것저것을 떠나서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다는 수를 헤아려보라고 한다. 그러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수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거라고. 좋은 관계는 여전히 어렵다. 
 
3.
'고독solitude'은 심리학적으로 외롭다는 느낌 없이 홀로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p49)'
나는 이 '고독감'을 무척 사랑한다. 사실 살면서 '외롭다'는 감정을 많이 느껴보지 못하고 살았다(중학교 3학년 사춘기 시절은 호르몬이 요동치는 특수한(?) 상황이었으므로 예외로 하고). 주변을 둘러보면 손을 내밀 누군가가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 가족이든 친구든. 그래서 외로움의 고통을 크게 역지사지 못했다.
책에서 읽은 외로움의 실험은 흥미롭다. '외로움loneliness'은 고립되어 있다는 주관적 느낌으로 누구나 가지는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부정되어야 할 정서는 아니지만 빨리 벗어나야하는 상태이다. 다쳐서 상처가 나면 아픔을 느끼듯 외로움도 고통이라는 것. 인간의 뇌는 소외감을 느끼면 배측 전대상피질이 활성화되는데, 이 부위는 신체적 고통이 일어날 때도 활성화된다고 한다. 이는 우리의 뇌가 물리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을 비슷하게 인식하고 취급한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적 고통을 물리적 고통과 비슷하게 처리하는 데에는 집단적 체제 안에서 분리나 배제 경험이 사회적 동물에게는 치명적 고통으로 입력되었을 거라고 말한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사람들이 인지한다면 이해의 폭이 좀 더 넓어지려나? 나부터 잊지 말아야겠다. 칼에 손이 베었을 때의 아픔을. 정신적 고통도 다르지 않음을.
팁 : 실연을 겪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타이레놀이 진통 효과를 발휘하는지 실험을 했다는데, 의미있는 효과가 나왔단다. 이제는 이별의 아픔을 술이 아닌 타이레놀을 먹기를. 
 
4.
저출산의 원인은 병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경쟁적 사회가 문제란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결과라고. 그러니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며 살아야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세상에서 벗어나보자! 경쟁력 있는 사람이기 보다는 자율성 있는 사람이 되보려고. 눈치는 분위기 파악하는 정도로만 남겨두고. 
 
5.
점점 다가오는 A.I 시대에 우리는 어디까지 공감할 수 있을까? 가축으로 필요에 의해서 사육하던 동물들을 방 안으로 들이면서 가족이 되었다. 로봇은 기계니까 다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글쎄...... . '페퍼'나 '버디'를 본다면 과연 단정지을 수 있을까? 저자의 말대로 A.I는 반려동물이 하지 못하는 인간의 언어까지 사용한다. 이미 나와있는 여러 영화나 문학 작품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지만 단순히 기계로 치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재미있어 한숨에 쉭~ 읽었다. 어렵지 않게 써서 에세이 한 편 읽는 기분으로 편하게 읽었다. '사회성, 이렇게 하면 향상된다'라는 해결서는 아니고, '사회성, 그까이꺼 중요하지 않아'라는 남의 다리 긁는 위로서는 더더욱 아니다.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하면 누구나 일정 부분은 '사회성' 결핍이 있고, 그것이 오로지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됨으로써 자책할 필요는 없다는 것, 더불어 보완할 건 보완하고 괘념치 않아야할 것은 비우면 된다는 것.  
 
즐거운 시간이었다. 
 


 

로봇 페퍼와 버디

‘고독solitude‘은 심리학적으로 외롭다는 느낌 없이 홀로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 P49

인격적 존재의 다양성이 생겨날 가까운 미래에 인간이 맺을 관계는 어떻게 진화할까요? 저는 이런 미래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인간 본성이라는 과거로부터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깊이 들여다봐야 미래를 멀리 내다볼 수 있으니까요.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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