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초상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30
헨리 제임스 지음, 정상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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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올비니에서 살고 있던 이사벨 아처는 영국 상류층 부인인 리디아 이모의 유럽 여행을 제안받고 영국으로 건너온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리디아 이모의 남편이자 은행가인 터치트 씨의 저택이다. 그곳에는 몸이 불편한 이모부 터치트 씨외에도 터치트 부부의 아들인 랠프가 살고 있고, 랠프의 친구인 워버턴이 자주 방문한다. 소설은 이들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19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자유와 주체적인 삶을 선망하는 한 젊은 여성의 사랑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인데, 등장하는 인물마다 예사롭지 않아 흥미롭다. 일단 리디아 터치트가 영국의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부터 독특하다. (중략)


리디아가 이사벨을 찾아가 대면하는 장면에서 나는 어쩐지 두 사람이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남편과 동일한 지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리디아가 이혼 대신 남편과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원만한 관계를 이어나간 것처럼, 이사벨은 리디아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행동하겠다는 약속을 할 수는 없지만, 피렌체에 데려가준다면 가능한한 이모의 말을 듣겠다는 모습이 유사하게 느껴진다.   


소설에서 표현된 당시 여성들의 모습은, '대개의 여자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어떤 운명을 제공해 주기를 다소 우아하고 수동적인 자세로 기다린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주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사벨을 비롯해 헨리에타, 마담 멀 등은 당시의 여성들과 사뭇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에서 키워드라고 한다면 결혼, 주체성, 정체성을 꼽겠다. 
당시 청혼을 하는 주체는 남성이고 대체로 여성은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인다. 물론 거절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남성의 경제력과 지위와 건강에 큰 흠이 있지 않으면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이사벨은 외모와 경제력, 사회적 지위 등 표면적으로 나무랄 것이 전혀 없는 두 남자의 청혼을 모두 거절한다. 일단 그녀는 두 남자를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물음표를 놓는다. 더하여 결혼으로 본격적인 인생을 시작하고 싶지 않고, 견문을 더 넓히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결론적으로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여기까지는 제인 오스틴 소설에서 흔히 보여지는 자아가 강한 여성상의 등장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결혼을 놓고 봤을 때 흥미로운 인물은 사실 헨리에타다. 


이사벨의 절친이자 기자이며 작가인 헨리에타는 그야말로 신新 여성이다. 언론계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자유롭고 자발적인 삶을 꿈꾸는 이 여성은 이사벨과 굿우드의 결혼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며 종용한다. 이사벨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녀가 머무는 주소를 허락도 없이 굿우드에 보내는가 하면, 이사벨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도의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마치 이사벨의 인생에 있어 다른 선택지는 불행을 가져다 줄 것처럼 말이다.  


헨리에타는 이사벨이 받은 유산이 측복으로 위장된 저주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 재산이 결국 이사벨을 망칠까 우려하는 그녀는 이사벨이 스스로 만든 이상적인 꿈의 세계에 지나치게 빠져있어 현실과 접촉하지 않고, 노동하며 분투하고 고통이 존재하는 세상을 도외시하다가 결국 몇 차례의 불편한 일들을 겪게 되면 자기의 환상을 잃을까 두려워 현실적인 세상의 문을 닫아 버릴 거라고 우려하면서 어떤 삶을 살든 그 삶에 영혼을 쏟아붓기를 바란다. 영혼을 쏟아 붓는 순간부터 그 삶은 낭만이 아니며 현실이 된다. 인생이란 때로는 누군가에게 마음에도 없는 즐거움을 주어야 하고, 때로는 불편을 감수하고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해야 한다. 그러한 불쾌함과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삶은 환상에 불과하고, 이사벨이 바로 이 환상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런 조언을 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굿우드와의 결혼을 주장하고 있다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은 헨리에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사벨도 마찬가지다. 자유를 우선하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그녀는 영국의 귀족과 상류층에 상당히 호의적이며, 워버턴이나 터치트 씨를 통해 보다 우월한 입장에서 사람들을 평가할 수 있는 존재, 즉 귀족성의 본질과 귀족적 위상을 목표로 삼는다. 인간 개개인의 삶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평소 이사벨이 추구하는 신념대로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사벨은 마담 멀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삼는데, 그 이유가 인생의 고통을 통과한 그녀의 삶인지, 아니면 어찌됐든 많은 다양한 상류층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우위에 있어 보이는 현재 그녀의 위치에 있는 것인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한 건 이사벨에게 있어 기본적인 소신은, 남녀가 관계를 맺는 데에 있어 서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여기며, 결혼을 함으로써 일상적인 기회와 위험, 다양한 경험들로부터 단절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ㅡ 


