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하여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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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코로나 발발 후 팬데믹으로 인한 세상을 더는 이해할 수 없어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탈출하듯 시골 마을 브라켄으로 이사한 도라가 그동안 자신의 삶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서술한다. 그런데 수습생 시절부터 돌이키는 삶의 궤적이 단순한 개인적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내포함과 동시에 이를 비판하는 객관적 시선이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도라가 코로나로부터의 피난을 명분으로 시골로 향하지만, 실질적 이유는 도시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압박, 끝날 것 같지 않은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의 정신적인 생존 방책, 자신의 삶에서 탈출이었다. 그러나 도라를 기다리는 것은 낭만적인 귀촌 생활이 아닌 황무지를 정원으로 변신시키야 하는 장시간의 고된 노동이다.


읽다보면 점점 더 크게 느껴지는 건 코로나로 인한 폐해와 코로나 종식 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오랜 세월 지속되어 왔던 사회 저변의 심각한 문제들이 코로나로 인해 묻혀버리는 것에 대한 우려다. 작가는 코로나 시대에 뒷전으로 내팽겨쳐진 차별과 혐오, 이념 대립과 단절 등을 이야기한다. 



도라가 브라켄으로 이사하는 직접적 원인은 코로나를 대처하는 연인과의 의견 충돌로 비춰질 수 있지만 도시인이 갖는 경제 문제와 번아웃 등에 기인한다. 그는 시골 마을인 브라켄에서도 타인에 대한 고정관념, 인종 및 이민자, 성소수자 등의 사회 문제가 깊이 뿌리박혀 있음을 확인한다.  


도라조차 고테가 폴란드 이민자라고 여겼고, 도시인 기준으로 슈테펜의 호의를 오해했고, 건장한 톰을 보고 감자 농사를 짓는다고, 슈테펜의 외모를 보고 불법 작물을 재배한다고 단정했다. 또한 주변의 말만 듣고 브라켄을 극우주의 마을이라는 선입견을 갖은 채 보이는 대로 보기보다 무의식적로 보고 싶은대로 보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드러나 있는 고테의 모습과 숨겨져 있는 고테의 모습은 너무 다르다. 어쩌면 우리가 자주 입에 올리는 '다양'한 모습을 고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나치임을 주장하고 이민자 유입을 반대하지만 외국인 자체에 혐오가 없는 사람.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인 사람. 우리는 고테를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듯, 세상을 극우와 극좌,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원주민과 이주민 등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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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가 저항심이 드는 부분은 코로나로 인해 강제하는 규정 자체가 아니라 '생각의 강제'에 있다. 즉 규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닌 규정이 옳지 않다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도라는 팬데믹 발발 이후 세상에는 코로나만 존재하며, 코로나가 아닌 문제(전쟁, 난민, 빈곤 등)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버린 것에 안타까움을 나타낸다. 어떤 행위나 그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상대에 대한 충분한 경청과 납득, 그리고 이해와 설득의 과정이 우리 사회에 결여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경청을 동반한 대화와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살피고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에 대해 계속 의심해보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슈테펜이 말하는 '정통성을 알리는 비상 경보'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본문의 각주에 달린 대로 우리는 보통 '정통성'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정통성에 어긋나는 것은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음은 분명하다. 남성이고 동성부부인 두 사람이 화훼 사업을 한다는 설정이 참으로 적절하지 않았나 싶다. 극우주의 뿐만 아니라 극단적 이념과 신념을 지양하는 도라조차 그들의 관계와 직업을 처음에는 놀라워하는 것(물론 곧바로 아무렇지 않게 수긍한다)처럼 많은 이들이 '다양성' 혹은 '다름'에 대해 이론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 자연스럽게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크다.


고테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그의 말이 맞을까? 종차별, 성차별, 순혈주의, 제국주의, 팬데믹. 이렇게 미친 듯 돌아가는 세상을 '순리대로'라는 말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게 괜찮을까? 인류의 기득권을 위해 목적과 별개로 어떤 형태로든 인류를 제외한 생명체들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차라리 그의 말대로 내버려 두는 게 더 나은 것일까?  


모든 관계와 이념과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도라는 브라켄에 와서 더 의미있는 관계를 맺는다. 자신과는 전혀 반대적인 성향과 신념을 갖고 있었던 고테와 만나는 게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 도라. 이것은 알고리즘, 혹은 별자리가 매칭해주는 관계와는 사뭇 다른 관계 맺기다. 쓰면서 곰곰 생각해 보면 이들의 관계 맺기에는 기다림이 있다.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한 템포 쉬어가는 기다림. 나는 여기에서 내 의문의 답을 찾는다.











도라에게 공감했던 부분 몇 가지.
그는 기후변화를 두고 교육을 통해 시민의식을 개선한다는 것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사회기반시설, 유동성, 산업 개편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비켜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부분을 문제점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에 맹점이 있다. 그 예로 로베르트가 환경을 위해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는 걸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짚는다. 사실 자동차의 연료 개선과 그에 따른 인프라를 고민하기보다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사고는 원시시대로 돌아가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삶을 살아가는 데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는 부분. 사회 구성원으로서 무엇보다 관계 맺기가 중요하다는 점을 따져보면 나처럼 비사교적이고 사람을 사귀는 스킬이 부족한(노력도 잘 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가는' 재능이 부족한 사람에 해당할 것이다. 어쩌면 피아노를 연주하고 요가를 하는 등 물리적인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일 테지만, 누구나 음악이나 운동에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듯 사교도 재능임을 인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비사교적인 성격이 고쳐야할 단점으로 취급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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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단순한 표현이 마음에 안 들지만 조금 무겁지 않을까하는 예상과는 다르게 무척 재미있다. 절대 좋아지지 않을 것 같은 츤데레 고테에게 점점 끌렸고, 우왕좌왕하는 서른여섯 살 도라가 귀여웠으며, 그녀에게 심하게 이입되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스탠딩 개그같은 상황이 눈앞에 그려져 웃음이 났다가, 눈살이 찌푸려지다가도 격하게 감동하고, 결국엔 눈물도 찔끔 흘리고.  


완독한지 닷새가 지났지만, 난 아직도 고테와 도라에게 빠져있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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