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연인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2
찬 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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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의식적으로 생각해 본적은 없었는데 이번에서야 알았다. 나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중국문학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다는 것을. 책을 중간쯤 읽다가 "응...?" 이러면서 작가의 이력을 다시 찾아봤다. 1953년에 태어나 중국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는 사실과 소설의 독특함이 의외였다. 물론 환상과 실제의 경계를 오가며 마술적 리얼리즘을 표방한 소설은 많지만, 이것이 중국 현대 소설에서 보여졌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점점 당황스러워진다. 앞에서 언급한 몽환적 경계와는 별개로, 일단 500여 쪽에 달하는 소설에서 이렇다할 줄거리가 없다. 등장인물마다 어딘가에서 어떤 행위를 하는데, 왜 이러는지 표면적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서로에게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인물들 사이에서 보이는 공통점과 어느 지점에서 관계가 맺어진 그들의 연대, 그리고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는 모습에서 독자들은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런데 두 번 읽기에 돌입하면서 깨달은 점은 이 인물들이 흘러가는대로 자신들을 내맡겼듯 독자도 이들을 그저 따라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소위 '의식의 흐름'이라고 말을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무의식의 흐름'이 아닐까싶은 생각이 든다. 등장인물이 어느 순간 깊이 감추어져 있던, 혹은 잊고 있었던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듯 독자는 그들을 쫓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머리를 탁 울리는 문장들과 마주하게 된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몽환적 경계를 넘나드는데, 그 매개체는 각각 다르다. 존이 책을 읽는 동안 그 몽환의 세계로 넘어간다면, 마리아는 카펫을 짜는 동안 예지력에 가까운 마력을 발휘한다. 빈센트는 잠자는 동안 꿈을 통해 다른 세계로 옮겨가고, 리사는 남편의 꿈을 쫓아다닌다. 그리고 고아 출신 에다의 몽환적 경계는 그리움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들의 엇갈림이다. 빈센트는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여자를 찾아 헤매고, 리사는 그런 남편의 뒤를 쫓는데 두 사람은 간발의 차이로 항상 어긋난다. 존과 마리아는 각자의 관심사에 집중하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각성하는 순간, 한 발씩 늦다는 느낌이 크다. 이는 레이건과 에다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무엇을 찾고자하는지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헤매다가 그들이 종당에 대면하는 것은 그들의 과거다. 존은 아들이 장미꽃을 훼손하며 감정을 다 쏟다내는 모습을 보면서 어릴 적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에 의해 위축되었던 자신을 떠올린다. 마리아가 카펫을 짤 때 들리는 목소리는 그의 (조)부모들이고, 빈센트는 리사의 고향인 '도박의 도시'에서 그녀의 과거 삶으로 들어가서야 리사를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그동안 무심했던 자신을 탓함과 동시에 아내에 대한 연민을 깨닫고 사랑이 깊어진다.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을 짚어본다.
먼저 물항아리에 갇힌 황금거북의 이야기인데, 마을 사람들을 물항아리에 갇혀 죽음으로 가는 줄도 모른 채 주어진 먹이가 안정된 삶이라고 착각하는 황금거북에 빗대는 장면은 안정과 안주를 구분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이제는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음에도 '중산층'이라는 기준과 사회적 관습에 길들여져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릴라의 할머니는 마리아에게 존의 일은 그저 허울에 지나지 않으며 그는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릴라의 할머니가 있는 방은 너무 어두워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다. 지지할 벽을 찾고 있는 마리아에게 할머니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 자신의 실수를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피곤하면 그냥 자도 된다고 하면서. 텅 비고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는 '집'에서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공포감을 느끼는 마리아. 그러나 실상은 마리아의 오른손 쪽 가까이에 나가는 문이 있었다. 이 장면에서 나는 문득, 우리가 만은 부분에 있어 문을 열 수 있음에도 문을 열지 않는 것이 아닐까...? 마치 스스로 찾아온 공간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어디있는지 모르는 빈센트처럼 말이다.  



우리는 삶에서 늘 길을 잃을까봐 혹은 걷고 있는 길이 옳은 길인지를 두고 두려워한다. 길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길을 잃었다고 여겼던 것들이 실은 잃은 것이 아니라 경험과 과정이 쌓이는 배움이라는 것을 깨우친다면 우리는 쉽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후안 롤포의 <뻬드로 빠라모>가 생각나기도 하고,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 카프카의 <소송> 이 떠올려지기도 했다. 인물들이 실재와 환상의 경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측면에서 보자면 작가가 왜 '중국의 카프카'라고 불리는지 이해가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깊고 짙게 느껴졌던 감정은 쓸쓸함이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하나하나가 왜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던지 읽는 동안 어깨 너머로 찬바람이 지나가는 듯 했다. 



