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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27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9월
평점 :
《걸리버 여행기》
ㅡ 조나단 스위프트
조지 오웰이 극찬했다는 걸리버 여행기. 초등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 본 책이다. 언제부턴가 완역본을 읽어봐야겠다고 별렀건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기회가 되서 읽는다. 지금 아니면 영영 안 읽을것 같아서.
총4부로 구분했는데, 1부는 남녀노소 다 아는 릴리펏(소인국) 여행기, 2부는 브롭딩낵(거인국) 이야기, 3부는 라퓨타(날아다니는 섬) 외 여행기, 4부는 후이늠국(말의 나라) 여행기로 이루어져 있다.
1.
남태평양으로 출항하는 앤틸롭스 호의 의사로 항해하는 걸리버. 동인도 제도로 가는 길에 폭풍을 만나 태즈메이니아로 떠밀려 암초에 의해 좌초된 후 조수의 도움으로 육지에 도착. 쓰러지듯 드러누워 잠을 자고 깨어보니 머리카락부터 발까지 묶여 있고, 자신의 몸 위를 오르내리는 신장 15cm의 사람들. 걸리버는 릴리핏(소인국) 왕국에서 그곳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고자 노력한 덕분에 일정 부분 자유로운 몸이 된다. 그러던 중 적국인 블레푸스쿠 제국이 침공해오자 비상한 전략으로 적의 배를 모두 항구에 끌어오고 이 일로 가장 높은 명예직인 '나르닥'에 임명된다. 하지만 황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소변으로 불을 끈 행동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러 온 상대국의 고위 사절을 만난 것이 불충의 표시로 여겨져 걸리버는 난감한 상황에 놓인다. 때마침 릴리펏 황제의 약속을 빌미로 블레푸스쿠 제국을 방문한 걸리버는 우연히 보트를 발견하고 블레푸스쿠 황제에게 양해를 구하고 소인국을 떠난다.
1장을 읽다가 시대 배경을 알고 읽으면 이해하기가 수월할 것 같아서 17세기 유럽의 정황을 좀 찾아봤다. 몰랐던 역사는 아니지만 일일이 대입해서 읽으려니 조금 번잡스러워서 일단 읽고 다시 짚어보기로 했다.
릴리펏의 흥미로운 법률은 정직한 사람은 교활한 자를 만나면 막아낼 방법이 없으므로 사기 범죄는 사형. 행정의 두 가지 주축은 포상과 징벌, 징벌만으로 단속하는 것은 잘못된 정책이라는 것, 또한 배은망덕 즉 배신은 인류 전체의 공공의 적일만큼 중죄. 재밌는 것은 인간의 남녀는 성적 욕망에 의해 결합되고 그에 따라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므로 자식은 부모에게 고마움의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다고(우리 나라 부모들이 들으면 분기탱천할 일).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공직에 사람을 뽑을 때에는 후보의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더 더 중시한다는 것.
70.
도덕적 성품을 가진 사람이 무지에 의해 저지른 오류는 공공 이익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패한 경향이 있는 데다 그 자신의 부패한 심성을 숨기고, 돋보이게 하고, 옹호하는 능력을 가진 자의 고의적인 술수는 공공 이익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
2.
귀국한 지 두 달만에 배에 오르는 걸리버. 항해가 시작된 지 1년여만에 폭풍을 만나 적도에서 밀려 육지에 도착한다. 선원들은 해안 근처에 있었고, 내륙 깊숙이 들어간 걸리버는 원주민 거인 농부를 마주하고 그의 집에 잡혀간다. 처음에는 잘 대해주는가 싶더니만 이웃의 사악한 제안으로 구경거리가 되버리지만 소문을 통해 걸리버를 알게된 왕비의 부름으로 궁전에서 머물고 왕에게 신임을 얻어 좋은 대우를 받으며 생활한다. 그러기를 2년, 집이 그리운 걸리버는 탈출을 꾀하기 위해 바닷가로 바람을 쐬러 나가고, 마침 그가 들어가 있던 상자를 독수리가 물어 가던 중 바다에 떨어트려서 영국 선박에 구조된다.