워버턴은 스스로를 스스로를 급진주의자라고 말하지만 귀족적 속성은 버리지 못한다. 워버턴이 지위와 권력에 준하는 재산과 권력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책임과 의무도 그에 못지 않기에 거기에서 오는 혼란 역시 크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도 모르는 그가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얘기하는 랠프는 워버턴이 비참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워버턴이 급진주의적인 생각이 꽤 멀리 나아가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멈추고 싶어해서 일관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터지트 씨의 의견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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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프는 언뜻 보기에는 그야말로 인간성 좋은 사촌 오빠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이 마담 멀 못지 않게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종을 앞둔 터치트 씨는 랠프에게 이사벨과의 결혼을 권하고, 랠프는 그녀를 사촌으로서 좋아하지만 여자로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한다. 랠프는 자기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들며 그녀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이사벨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고 얘기한다. 랠프는 결혼이라는 보상 없이 순수한 호의로 자기 몫의 유산 중 절반을 이사벨에게 주기를 바란다. 여기까지는 훈훈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사벨에 대한 랠프의 호의는 그녀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대리만족에 훨씬 가깝다. 랠프는 자신이 바라는 상상력의 욕구를 이사벨이 채워주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바로 이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마치 자기가 꿈꾸는 삶을 이사벨을 아바타 삼는다는 느낌이 크고, 랠프에게서 굿우드의 일방적 집요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해준다는 것 자체도 그녀에게 의사를 전혀 묻지 않은 상태에서 두 부자가 작당하듯 주고 받는 대화는 선의라는 허울을 뒤집어 썼을 뿐 그 시대 남성들에게 있는 권위적인 모습이 보여진다. 돈을 통해 자기가 이룰 수 없는 상상력의 욕구를 충족하겠다는 랠프의 모습은 얼마나 오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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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미국인'과 '영국인'의 차이가 자주 언급된다.
터치트 씨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정착한 인물로서 애국심으로 똘똘뭉친 헨리에타는 그에게 정체성에 대해 묻는다. 랠프는 정체성에 대해서 언어가 아닌 국민성에 있다고 말하고, 터치트 씨는 소속된 국가보다는 삶이 살아가는 곳이 어딘지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말한다. (중략)  


헨리에타가 미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게 조국을 '버렸다'고 표현하는데(사실 헨리에타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것도 납득은 안 된다), 과연 그녀가 미국의 이민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지 의문이다.  



유산 7만 파운드가 화근이 되어 마담 멀과 오즈먼드가 작당해 이사벨과 결혼하려고 한다. 로마에서 재회한 워버턴. 로마까지 쫓아온 오즈먼드. 이때까지 읽은 것으로 보아서는 소설이 막장으로 흐를 것 같지는 않다. 이사벨이 과연 결혼을 할 것인가, 한다면 누구랑 할 것인가에 촛점이 맞춰진다면 이 소설의 재미와 가치는 반토막이 나고 말 것이다. 여러 이유에서 결론이 무척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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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1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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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8년부터 시작되는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 4부 「카이사르의 여자들』은 카이사르가 장년으로 접어든 서른두 살 무렵부터 10여년간을 다룬다. 1권을 다 읽은 시점에서 보자면 제목이 왜 '카이사르의 여자들'인지 충분히 납득이 간다.  



1권은 세르빌리아ㅡ카이사르의 관계, 폼페이우스의 해적 전쟁을 중심으로 술라가 만들어 놓은 체제가 흔들리면서 야기되는 정치적 변화들을 밀도있게 다룬다. 특히 앞으로 다가올 삼두정치의 주인공이 될 크라수스ㅡ카이사르ㅡ폼페이우스의 관계 맺기에 있어 두 사람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줄타기가 흥미롭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눈에 띄는 몇 가지는 먼저, 루쿨루스가 티그라노케르타를 공격하는 대목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탁사타를 억지로 잡아온 그리스인 주민들로 채웠다. 인종적으로 메디아인에 해당하는 백성들을 그리스식으로 교화하기 위한 티그르네스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는 문화 및 언어가 그리스화되는 것이야말로 문명화 되는 것임을 의미했음이다. 메디아 문화를 따르고 그리스어를 모르는 것은 열등하고 원시적인 상태이기에 그리스인을 납치해 온 것. 이 대목은 로마 제국 초기에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에 열등의식을 가졌던 것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재밌었다.  


