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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문은강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대학을 졸업하고도 전투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박지우. 그래서 취업 전선에 목숨 걸 듯 달려들지 않았는데,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루저 취급이다. 욱하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결제해버린 '캄보디아에서 한 달 살기ㅡ원더랜드 호텔'. 앙코르와트나 가보자 하는 마음에 도착한 호텔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이는 한국어 잘 하는 친절한 현지인 직원 린과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불친절한 사장 고복희였다.
소설은 캄보디아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고복희의 현재를 시작으로, 대한민국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그녀와 주변 인물, 그리고 박지우를 통해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읽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오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문장이나 극 중 상황에 큭큭대며 웃다가도 담겨져 있는 내용에, 마음에 추가 하나씩 달린다.
사람들은 모든 청년이 대기업을 선호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의 가치는 상관없이 목표를 경제적 성공에 두지 않으면 열정박약, 의지박약 취급이다. 본인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말하면 실력이 없어 포기하는 거라고 지레짐작이다. 그런데 이 시대 젊은이들은 학교라는 곳에 입학하는 그 순간부터(어쩌면 입학 전부터) 이미 충분히, 너무 심하게 열심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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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빡세게 살아서 제가 빡세게 사는 건 티도 안나요. (...) 뭔가 이루고 싶으면 죽도록 하라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때 죽도록 하는 사람들은 진짜 죽어요. 살기 위해 죽도록 하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예요."
우리가 정작 걱정해야할 것은 목표는 있지만 목적 없는 삶이 아닐까? 성적 1등급, 입시, 취업이라는 목표는 있다. 그 다음은? 취업만 하면 인생은 마침표인가? 그리고 좋은 대학은 왜 가려고 하는가? 취업을 위해서? 그럼 돈을 많이 벌기만 하면 인생은 성공인가? 목적 없이 목표만 세우고 주변을 둘러볼 틈도 없이 달리기만 한다. 그리고는 지쳐버린다. 정신없이 달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잠깐만'이라고 팔을 잡아줄 이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15쪽을 읽고 있다가 불현듯 몇 년 전에 방영했던 드라마 <직장의 신>이 떠올랐다. 고복희는 김혜수 배우가 연기했던 '미스 김'처럼 정확한 루틴이 있는 인물이다. 아침 다섯 시 기상, 단정한 단발머리, 호텔 청소 순서, 무엇보다 스스로 만든 오 분 스트레칭.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는 원칙을 고수하고 주변의 말이나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다. 어물거리는 법이 없다. 의사표현은 확실하게, 정도에 어긋나지 않으며 개인 사정 따위는 원칙 앞에서 요지부동이다. 이쯤되면 '뭐 이런 인정머리 없는 냉혈인간이 있어?'하겠지만, 오히려 지켜야할 것을 지키고, 해서는 안될 짓을 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는 고복희는 매력 폭발이다.
오히려 연대를 외치고 교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김인석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폭력을 불사한다. 교민 사회의 발전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서. 원더랜드를 뺏기 위해 고복희 폭행을 사주하고, 그것을 거부한 직원 안대용을 향해 사정없이 주먹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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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고? 살려고 했으면 그래서는 안 되지. 더 독해야지. 그렇게 나약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런 놈들은 사회에 어떤 이바지도 못한다.
어쩌면 아이들은, 청년들은, 성공담이 정답인 양 조언하거나 할 수 있다는 막연한 격려와 응원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버티며 공정한 원칙을 지키는 어른들에게 더 힘을 얻지 않을까?
조금 우울할 수 있는 소재를 유쾌하게 버무린 소설이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정의롭지 않은 방법을 쓰는 이들이여, 고복희를 벤치마킹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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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다툰다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누군가 영역에 침범해오면 아까운 기력을 쓸 수 밖에 없다. 힘이 넘치는 사람은 주변을 성가시게 하는 대신 다른 것에 주의를 돌리는 것이 어떨까. 환경오염이나 난민을 위한 대책 같은 훨씬 생산적인 문제로. - P61
한국이나 여기나 똑같다. 그걸 깨닫고 나니 슬퍼졌다. 뭣 좀 해보려고 하면 다 실패다. 행동 하나하나 실수투성이다. 바보같이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바닥 언저리를 맴도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밑바닥까지 떨어진 것 같았다. - P86
원래 사는 게 고달픈 거라고. 이 정도 고생은 다 하면서 산다고. 먹고 사는 일의 부당함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 그건 강금자가 삶을 견디는 방식이었다. - P157
다 함께 모여 춤추는 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동그란 지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찍어 놓은 발자국으로 빼곡할 것이다. 저마다의 흔적을 남겨놓고 떠난 이들은 분명 즐거웠을 것이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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