2장에서의 압권은 브롭딩낵(거인국) 왕과 걸리버어 대화다. 두 사람은 정치, 경제, 군대 등 국가를 운영하는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서 논쟁을 벌인다.
새 귀족으로 선출되는 사람은 어떤 자질을 지녀야 하는가, 승진의 동기로 공공 이익과 위배되는 뇌물과 특정 정당의 이익 강화 등이 작용하는가, 돈이 많은 자가 통속적인 유권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가, 유력한 귀족의 견해를 비굴한 노예처럼 추종하지 않는가, 변호사들이 정의의 보편적 지식에 대하여 교육을 받은 사람인가 등 왕은 그에게 영국에 대해서 수많은 질문을 쏟아낸다.
159.
"이처럼 열렬히 의회 입성을 바라는 신사가 선거 때 들어간 비용과 노고를 보상받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겠는가? 타락한 정부 부처와 연계하고, 허약하거나 사악한 군주의 의도에 영합하여 공공선을 희생시키면서 그 비용을 회수하려 하지 않을까?"
또한 군대와 전쟁에 대한 왕의 의견도 눈에 들어온다.
160.
"우리의 채권자는 누구인가? 그들에게 변제할 돈을 정부는 어디에서 마련하는가? 국왕은 그처럼 돈이 많이 드는 대규모 전쟁 이야기를 듣고서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161.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하여 역사적 설명을 해주었더니 왕은 깜짝 놀랐다. 그 사건들이라는 것이 음모, 반란, 살인, 학살, 혁명, 추방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일들이 탐욕, 파당, 위선, 배신, 잔인, 분노, 광기, 증오, 시기, 욕정, 악의, 야심 등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라고 진단했다.
왕은 걸리버가 자랑스럽게 화약 만드는 기술과 어마어마한 효과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왕은 '왕을 위해서' 화약을 만들겠다는 그의 제안을 듣고 공포스러워한다. 그런 파괴적인 무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묘사하는 걸리버가 오히려 괴이하다고 여긴다. 왕은 차라리 끔찍한 무기의 비밀은 아느니 차라리 왕국 절반을 포기하겠다고까지 한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덧붙임까지.
또한 영국의 법률에 대한 왕의 통찰은 어떠한가.
162.
"법률은 그 법률을 왜곡하고 혼란을 주고 회피하려는 자들의 개인적 이익과 능력에 의하여, 임의로 설명되고 해석되고 적용되었지. 나는 자네 나라의 일련의 제도들 중 당초 시작될 때에는 그런대로 용납할 만한 제도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네. 하지만 그 제도들의 절반 정도는 이미 사라져 버렸고, 나머지 절반은 부정부패에 침식되어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어 버렸어. (...)"
걸리버는 실용 위주의 학문과 군대는 권력투쟁으로 인한 내란을 대비해 힘의 균형을 조율하는 수단일 뿐, 절대 군주의 권력을 얕잡게 보는 거인국의 왕과 시민들을 무지하다고 본다.
166.
유럽에서는 그 개념조차 희마한, 선량하지만 불필요한 양심이라는 문제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걸리버는 거인국 왕의 입을 빌어서 영국의 과거와 현재를 꼬집고 있다. 존재하지 않은 나라의 왕이 한 말이기에 망정이지...... .
3.
집으로 돌아온지 두 달만에 다시 항해에 나선 걸리버. 출항 후 1년도 되지 않아 해적에게 붙잡힌다. 해적들은 주로 네덜란드인으로 보이는데, 선장은 일본인(일본이 17세기에 이미 무역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만 해적으로까지 진출했을 줄이야). 해적으로부터 나흘치 식량을 싣은 카누에 태워져 바다를 표류하는 벌을 받은 걸리버는 어느 섬에서 공중에 떠 있는 섬을 발견, 그곳에 사람이 산다는 점을 확인하고 구조요청을 한다.