두 번재는 마닐리우스의 법안이다. 이 법안은 로마 시민권을 보유한 해방노예들을 기존처럼 수부라와 에스퀼리누스 등 수도 트리부스 두 개에 국한시키는 대신 서른다섯 개 트리부스 전체에 고루 분포시킬 것을 요청한 것인데, 이는 원로원 의원들과 상급 기사들에게 적접적인 영향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닐리우스의 기획 법안은 큰 중요성을 지녔다. 로마의 해방노예들이 서른다섯 개 트리부스에 고루 배치된다면 그들로 인해 트리부스 기반의 각종 선거와 입법 결과가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 내재된 위험은 해방노예들이 로마 시내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러므로 마닐리우스 법안은 완패당할 수 밖에 없었고, 완패 당했다. 이 법안이 눈에 들어온 이유는 현재 국회에서 계류되고 있는 수많은 법안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명분은 로마의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머리를 맞대고 제 잇속 챙기기에 바쁜 그들과 현재의 그들이 겹쳐지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최고 신관 선거를 앞두고 카토는 원로원 의원으로서 고액 채무가 있는 카이사르를 감찰관에 고발하는 것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지만 정통(?) 로마인이자 보수 원로원 의원인 세 사람은 파트리키인 카이사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없다고 못박는다. 이 부분 역시 현실적인 문제보다 혈통을 따지며 카이사르를 '우리'의 범위에 넣으면서도, 변방 노예 출신 태생인 카토와 머리를 맞대고 있는 그들의 모순이 우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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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아우렐리아의 조언이 빛을 발한다. 카이사르에게 그녀만한 조력자가 또 있을까싶고, 그러한 존재가 어머니라는 사실은 더없는 행운일 터다. 카이사르는 수많은 정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유일한 혈육인 어린 딸은 그의 부족한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재혼한 아내 폼페이아 덕분에 조만간 카이사르는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카이사르의 대중적 유명세는 사실상 정치적.군사적 능력보다는 출중한 외모와 화려한 스캔들 때문이라고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웅크릴수록 더 멀리 뛸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미트리다테스 왕, 새끼 똥돼지 메텔루스 등 한시대를 거쳐왔던 인물들이 사망했다. 마리우스, 술라와 함께 한 시대를 장식했던 그들의 죽음으로 한 세대가 저물었다. 그야말로 다음 세대의 본격적인 부상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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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지는 말들 - 사회언어학자가 펼쳐 보이는 낯선 한국어의 세계,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백승주 지음 / 타인의사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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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2020년부터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 여러 매체에 쓴 글들, 논문, 에세이 등을 함께 묶은 책이다. 말하는 대상에 닿으려 할수록 그 대상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말들에 대한 사유다.  









말에는 본래 국가도 없고 국경도 없다. 그러나 '한국어'라는 단어에는 '언어=영토=국민'이라는 구도가 내재되어 있고, 이 구도를 통해 한국 영토 안에 거주하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동일한 하나의 한국어, 즉 표준어를 사용한다는 환상이 구축된다. 이렇게 지역방언과 외래어는 일상어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저자는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를 욕망에 둔다. 인간은 언어로 사회를 구성하고, 구성한 사회는 변하며, 사회 구성원들이 처한 새로운 관계와 환경에 따라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신조어를 통해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 추구하는 가치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생한 축약어 역시 마찬가지며, 한글을 문자 놀이로 삼고 있는 야민정음 또한 한글의 형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으로써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다.  


언어학은 노동하는 인간의 언어에는 관심이 없다. 언어학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본을 움직이는 자들의 언어, 자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언어, 또는 자본을 대변하는 국가의 '정상 언어'이다. 본래부터 언어학은 근대 부르주아 국민국가의 국가 장치로 기능해 왔다는 것인데, 대목을 읽다보니 불현듯 조지 오웰의 <1984>가 생각난다. 규정된 최소한의 언어만 사용 가능하고, 그 이외에는 전혀 용납되지 않는, 국가적 차원의 언어 단일화. 이 유사한 맥락의 느낌은 좀 무섭기까지 하다. 


