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티켓
조 R. 랜스데일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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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두로 인해 부모가 모두 죽자 잭과 룰라 남매는 할아버지와 함께 고모할머니 집으로 향하던 중 강을 건너기 위한 줄나룻배에서 시비가 붙고, 할아버지가 총에 맞아 사망한 것도 모자라 회오리바람으로 인해 배가 뒤집혀 할아버지에게 총을 쏜 패거리에게 동생 롤라가 납치됐다. 사건을 신고하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얘기해 두었던 실베스터에 도착했으나 은행 강도들이 이미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으며 보안관도 사망했다. 알고 보니 동생 룰라를 납치한 패거리가 바로 그 은행강도 일당이었고, 할아버지를 죽인 커스로트 빌은 법 집행 기관도 꺼려하는 잔인무도한 강도 살인 수배범이었다. 


마을에서 알게 된 유스터스의 조언대로 유산받은 땅을 걸고 현상금 사냥꾼을 고용한 잭은 동생을 구하기 위해 범인들을 쫓기 시작하고, 그들이 향한 곳은 들어간 사람은 많지만 제 발로 나온 사람은 거의 없다는 무법천지 '빅 티켓' 이다.  










19세기 말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당시 미국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먼저 인물의 대립 구도가 흥미로운데, 가해자이자 범죄자는 백인 남성 집단이다. 그들을 뒤쫓아 응징하겠다는 이들은 열여섯 살 미성년자, 흑인과 인디언 혼혈인, 난쟁이, 매춘 여성, 한쪽 귀가 없는 현상금 사냥꾼 출신 보안관, 그리고 돼지(진짜 돼지)다. 얼핏 소수 약자들의 통쾌한 복수극으로 보여질 수 있는 이 스토리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인물들의 개별적 서사와 모순을 통해 그들이 삶의 매순간마다 부딪쳐야하는 차별과 핍박, 산업화 및 문명화를 명분으로 자행되는 폭력을 짚어내고 있다.  


난쟁이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사람들로부터 학대받았으나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문학과 철학적 사유를 하는 쇼티.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할아버지가 정기적으로 매춘업소를 찾아다녔다는 사실, 용서하고 잊으라는 종교적 가르침에 충실하고 싶지만 분노로 인해 동생을 잡아간 자들을 살해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변해가는 자신이 두려워지는 잭, 그리고 윈튼의 아내와 딸을 잔혹하게 살해한 코만치족은 백인들에게 더 많은 동족을 잃었다. 분명한 악당은 커스로트 빌 일당이다. 은행강도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살인마보다 잭의 일행에게 더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일행이 다수가 멋대로 규정해 놓은 '보통'의 범주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쇼티는 투계를 재미거리라고 여기는 것에 분노한다. 어떤 생명체든 목숨을 놀이라고 여기는 것이 마땅치 않은 이유는 아마도 인간에게 붙들린 닭에 대중의 구경거리였던 자신을 이입시켰기 때문이었을 터다. 이는 탐욕과 욕망과 복수에 기대어 반복적으로 대립하는 인간 세상의 축소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철저한 기도교도이자 백인인 잭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종교를 통해 각자의 삶을 존중하며 상대를 이해하라고 배운 잭이 소설 속 백인 집단들과 다른점은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잭은 저지른 범죄의 정당성에 괴로워하고 갈등하는데, 그가 죄의식을 덜어내는 방식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해 죽은 모르는 사람들을 묻어주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불행이 우리를 자꾸 자극하더라도 인간이기에 지켜야하는 기본적 선의가 여기에 있다. 


잭은 묻는다. 우리는 선량한 사람들이냐고. '착함=어리숙함'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버린 세상에서 이러한 질문에 사람들은 어떤 대답을 해줄까. 이 질문에 앞서 '선량'한 사람이 이 세상을 무사히 살아갈 수 있는지부터 묻고 싶다. 


서부소설이지만 거친 마초 영웅 따위는 없다. 가족과 연인을 지키고, 사랑과 우정과 별의 가치를 아는 그들이 있다. 신선한 총잡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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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전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서거 77주년, 탄생 105주년 기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뉴 에디션 전 시집
윤동주 지음, 윤동주 100년 포럼 엮음 / 스타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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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잎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어 있소. 