그를 구조한 나라는 특이한 용모를 가진 라퓨타. 라퓨타 시민의 머리는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치기꾼을 데리고 다닌다. 치기꾼의 업무는 상대방의 입이나 오른쪽 귀를 막대기의 끝에 달린 주머니로 살짝 쳐서 주의를 일깨우는 것인데, 문득 '치기꾼은 누가 쳐주지?'하는 궁금증이... . 학문은 오로지 수학과 음악 뿐인 이 섬은 베틀의 북과 유사한 형태의 천연자석으로 공중에 떠있다. 이를 운영, 유지하는 방식도 참으로 수학적이다(그래서 수학을 중시하는지도...).
걸리버가 다음에 향한 나라는 발니바니와 글럽덥드립 섬을 차례대로 방문하는데 글럽덥드립은 '마법사의 섬'이다. 읽다보면 마법사의 섬인지, 유령의 섬인지 구분짓기 애매하지만 유령을 불러내는 게 마법이라면야... 걸리버는 그들에게 부탁해 알렉산드로스 대왕, 한니발, 브루투스, 데카르트 등 고대의 영웅과 지식을 소환해 궁금했던 것들을 묻는다. (이건 나도 해보고 싶다.) 걸리버는 유령들을 통해 지난 백 년 동안 인류가 얼마나 퇴보했는지 통찰한다.
248.
그들의 후손은 투표권을 팔고, 선거에서 온갖 더러운 술수를 쓰고, 궁정에서나 배우는 모든 악덕과 부정행위를 습득하게 되었다.
다음은 럭낵 왕국. 이 왕국도 인상적이다. 이곳에는 불사로 태어나는 '스트럴드브럭'이 있다. 왕국을 통틀어 1천 1백 명이 넘지 않을만큼 소수다. '죽지 않는 삶'. 진시황이 들었다면 무덤에서 뛰어나올 일이겠지만, 이들의 일생을 들어보면 씁쓸해진다. 젊은이의 쾌락과 안식의 항구로 떠나는 노인의 자연스러운 죽음을 누릴 수 없는 불사자. 그래서 독선적이고, 역정을 잘 내고, 탐욕스럽고, 심술궂고, 자만심이 강할 뿐만 아니라 남들과 친분을 쌓지도 못하고, 자연적인 애정에 무관심하다. 스트럴드브럭끼리 결혼한다면, 두 사람 중 젊은 사람이 여든이 되자마자 국법에 따라 혼인 관계가 해제된다. 80년을 살게 되면 그들은 국법상으로 죽은 사람이고, 그 어떤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 그들은 고국에 살면서도 외국인처럼 살아야하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 굳이 이런 제재가 없더라도 함께 인생을 공유한 이들이 떠나가는데 나 혼자 남는 '불사의 삶'이 좋을리가...... . 걸리버는 럭낵에서 일본으로 가 그곳 황제의 도움으로 유럽 대륙을 5년만에 다시 밟는다.
3부에서는 각주를 통해 알 수 있는 작가의 문자 유희도 재미있다.
4.
걸리버는 귀가한지 5개월만인 1710년 9월에 선장으로서 배를 다시 탄다. 그러나 해적으로 돌변한 선원들에 의해 포로가 되고 어느 섬에 버려진다(배를 오래 탔다고 아무나 선장이 되는 게 아니다).
그곳은 의심 혹은 불신의 개념이 없는 나라, 후이늠. 후이늠의 어원은 '자연의 완성'이다. 걸리버가 마주한 후이늠의 나라는 말이 주인이다. 그 나라에는 '야후'라는 종이 있는데, 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한 미개한 종족이다.
281.