뉴노멀, 그린 뉴딜 등 고상한 언어들이 끊임없이 변신을 하는 이유는 착시 효과를 일으켜 부조리와 불평등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똑같은 노동 하에서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는 차별을 정당화하고, '플랫폼 노동'은 자발적 착취를 가능하게 한다. 국가와 자본은 정기적으로 흔들어대는 그럴듯한 구호 아래 노동 현장의 사람과 언어의 죽음은 변함없이 묻힐 것이다. 과연 불순한 언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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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인들이 빚어내고 있는 말들의 지형은 혐오와 차별의 언어다. 문제의 심각성은 청소년들이 실생활 곳곳에서 이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무의식적으로 교육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공 구조물에 불과한 현재 언어의 지형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통해 누구라도 혐오의 대상자가 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 재난의 피해자가 순식간에 가해자로 돌변하는 세태를 떠올려보면 혐오가 가져오는 상처와 고통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혐오는 특정 대상자의 것이 아니다.  


분노에 대한 얘기가 인상적이다. 분노는 순수한 감정이고, 우리는 분노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작금에 분노는 순수가 결여된, 인터넷 산업이 생산하는 공산품이 되었다. 거간꾼들은 실재를 왜곡하고 편집해 증오 사회를 조장하고, 기다렸다는 듯 분노를 판매한다. 그 안에는 어떠한 진실도, 진정성도 없다. 가짜나 실수가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넘어서 이제는 가짜가 보편화되는 세상이 될까 우려스럽다. 


텍스트 유형은 세상의 정보를 틀에 맞추어 받아들이게 하는 사회적 인식 틀이다. 그래서 혐오의 헛소리가 구체적이고 규격화된 텍스트 유형의 꼴을 갖추어 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이 걱정된다. 잘못 인식된 틀이 상식으로 작동하는 사회는 함께 고민해야 하는 사회 문제들을 일방적인 관점에서 가공 및 소비된다. 일례로 현대의 인종차별은 소수자를 노골적으로 비하하는 방식이 아닌, 차별받는 소수자의 부정적인 부분을 반복해서 부각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이 방식은 교묘하고 차별을 행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정의로운 일을 행하고 있다는 믿음을 준다. 이는 최종적으로 침묵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차별은 체계이기에 우리는 차별하지 않으면서도 차별한다. 체계로서 차별을 작동시키는 역학의 핵심은 차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차별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두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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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교실에서 배우는것은 힘에 굴종해야한다는 사실 뿐이다. 진짜 질문은 묻는 이가 자신이 묻는 내용에 대한 답을 정말로 모르는 경우다. 그렇기에 교사의 질문은 진짜 질문이 아니다. 우리는 질문으로 비난, 요구, 강요, 감탄 등 모든 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 저자는 교사가 수업 시간에 질문과 답만 오갔다면 그건 인간 시험지 역할을 한 것 뿐이라고 일갈한하면서, 시험은 응시자의 자율을 보장하기에 느슨해 보이지만,사실은 강력한 정신적 통치 장치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시험이라는 틀로 평가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전적으로 신뢰했던 시험 왕국이 무너지면 남는 건 폐허 뿐이다.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한국어 교실. 이 모순의 고실에서 시험 공화국 한국 사회가 품은 욕망과 부조리가 그대로 재현된다. 가르침과 배움이란 공동체 안에서 함께 몸을 통과해 얻는 것이다. 학습이란 추상적인 지식의 묶음을 전달받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와 상호 개입 같은 실행을 통해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온라인 대중 강의가 대체로 실패하는 이유는 공동체의 부재에 있다. 언제 어디서나 학습할 수 있다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된다는 말과 같으며 학습자는 시청자로 전락한다. 교육이란 결국 사람이 서로를 살펴야 하는 일, 사람의 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라는 말에 크게 공감하는 바다.  