소설을 통해 사람은 기억을 통해 과거를 되돌릴 수 없고, 사랑없이 욕망만 남은 삶은 황무지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찬쉐. 그럼에도 미래를 향해야 한다는 작가의 메세지를 통해 나는, 우리는 각자 처한 위치와 소속을 떠나 그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야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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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의 선택 3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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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가 죽은 로마는 바람 잘 날이 없다. 술라 덕분에 모든 권력을 손에 쥔 원로원은 구심점 없이 많은 사공들로 인해 안정을 찾지 못했고, 속주에서는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로 하루가 멀다하고 속주민들의 읍소가 이어졌다. 대외적으로는 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가, 동방에서는 미트리다테스가, 이곳저곳에서는 해적이, 이탈리아에서는 스파르타쿠스가 군대를 일으키면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예상 범위를 벗어난 책략과 행동으로 문제 해결을 하며 상관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돋보였고, 폼페이우스는 권력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 원로원 의원직 이력도 없이 그토록 바라던 집정관, 그것도 수석 집정관에 선출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다. 물론 사이사이 카이사르 덕분에 찬물 한바가지씩 뒤집어 쓰기는 하지만.  









3권에서 독자들이 가장 흥미로워 할 부분은 단연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이다. 십만에 가까운 이탈리아인들이 스파르타쿠스를 지지하며 합류한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제 잇속만 챙기며 사회 전반에 산재한 문제들을 도외시한 정치적 불안정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무리에 합류하는 것을 본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자신의 편에 설거라고 확신했으나 어느 도시도 세르토리우스와 스파르타쿠스의 명분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에 반란군은 남쪽으로 이동하며 거치는 도시들마다 약탈했음에도 모든 도시들은 그에게 동참하지 않았다. '인간답게! 자유를 찾아서!' 라는 시작의 명분은 좋았으나 권력은 어쩔 수 없이 초심을 퇴색시켜버린다. 전쟁에서 오직 무력과 전투력만이 전부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 그의 결말. 스파르타쿠스가 도시를 약탈하고 사람들을 학살하는 순간, 그의 대의적 명분은 사라진 것이다.


두번째 흥미로운 지점은 앙숙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사이를 중재하는 카이사르의 지략이다. 일례로 폼페이우스가 대외적인 전쟁을 모두 마무리하고 집정관에 선출된 후 축제와 여흥거리를 만들어 대중에게 인기를 얻는 동안, 카이사르는 크라수스를 대중의 영웅으로 만들 계획을 실행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춘궁기에 서민들에게 나누어주는 구휼미격인데, 이 작전은 아주 멋지게 성공한다.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폼페이우스의 능력을 고려했을 때 그가 동시대 인물들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진다고 느껴졌던 이유를 알겠더라는. 그가 이룩한 업적들은 대의를 위한, 혹은 헌신에 입각한 구석이 단 한군데도 없다. 모든 전쟁과 시민을 향한 선심은 오로지 개인의 명성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일한다는 카이사르도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임에도 독자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폼페이우스는 꽤 가볍게 다뤄진다는 생각이 드는데, 로마사 문헌을 통해서는 이 부분을 크게 인지하지 못했었다. 과연 폼페이우스가 이토록 이기적인 사람이었을까싶은 의문이 들어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어쩌면 폼페이우스에게는 없는 정통 로마인이라는 자부심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세번째는 아우렐리아가 말한, 스스로가 아닌 남자들을 통해 자기 인생을 살아가며 성취를 이루는 여자들의 회한이다. 그중에는 아우렐리아 본인을 비롯한 세르빌리아가 있다. 그리고 쉰아홉 살 율리아의 죽음. 가장 위대한 로마의 일인자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내가 죽었으나 그 죽음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것이 로마 여성들의 삶이다. 카이사르는 이 여인의 죽음을 만천하에 알리면서, 그녀의 장례식을 통해 마리우스 일가를 애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율리아에게는 자식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애도조차 남자 조카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이... (그나마 율리아가 자신의 아들 다음으로 가장 사랑하는 조카였다는 사실이 위안이었을 터다). 더불어 카이사르는 대중에게 자신이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인식시켰다. 적어도 율리아에 대한 애도는 진심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술라를 비롯해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하다못해 탐욕스러운 베레스, 심지어 스파르타쿠스까지 3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너나할것 없이 자기들이 포르투나의 선택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승리를 쟁취한 이들은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갔다. 포르투나가 자신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끔.