힌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럼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 무서운 시간 (1941) 



ㅡ 



내가 윤동주의 시 중 손에 꼽는 아픈 시다.
이정명 작가의 <별을 스치는 바람> 초독 후 펑펑 울면서 이 시를 떠올렸었다.
그리고 이 시를 다시 읽고 또 울었던 기억이 있다. 


이 시를 쓴 시기가 1941년. 그가 투옥된 해는 1943년.
그가 그토록 무서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드러내놓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한 용기라고 생각했었나, 아니면 서럽지도 않을 죽음이었나.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꽃처럼 피어날 피를 조용히 흘리겠다는 이 시인을 어쩌면 좋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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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하여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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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코로나 발발 후 팬데믹으로 인한 세상을 더는 이해할 수 없어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탈출하듯 시골 마을 브라켄으로 이사한 도라가 그동안 자신의 삶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서술한다. 그런데 수습생 시절부터 돌이키는 삶의 궤적이 단순한 개인적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내포함과 동시에 이를 비판하는 객관적 시선이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도라가 코로나로부터의 피난을 명분으로 시골로 향하지만, 실질적 이유는 도시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압박, 끝날 것 같지 않은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의 정신적인 생존 방책, 자신의 삶에서 탈출이었다. 그러나 도라를 기다리는 것은 낭만적인 귀촌 생활이 아닌 황무지를 정원으로 변신시키야 하는 장시간의 고된 노동이다.


읽다보면 점점 더 크게 느껴지는 건 코로나로 인한 폐해와 코로나 종식 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오랜 세월 지속되어 왔던 사회 저변의 심각한 문제들이 코로나로 인해 묻혀버리는 것에 대한 우려다. 작가는 코로나 시대에 뒷전으로 내팽겨쳐진 차별과 혐오, 이념 대립과 단절 등을 이야기한다. 



도라가 브라켄으로 이사하는 직접적 원인은 코로나를 대처하는 연인과의 의견 충돌로 비춰질 수 있지만 도시인이 갖는 경제 문제와 번아웃 등에 기인한다. 그는 시골 마을인 브라켄에서도 타인에 대한 고정관념, 인종 및 이민자, 성소수자 등의 사회 문제가 깊이 뿌리박혀 있음을 확인한다.  


도라조차 고테가 폴란드 이민자라고 여겼고, 도시인 기준으로 슈테펜의 호의를 오해했고, 건장한 톰을 보고 감자 농사를 짓는다고, 슈테펜의 외모를 보고 불법 작물을 재배한다고 단정했다. 또한 주변의 말만 듣고 브라켄을 극우주의 마을이라는 선입견을 갖은 채 보이는 대로 보기보다 무의식적로 보고 싶은대로 보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드러나 있는 고테의 모습과 숨겨져 있는 고테의 모습은 너무 다르다. 어쩌면 우리가 자주 입에 올리는 '다양'한 모습을 고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나치임을 주장하고 이민자 유입을 반대하지만 외국인 자체에 혐오가 없는 사람.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인 사람. 우리는 고테를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듯, 세상을 극우와 극좌,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원주민과 이주민 등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다. 


ㅡ 


도라가 저항심이 드는 부분은 코로나로 인해 강제하는 규정 자체가 아니라 '생각의 강제'에 있다. 즉 규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닌 규정이 옳지 않다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도라는 팬데믹 발발 이후 세상에는 코로나만 존재하며, 코로나가 아닌 문제(전쟁, 난민, 빈곤 등)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버린 것에 안타까움을 나타낸다. 어떤 행위나 그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상대에 대한 충분한 경청과 납득, 그리고 이해와 설득의 과정이 우리 사회에 결여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경청을 동반한 대화와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살피고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에 대해 계속 의심해보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슈테펜이 말하는 '정통성을 알리는 비상 경보'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본문의 각주에 달린 대로 우리는 보통 '정통성'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정통성에 어긋나는 것은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음은 분명하다. 남성이고 동성부부인 두 사람이 화훼 사업을 한다는 설정이 참으로 적절하지 않았나 싶다. 극우주의 뿐만 아니라 극단적 이념과 신념을 지양하는 도라조차 그들의 관계와 직업을 처음에는 놀라워하는 것(물론 곧바로 아무렇지 않게 수긍한다)처럼 많은 이들이 '다양성' 혹은 '다름'에 대해 이론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 자연스럽게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크다.