읽으면서 나 역시 언어에서만큼은 '단일'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많은 부분에서 동감했고,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들을 짚어갈 수 있어서 꽤 유의미한 읽기였으며 단순한 읽기를 넘어서 언어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립해가는 과정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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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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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와 동시대를 살다가 서른네 살의 나이로 요절한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 선집이다. 읽어본 바, 더 많은 시간 동안 작품 활동을 했다면 버지니아 울프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실린 열여섯(미완 포함) 편의 소설은 광기와 살인, 연애와 사랑, 가족애와 모성애, 여성이 갖는 존재의 의미, 사회적 약자를 향한 편견어린 시선, 인간의 오만 등을 현실적으로 구현한다. 









그저 피곤하지 않은 아이가 되고 싶을 뿐인 어린 소녀, 어디에서든 성폭행의 노출로부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젊은 여성, 사랑은 둘이 하건만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육체적.정신적 부담을 짊어져야하는 대부분의 여성들, 강요되는 전통적 여성성, 이분법적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선의의 본질, 다람쥐 쳇바퀴 돌듯 달라질 것이 없는 권태로운 인생, 존재의 의미에 대해 되짚게 하는 황혼, 쓸모와 자유 안에서 갖는 삶의 의미 등 누가 겪어도 이상하지 않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사실적이면서도 감성적으로 다가간다. 또한 독자는 이러한 일상적이고 소박한 표현에서 우러나는 섬세한 감정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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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만에서> <인형의 집>으로 이어지는 연작이 인상적이었는데, 현대인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을 짧은 분량 안에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정숙하고 순종적인 여성성, 그리고 동경하는 이상적인 사랑과 본능적 욕구 및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베럴. 전업주부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갈구하는 린다. 삶의 조수에 저항하지 않고 선선히 따르는 것이 인생의 순리라고 말하는 조너선의 말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베럴이나 린다에게 얼만큼 공감이 가능한지 되묻게 된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경제적 능력이 부재하다는 이유로 일상의 무게를, 그리고 출산과 임신의 부담을 여성은 혼자 짊어져야 한다. 본능이라고 여기는 모성애의 부재에 대한 여성의 죄책감. 인생에 있어서 '절대'라는 단어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 인생을 보내야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는 조너선은 한 번 뿐인 인생을 소모하는 것이 안타깝다. 자신의 삶이 일반적인 죄수의 삶과 큰 차이가 없으며 다른 점이 있다면 본인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갔고, 아무도 꺼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개탄스러워하지만, 그 역시 벗어날 용기는 없다. 


<인형의 집>에서 보여지는 학교 내 학생 차별 및 따돌림 현상은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다. 집안을 들먹이며 경계선을 만들어 놓는 것은 어른들이고, 인형의 집을 구경하기 위해 아첨하는 어린 소녀들의 모습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힘있는 자들에게 기생하는 그들의 부모(불특정 다수의 어른)를 연상케 한다. 켈비네 아이들에게 인형의 집을 보여주면 안 되냐는 어린 키지어의 말에 당연히 안 된다고 대답하는 린다의 모습에서 대다수 사회 구성원을 볼 수 있었고, 답답함을 느꼈다.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느끼는 어린 키지어가 결국 린다와 같은 어른으로 성장할 거 라는 사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상대의 약점을 잡아 매몰차게 상처를 입히는 어린 소녀들의 모습이 더 이상 아이의 것이라고 할 수 없어 안타깝다. 더하여 베럴이 조카가 보는 앞에서 켈비 자매를 닭 쫓는 내몰며, 냉랭하고 거만한 자세로 고작 허리춤도 오지 않을 아이들에게 "당낭 나가!"라고 말하는 장면은 잔인하고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이처럼 이 두 연작은 가정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와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겪게 되는 딜레마,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보통 사람들의 폭력적인 시선과 그 안에서 발생하는 부조리 등을 자연스럽게 녹여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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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대부분, 자기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의 경험담에 혼자만의 생각으로 예전의 시선으로 아내를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은 해먼드 씨('낯선 사람')처럼, 전투적이고 고달픈 삶을 토로하는 파커 아주머니 앞에서 자기 도취에 빠져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문학가('파커 아주머니의 인생')처럼, 상대에 대한 연민도, 인류애도 아닌 그야말로 선의를 베푸는 자기만족 즉 나르시시즘으로 차 한 잔 값을 구걸하는 여인을 충동적으로 집에 데려가는 로즈메리('차 한 잔')처럼, 우리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이입이 부재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캐서린 맨스필드는 이러한 인간 세상을 때로는 호러로, 때로는 감성적으로, 때로는 냉철하게 그려냈다. 이와같이 여러 색깔로 삶을 써내려가는 작가가 요절했다는 것이 애석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그의 글이 그리워질 듯 하다. 