삼십 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카이사르는 위대한 부동의 원동자로서 제일 앞자리에 서게 될 날을 위해 오늘도 배우는 중이다.  


 
사족.
1. 아시아 속주의 재정 문제와 미트리다테스로부터 니코메데스 왕의 딸 니사(이미 나이가 60대였다)를 고국의 어머니 품으로 돌려보낸 에피소드를 읽어보면 루쿨루스는 답답할 정도로 꽉 막히긴 했으나 나름 괜찮은 인물인 듯. 
2. 3부 내내 가장 악독하고 밉살스러운 베레스가 우리의 능력자 키케로에 의해 기소당했다. 그의 수석 변호인 호르텐시우스조차 기함하게 한 그의 약탈과 악행은 자진 추방으로 마무리되는데, 안타깝다. 감옥에 보냈어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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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2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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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문헌 중 가장 애정하는 두 권이 <도덕경>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나에게 있어 <도덕경>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근본적인 길잡이가 되어주었다면,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삶에 대해 사유하게 해준다. 물론 고대와는 다각적, 다차원적으로 달라진 현재이긴하지만 결국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해야하는 바는 상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최종 목적을 '행복'에 두고 그 과정에 있어서 인간에게 좋음, 미덕, 악덕, 정의, 즐거움, 사랑 등이 본질적으로 무엇이며 이것들을 어떻게 추구해야하는지 고찰한다.








 
이 책을  펼치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정치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소견과 중용의 미덕이다. 그는 가장 권위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최고 학문은 정치학이라고 꼽는다. 정치학은 한 국가와 각각의 시민이 필요로하는 모든 학문을 포괄하고 있기에 정치학은 인간에게 좋음을 추구하는 학문이 될 수 밖에 없다. 정치학은 정밀학문이 아니므로 절대적으로 참인 것이 아니라 대체로 참이라는 전제하에 살펴야 하며 이는 곧 대체로 참인 것에 도달할 수 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정치학을 배우는 목적은 지식에 있지 않고 행위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홀륭한 사람이 되기 어려운 것은 모든 일에서 중간을 찾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중용을 추구하는 것이 어렵다면 우선 중용과 더 대립하는 것에서 멀러 떨어지라는 충고를 하는데, 이것도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면 자신이 어떤 것에 쉽게 끌리는지 살피시라. 자신이 끌리는 것과 반대되는 쪽으로 스스로를 이끈다면 중용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용의 미덕은 책 전반에 꾸준히 언급된다.  


그렇다면 이 문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미덕은 무엇인가. 미덕은 감정과 행위와 관련이 있어 자발성과 비자발성을 구분해야 한다. 더 큰 해악을 당할 것이 두려워서 또는 어떤 고귀한 목적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가 비자발적인지 자발적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행위의 원인이 외부에 있고 강요당한 행위자가 원인에 전혀 관여할 수 없다면, 그 행위는 강요로 보인다. 무지 때문에 어떤 행위를 했지만 후회하는 사람은 비자발적으로 한 것이라고 본다면,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경우로, 자발적으로 하진 않았지만 비자발적인 것도 아니다. 자발적이냐, 비자말적이냐는 결국 행위 이후 가책과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일 터다. 


눈에 띄는 부분, 무지의 원인이 행위자에게 있다면 무지 때문에 한 행위에 대해서도 처벌을 받는데, 술에 취해 범죄한 사람에 대해 형벌을 두배로 가중해 처벌한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스스로 술에 취하지 않게 할 수 있었는데도 자신을 술에 취한 상태로 만들었고, 그렇게 술에 취한 것이 무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당연한 말씀인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감형을 해주는 현대법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절제는 즐거움과 관련 있는 중용이다. 식욕과 성욕은 개인의 고유한 부분인데, 본성적인 욕망과 관련한 잘못은 한쪽으로만 지나치게 치우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절제 있는 사람은 즐거움을 주는 것과 관련해 중간 위치에 있다. 즐거움(욕망)을 적절한 수순과 적절한 방식으로 행한다. 즉 절제를 벗어나 지나침으로 치우치게 되면 즐거움이 주는 본래의 가치는 의미를 잃는다는 말씀이다. 무절제는 비겁함보다 더 자발적이다. 무절제는 선택 대상인 즐거움과 관련해 생기지만, 비겁함은 회피 대상인 고통과 관련해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은 무절제다. 비겁함(비겁한 행위)는 각각 경우에서 자발성 정도가 다른 반면, 무절제는 거의 개별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무절제한 욕망은 이성적 사고력을 굴복시킨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겁함보다 무절제가 더 비난의 대상임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건강한 분노와 욕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듯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의는 법을 지키는 것, 공평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와닿았던 부분은, 가장 나쁜 악행은 자신에게 저지른 것이고, 가장 좋은 미덕은 남에게 행하는 것이라는 대목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과 훌륭한 시민이 다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우리는 전자의 경우 반대로 행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에 대한 구분이 없으니 말이다.   