고테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그의 말이 맞을까? 종차별, 성차별, 순혈주의, 제국주의, 팬데믹. 이렇게 미친 듯 돌아가는 세상을 '순리대로'라는 말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게 괜찮을까? 인류의 기득권을 위해 목적과 별개로 어떤 형태로든 인류를 제외한 생명체들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차라리 그의 말대로 내버려 두는 게 더 나은 것일까?  


모든 관계와 이념과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도라는 브라켄에 와서 더 의미있는 관계를 맺는다. 자신과는 전혀 반대적인 성향과 신념을 갖고 있었던 고테와 만나는 게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 도라. 이것은 알고리즘, 혹은 별자리가 매칭해주는 관계와는 사뭇 다른 관계 맺기다. 쓰면서 곰곰 생각해 보면 이들의 관계 맺기에는 기다림이 있다.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한 템포 쉬어가는 기다림. 나는 여기에서 내 의문의 답을 찾는다.











도라에게 공감했던 부분 몇 가지.
그는 기후변화를 두고 교육을 통해 시민의식을 개선한다는 것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사회기반시설, 유동성, 산업 개편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비켜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부분을 문제점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에 맹점이 있다. 그 예로 로베르트가 환경을 위해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는 걸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짚는다. 사실 자동차의 연료 개선과 그에 따른 인프라를 고민하기보다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사고는 원시시대로 돌아가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삶을 살아가는 데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는 부분. 사회 구성원으로서 무엇보다 관계 맺기가 중요하다는 점을 따져보면 나처럼 비사교적이고 사람을 사귀는 스킬이 부족한(노력도 잘 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가는' 재능이 부족한 사람에 해당할 것이다. 어쩌면 피아노를 연주하고 요가를 하는 등 물리적인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일 테지만, 누구나 음악이나 운동에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듯 사교도 재능임을 인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비사교적인 성격이 고쳐야할 단점으로 취급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ㅡ 


이런 단순한 표현이 마음에 안 들지만 조금 무겁지 않을까하는 예상과는 다르게 무척 재미있다. 절대 좋아지지 않을 것 같은 츤데레 고테에게 점점 끌렸고, 우왕좌왕하는 서른여섯 살 도라가 귀여웠으며, 그녀에게 심하게 이입되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스탠딩 개그같은 상황이 눈앞에 그려져 웃음이 났다가, 눈살이 찌푸려지다가도 격하게 감동하고, 결국엔 눈물도 찔끔 흘리고.  


완독한지 닷새가 지났지만, 난 아직도 고테와 도라에게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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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27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양윤옥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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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사람을 항상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그냥 선생님이라고 하고 본명은 밝히지 않을 것이다. 세간에 이름이 알려질까 염려해서라기보다 그게 나로서는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반드시 '선생님'이라고 하고 싶어진다. 펜을 든 지금도 그런 기분은 마찬가지다. 데면데면한 알파벳 머리글자 같은 건 도저히 쓸 마음이 나지 않는다.』 



첫문단이다. 유난한 문장 없이 담담하기만 한 이 문장들에서 잔잔한 아련함이 묻어나고, 화자의 마음이 전해지며 절로 이입된다. 이러니 나쓰메 소세키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친구의 부름으로 어렵게 찾아간 휴양지에 어쩌다 혼자 남게 된 그는 바닷가에서 서양인과 함께 있는 선생을 처음 발견한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들을 지켜보던 화자는 왠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선생이 낯설지 않다. 며칠 후 선생이 떨어뜨린 안경을 주워 건넨 것이 계기가 되어 친해진 두 사람. 상대를 부를 마땅한 호칭이 없어 무심코 지칭한 '선생님'이 그의 호칭이 되었다. 자기의 감정과는 다르게 친밀감을 표현하지 않는 선생의 태도에 실망하는 화자. 그 이유가 자신에 대한 경멸감에 있음을 그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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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인의 사랑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장현주 옮김 / 새움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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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한 작품이 한 권일만큼 거의 읽지 않은 작가다. 얼마 전 역주행한 작품 덕분에(정작 그 책은 읽지 않았지만) 몇 작품 읽어보려던 차에 출간된 이 작품을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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