♤ 출판시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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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5-1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의와 나르시시즘의 차이는 이해와 이입이라는 말씀 공감합니다.

사율 2022-05-12 15:26   좋아요 1 | URL
공감 감사합니다. :)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 개정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이혜승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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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미국으로 이주한 나보코프가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준비한 강의록을 그의 사후에 출간한 책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기 전 강의 대상으로 이 작가들을 선정한 이유와 그 배경을 설명하며,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작가 개개인의 삶도 간단하게 짚는다. 문학적 전통이 전무했던 러시아가 영문학과 프랑스 문학의 빛나는 성과에 견줄 수 있는 시기는 19세기이며, 이같은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19세기 러시아의 정신적 성장과 관련된 다른 분야에서도 비정상적인 속도로 오래전 서구 국가들이 이루었던 문화 수준을 달성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19세기 러시아에는  소비에트 시대에 고안된 방식이 없었기에 가능했다고 진단한다. 





 




나보코프의 고골에 대한 평가가 눈에 띈다. 고골(은 우크라이나 출신이다)은 러시아를 잘 몰랐기에 그의 작품 <검찰관>과 <죽은 혼>은 당시 러시아를 반영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고 말한다. 러시아의 급진주의 비평가들은 그의 희곡과 소설 속에서 뇌물과 문란한 삶, 국가의 부당함과 농노제에 대한 비판과 혁명을 발견했으나 겁을 먹은 고골이 이후 작품부터는 종교적 전통과 향토적이며 신비주의 작품을 쓰면서 혁명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중략)  


나보코프의 고골에 대한 강의를 읽고 있자니, 살짝 맥이 빠진 느낌이었던 <죽은 혼> 2부와 작년에 읽은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가 떠오른다. 우크라이나 지역의 옛이야기같은 느낌이 강한 이 소설집을 처음 읽었을 때 이전의 고골 작품들과는 다르다고 느꼈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이 작품들이 의외가 아니었던 건가 싶고. 오히려 이 전 작품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편견어린 의미 부여를 했던 건 아닌가라는 생각에 <죽은 혼>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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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그야말로 투르게네프에 대해서는 독설만 남겼다. 재미있는 점은 평단의 혹평(저자를 비롯한)에도 불구하고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독자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가 사망했을 당시 그의 묘지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하는데, 나보코프는 투르게네프가 부드러운 시적 아름다움, 그리고 러시아 여성상을 높게 정립하는 데 기여한 부분에 그 이유를 둔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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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가 언급한 작가 중 예술가로서 가장 낮잡아 평가하는 도스토옙스키. 도스도옙스키의 강의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나보코프가 그를 왜 작가로서 평가절하하는지 납득이 된다. (중략)


불후의 예술, 천부적 재능이라는 관점으로 문학에 접근하는 나보코프의 입장에서 보면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작가가 아니다. 훌륭한 유머가 번득이긴 하나 문학적 진부함이라는 평범한 작가에 불과하다. 나보코프는 감상과 감성의 차이를 얘기하면서 도스토옙스키가 보이는 감상주의란 자동적으로 독자의 연민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는 친숙한 감정을 비예술적으로 과장한 것이라고 평한다. (중략)


예술가가 창조하는 세계는 완전히 비현실적일 수 있다. 다만 '개연성'이라는 절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나보코프는 도스토옙스키에게는 개연성이 부족하고, 그렇다보니 설득력이 떨어져 작품 속 인물들에게 온갖 구실을 끌어다 붙인다고 독설한다. (중략)


그는 마지막으로 도스토옙스키가 소설가라기보다는 극작가에 가깝고, 그의 작품은 소설이라 치면 조각조각 산산이 부서지고, 연극이라 치면 지나치게 길고, 산만하고, 균형이 안 맞는다고 평가한다. 나보코프의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그가 왜 도스토옙스키에게 그토록 인색한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나보코프가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라고 칭하는 톨스토이.(중략) 나보코프는 톨스토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위대한 작가들의 개인사를 들추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짚어냈다. (중략) 톨스토이는 예술 작품을 통해서건 설교를 통해서건 수많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진실에 도달하기를 갈망했으며, 톨스토이는 진실, 그리고 예술과 하나였다. 무엇보다 톨스토이는 절대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를 더 중시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중략) 