그가 중용과 더불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실천적 지혜다. 실천적 지혜란 어떤 기술에도 속하지 않은 일을, 진지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잘 헤아리는 것이다. 기술에서는 어떤 나쁜 목적을 달성하려고 의도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일을 선택할 수 있지만, 실천적 지혜는 다른 미덕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선택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천적 지혜는 기술이 아니고 일종의 미덕이다. 실천적 지혜는 학문적 인식과는 다른 부분, 즉 의견을 만들어내는 부분에 따른 미덕이다. 의견과 실천적 지혜는 둘 다 변하는 것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성품은 망각될 수 있지만 실천적 지혜는 망각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다. 


학문적 인식 중에서 최고 형태가 곧 철학적 지혜다. 철학적 지혜는 직관적 지성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인식이고, 가장 고귀한 것에 대한 최고의 학문적 인식이다. 숙고를 잘하는 것이 실천적 지혜를 지닌 사람의 특징이다. 숙고를 잘하는 사람은 인간 행위를 통해 이루어낼 수 있는 것 중에서 최고의 것을 잘 헤어려서 이루어내는 사람이다. 실천적 지혜는 보편적인 것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것도 관대하여 알려고 한다. 실천적 지혜는 행위와 관련되고, 행위는 개별적인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실천적 지혜는 개별적인 것을 다루고, 개별적인 것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데, 경험을 충분히 쌓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나이가 젊으면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젊은이가 실천적 지혜를 지닌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고 말하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을 사랑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초독 당시에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그는 이 둘이 종종 다르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덕 혹은 미덕을 수반한 사랑이 삶에서 가장 필요할 뿐만 아니라 고귀하다고 얘기하면서 '친구'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눈에 띤다. 우리가 우정이라고 정의하는 것들을 시종일관 사랑의 범주에 포함시켜 서술하는데, 그에게 있어 사랑은 신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받기보다 사랑하는 것에 있다. 사랑이란 동등성과 유사성이고, 미덕을 지닌 사람들 간의 유사성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사랑의 동등성에 대해 생각이 깊어진다. 빈부, 외모, 성별, 권력을 힘으로 어느 한 쪽이 주도권을 갖지 않는 사랑 혹은 우정의 동등함. 이 부분에서 와닿았던 부분은 사랑하는 것이 감정이라면, 사랑은 성품이라는 것, 사랑과 정의는 서로 같은 것과 관련되고 서로 같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말씀.  



철학자는 행복은 여유로운 삶에 있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분주하게 일하는 것은 여유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이고, 전쟁하는 것은 평화롭게 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미덕에 따른 행위 중에서 정치적 행위나 전쟁과 관련된 행위가 고귀함과 위대함에서는 뛰어나다고 해도, 그런 행위는 여유로운 삶이 아닌 분주한 활동에 속하고,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둔다. 시민의 여유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전쟁 자체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이 말씀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사태와 맞물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자국의 안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 교육과 생활지도에 관련한 관심, 특히 공동의 돌봄은 법을 통해 이루어지고, 훌륭한 돌봄은 훌륭한 법을 통해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양육과 교육은 한 가정 혹은 개인의 차원이 아닌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임을, 그래서 더 정확하고 세밀한 개인적 돌봄과 국가적 돌봄이 보편적으로 확대되어 조화를 이루어야함을 그는 놓치지 않고 있다.  