이런 가증스런 짐승이 완벽한 인간의 형태를 지닌 걸 알았을 때, 내가 느낀 공포와 놀라움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사실 그 짐승의 얼굴은 평평하고 넓었고, 코는 납작했고, 입술은 컸고, 입도 넓었다. 하지만 이런 모양은 모든 미개한 나라에서 흔히 발견되는 얼굴 모양이다.
그래서 나중에 걸리버가 주인이라고 부르는 후이늠은 그가 야후라고 오해하지만 걸리버의 예의 바른 태도와 언행으로 야후와는 다르다고 인정한다.
4부에서는 특별한 사건이나 에피소드는 없지만, 걸리버와 주인 후이늠의 대화가 눈길을 끈다. 언어의 구성은 간결하지만 부정적인 어휘가 없는 후이늠의 언어. 그래서 그들에게는 거짓, 사기, 위조, 위협, 강탈, 절도, 탐욕 등의 개념이 없다.
주인 후미늠은 걸리버에게 두 나라가 전쟁을 하는 통상적인 원인이나 동기를 묻는다. 걸리버가 대답하기를, 군주가 통치할 땅이 부족하다고 여겨서, 타락한 대신이 군주를 부추겨, 사람들의 의견 차이로, 어떤 권리도 없는 제3의 영토를 마음대로 차지하고자, 상대방이 서로 원하는 것을 빼앗고자.
302.
미개한 삶의 방식을 교화하겠다는 명분만 내세우면 학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로 늘 전쟁이 벌어지므로, 군인이라는 직업이 모든 직업 중에 가장 명예롭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군인은 자신을 단 한 번도 모욕하지 않은 사람을 냉혹하게, 최대한 많이 죽이고자 고용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주인 후미늠은 답한다.
304.
나는 '그나이'(이곳의 맹금이다)의 잔혹성이나 말의 발굽을 깎아내는 날카로운 돌을 비난하지 않네. 그건 원래 그런거니까. 마찬가지로 이 나라 야후의 혐오스런 특징을 비난하지는 않네. 하지만 자네 나라의, 소위 이성적인 척하는 짐승이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다면 그거 정말 극악무도한 일이야. 왜냐하면 타고난 야만성 보다 정신적 능력의 타락이 더 나쁜 것이니까 말이야.
흠...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인간세계에는 극악무도한 일이 너무 심하게 자주 일어난다.
둘은 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걸리버의 이야기를 들은 주인은 말을 받는다.
304.
모든 이를 지키고자 만들었다는 법이 왜 누군가를 몰락하게 만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 그대들은 스스로를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자연과 이성이야말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보여 주는 지침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네.
또한 건강과 질병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걸리버는 모든 질병의 원인은 과식에 있다며 배고프지 않아도, 목마르지 않아도 마시는 식탐과 식탐만큼이나 위험한 돈과 권력의 탐욕에 대해서도 말한다(걸리버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인간의 바닥을 다 드러내고 있다). 이제 걸리버는 후미늠의 검소한 경제 생활과 미덕에 매료되어 남은 생을 그들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후미늠들이 그를 내보내고 싶어한다.
4부를 읽다보면 나 자신이 사람인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자연을 훼손하고, 법과 규칙은 힘없는 자들이나 지키고, 필요를 넘어서는 과도한 부의 욕심, 끊임없는 식탐, 식탐으로 인해 생기는 질병, 전쟁이 생존인 제국주의. 이성의 동물이라는 인간의 분별력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조너선 스위프트는 묻고 있다.
소인, 거인, 기형의 모습을 한 사람, 불사자를 거쳐 마지막에는 가축인 말을 등장시켜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메세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일까. 인간 사회의 민낯을 제대로 까발렸다.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시대가 17-18세기 기독교 사회임을 감안하고 이 작품이 풍자소설로서 왜 극찬을 받는지 알 수 있는, 통쾌한 소설이다.
표지 삽화는 1860년판 <걸리버 여행기>에 수록된 삽화.
사이사이 삽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