나보코프는 다루는 작품 중 <안나 카레니나>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면서 애정어린 시선으로 시간 배열에 따라, 인물에 따라 아주 세밀하게 분석한다. 또한 형상화, 비유(직유와 은유), 이에 못지 않은 직접적 진술이 얼마나 풍성하고 적절하게 사용되었는지, 해설까지 포함해 설명한다. 나보코프는 톨스토이의 작품 중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가장 예술적이고, 가장 완벽하며, 가장 정교하다고 평가한다.


나보코프는 톨스토이가 등장인물들의 삶에 지속적으로 개입해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말을 걸었음에도, 그의 걸작들 안에서 작가는 보이지 않았고, 그 결과 감정적 중립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그래서 작가가 그 작품 자체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나는 <전쟁과 평화>에서도, <안나 케라니나>에서도 톨스토이가 너무 자주 보였다(심지어 톨스토이가 서술자로 뛰어들었다는 느낌이 든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작품이 작가 그 자체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결론은 같으나 접근이 다르네). 아무튼 나보코프가 짚어낸 것처럼 톨스토이가 감정적 중립성을 지켜냈다는 것에 대해 동감한다.  



(중략) 나보코프는 고리키와 체호프의 차이를 얘기한다. 러시아 농민들에게 조금의 인내와 친절을 베풀어 주면 세상이 변할 거라고 믿었던 순진한 겁쟁이 지식인이자 설교자였던 고리키, 반면 체호프는 등장인물을 교훈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고 인물을 미덕의 전형으로 만들지 않았다. 즉 고리키가 인물과 인물의 대사에 상징성을 부여했다면 체호프는 그저 등장인물의 삶과 성격에 들어맞는지만을 중요시했다.  


러시아 비평가들은 체호프의 문체와 단어 선택에는 특별한 예술가적 천착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는데, 체호프가 고골 같은 어휘 발명가가 아닌 것은 사실이나, 탁월한 어휘 기술과 세밀한 문장의 굴곡 없이도 완벽한 예술가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평한다. 이것이 체호프 예술의 마법이라면서(이점에는 동의!). 나보코프는 체호프의 작품들을 가능한 한 자주 읽으라고 권한다.  



나보코프는 고리끼가 창조적 작가로서는 실패했지만, 러시아 사회 구조를 극명하게 대변한 하나의 현상으로서의 삶은 주목할 만하다고 말한다. 고리키가 쓴 모든 문장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스며 있다. (중략) 고리키의 삶을 예술가보다는 혁명가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듯 하다.



책은 무척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다룬 작품들을 거의 다 읽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리키의 작품을 읽지 않은 채 강의 내용을 읽어도 마찬가지인 걸 보면, 그리고 발췌문의 분량이 상당해 읽는 데에 있어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듯 하다. 거침없는 나보코프의 입담(글담이라고 해야 하나?)과 작가와 작품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이르는 꼼꼼한 설명과 분석으로 인해 가독성이 무척 좋다. 그리고 작가별 문체의 특징도 서술하는데, 비교해가면서 읽는 맛도 쏠쏠하고 무엇보다 문체의 특징이 그들 각자 삶의 결과도 흡사하다는 느낌도 흥미롭다.


전 시대를 통틀어 푸시킨은 논외로하고, 1위 톨스토이, 2위 고골, 3위 체호프, 4위 투르게네프라는 순위까지 정하는 것도 모자라 분별력 있는 푸시킨, 냉철한 톨스토이, 차분한 체호프라는 수식어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에 도스토옙스키를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나보코프의 그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인지 알겠더라는.  


체호프 편에서 체호프가 수다스러운 작가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심하게 수다스러운 도스토옙스키가 떠오르는 건 우연일까? 번외로 실린 [속물과 속물 근성]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진정한 독서가인지 돌이켜 보는 시간도 잠깐 가졌다.


개인적으로 강의 문집이 이렇게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밌는 경우는 몇 안되는 것으로 기억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애정하는 독자라면 빈정이 상할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일단 읽어보시라. 나름 공감하는 부분이 클 수도 있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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