철학자들에게는 정치적 학문은 있으나 정치적 경험이 없고, 정치인들은 지성적 사고가 아닌 어떤 종류의 능력과 경험에 기반해 정치한다. 정치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법을 만들 때에는 입법과 정치체제 전반을 검토해서 인간 철학을 완성하고, 수집해 놓은 정치체제를 토대로 잘잘못의 원인을 분석하고, 나아갈 방향을 살펴야 한다는 고대 철학자의 가르침이, 국내적으로는 갈 곳을 잃은 유권자의 권리와 국제적으로는 학살에 다름하지 않는 참혹한 지금 이 시국에 더욱 크게 와 닿는다.  


불의한 행위와 불의한 것, 정의로운 행위와 정의로운 것은 다르다. 정의든 불의든 실제로 행했을 때에만 불의(혹은 정의)한 행위가 되지만, 행하기 전에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고 불의(정의)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행하지 않는 정의는 진정한 정의라고 볼 수 있는가? 실천철학자로 불리는 그의 말씀을 더욱 새겨 읽을 때다. 




사족
정독은 출판사를 달리해서 두번째였고, 그동안 여러 출판사들의 책을 발췌독 해본 경험으로 가장 어렵지 않고 매끄럽게 읽히는 판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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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불빛이 붉게 타오르면 - 사르담호 살인 사건
스튜어트 터튼 지음, 한정훈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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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유럽 제국주의가 아시아까지 손을 뻗친 17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634년, 동인도회사령 바티비아에서 사르담호가 암스테르담을 향해 출항했다. 선주인 바티비아 총독 얀 하안과 그의 가족을 비롯해 각자의 목적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승선했다. 출항 전부터 시작된 불길한 조짐은 항해 첫날부터 30년 전에 발생했던 악마 올드 톰을 연상시키는 상징들이 곳곳에 나타나면서 내내 이어진다. 출항 이틀째 밤, 바타비아에서 출항한 동인도 선박은 일곱 척인데, 바다 위의 불빛은 여덟 개다.  


동인도회사의 비밀 지배 조직인 신사17인회에 합류하기 위해 바티니아를 떠나는 총독 얀 하안과 그의 아내 사라와 딸, 얀의 정부 크리지와 그녀의 어린 두 아들, 영문도 모른 채 죄수가 되어 이송되는 최고의 탐정 새미, 새미의 피고용인이자 절친인 용병 아렌트,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달바인 자작 부인, 신교 목사이자 마녀 사냥꾼 샌더, 샌더의 제자 이사벨, 얀의 최측근들, 그리고 거칠대로 거친 선원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악마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사르담호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폭풍우가 몰아닥첬고, 선원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폭풍우 속에서 사르담호는 살아남았지만 배의 상태는 뗏목과 다를 바 없었고, 항로를 이탈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얀은 항로 관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신사17인회에 갖다 바쳐야 할 '포세이돈'을 꺼내기로 하는데, 그 귀한 포세이돈이 사라졌다.  


새미는 왜 졸지에 죄수로 전락했을까?
죽은 문둥병자는 어떻게 살아나 사르담호에 탔을까? 
난장이 일등 항해사 라르메가 감추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샌더에게 죽은 피터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낸 자는 누구일까?
얀 하안이 진정 두려워하는 단 한 사람, 그는 누구일까? 
그리고 악마 올드 톰을 소환한 자는 누구인가!




 
소설은 촘촘한 추리 구도와 밀실 트릭, 오컬트적 요소까지 보이며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장면에서 긴장감을 유지한다.  


인간의 탐욕과 욕망이 곧 악마라는 주제로서 소설은 동인도 회사와 사르담호를 악마 올드 톰과 동일 선상에 놓으며 인간성을 망가뜨리는 죄악의 온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당시 여성의 불평등한 사회적 위치와 여자라는 이유로 부정당해야만 했던 삶을 얘기하면서 현재에도 그 잔재가 남아있음을 독자는 짐작할 수 있다.  


얀은 동인도 회사가 부富 뿐만 아니라 문명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피식민국이 문명을 받아들이는 대가는 학살이다. 이뿐만 아니라 얀은 30년 전부터 욕망을 이루기 위해 무차별한 살인을 저질러 왔고, 여성을 전리품과 자기의 신분을 높여줄 교환가치로만 취급하며 서슴없이 학대를 가한다.  


얀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아렌트다. 그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사라와 더불어 거의 유일하게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유력한 귀족 가문의 후계자임에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그저 소모품로만 인정했던 할아버지의 신념을 싫어했고,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자기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칼대신 괭이를 든 여자들을 보면서 성차별의 오류를 깨닫는다. 또한 경험을 통해 전쟁에 영광이나 명예 따위는 없음을 알고 있다.  


소설에서 눈에 띄는 또다른 부분은 사라와 그녀의 딸 리아, 크리지, 그리고 이사벨의 연대다. 재능과 능력을 숨기고, 폭력을 감수해야하는 네 여성들의 연대는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한다. 사건 해결에 있어 적극적이고 앞서 나가는 사람은 사라다. 그리고 리아와 크리지, 이사벨은 각자 가진 재능을 살려 능동적으로 사라를 돕고, 서로를 보호한다.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총독 얀을 포함한 남성들은 권력을 탐하거나 복종할 뿐 이타심은 거의 전무하다.  


아렌트가 유년 시절 기억하는 얀의 모습은 현재의 모습과 아주 다르다. 그는 다정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소년 아렌트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변한 건 첫 번째 욕망을 채우고 난 뒤였다. '나'의 욕망은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커진다. 그러나 그 허기는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얼핏 사르담호가 탐욕의 불구덩이로 보일 수 있겠으나 배는 배일 뿐이다. 아렌트 손목의 상처가 흉터에 불과한 것처럼. 그것을 특별한 존재로 각색한 것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소재로 한 소설은 너무 많아서 식상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요소가 가득해 식상함에 대한 우려는 넣어두어도 되겠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워낙 뿌려놓은 밑밥이 많고, 모두 회수되는 밑밥이기에 섣불리 내용을 건드리기가 조심스럽다. 일단 읽으시라, 재미있으니! 


아렌트의 생각처럼 지혜가 힘을 이기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더 안전하게 만드는 미래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바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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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다
최다혜 지음 / 씨네21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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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스 김지현, 비정규직 시간 강사 강은영, 프리랜서 이지은. 
작가는 이 세 인물을 통해 현재 우리 사회의 불안정한 고용 환경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자신의 책을 내고 싶지만 생계를 위해 외주에서 의뢰받은 그림만 그리기에도 퍽퍽한 매일이다. 학기마다 강의가 배정되지 않으면 당장 생활고에 시달려야하지만 경제적인 지원없이는 박사 학위까지 가기도 어려우니 교수 임용은 언감생심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과감하게 잘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밥값까지 아껴가며 그림 그리기를 이어가고 있으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이 그래픽노블은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다. 
당장에 소득이 없으면 생계의 절벽으로 내몰리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하고 싶은 일을 잘 하기란 어려운 환경이다. 스스로 먹고사니즘을 해결하면서 재능이 만개하기까지 버틸 수 있는 비정규직, 프리랜서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의 능력과 열정을 쉽게 폄하하고, 노력의 가치를 아무렇지 않게 훼손한다. 작가는 이렇듯 모든 성과를 개인의 노력으로만 치부하는 대중의 인식을 무례하다고 일침한다.  


부모의 재력이 능력으로 인정되는 세상에서 공정은 없다. 현재 우리의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불행이 네버엔딩스토리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제목이 참 역설적이다. 김지현, 강은영, 이지은이 처한 현실이 아무렇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회. 이러한 상황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흔한 일이라 아무렇지 않다면, 그 무례와 기만이 당연시 되어 아무렇지 않다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 아무렇지 않을 수 없어야 한다. 등장하는 세 젊은이는 그럼에도, 내일을 위해 한 발 더 나아가는 모습으로 문 밖으로 나간다. 이들의 뒷모습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독자는 나만이 아닐 것이다.  







 
수도권 밖 국립대를 졸업하고 학벌이 곧 얼굴이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제법 이름있는 대학에 편입한 후, 취직이 여의치 않자 대학원에 진학하고 졸업도 못한 채 수료로 학업을 마쳤을 때 친구의 나이는 서른이 넘었더랬다. 딱히 하고 싶은 일도, 해야겠다는 의지도 없는 친구는 지나친(?) 고학력으로 지금까지 변변한 직업없이 생활한다. 물론 사는 데 있어 불편함은 전혀 없다.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상 상경대에 진학해 학자금 마련으로 휴학을 밥 먹듯 한 친구. 어찌됐든 졸업 후 무난하게 취업에 성공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자신이 그림에 재능이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있다. 요즘 '가난'한 젊은이들은 이조차도 어렵겠지만.



지금의 어른들은 이제 막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자립'을 강조하고 있으나, 부모의 경제 능력이 대물림되고 노동 및 고용 환경이 불안정해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구조에서 자립은 곧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이 자립할 수 여건을 만들어 가는 것이야말로 사회구성원 모두의 책임일 것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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