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지는 말들 - 사회언어학자가 펼쳐 보이는 낯선 한국어의 세계,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백승주 지음 / 타인의사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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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2020년부터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 여러 매체에 쓴 글들, 논문, 에세이 등을 함께 묶은 책이다. 말하는 대상에 닿으려 할수록 그 대상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말들에 대한 사유다.  









말에는 본래 국가도 없고 국경도 없다. 그러나 '한국어'라는 단어에는 '언어=영토=국민'이라는 구도가 내재되어 있고, 이 구도를 통해 한국 영토 안에 거주하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동일한 하나의 한국어, 즉 표준어를 사용한다는 환상이 구축된다. 이렇게 지역방언과 외래어는 일상어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저자는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를 욕망에 둔다. 인간은 언어로 사회를 구성하고, 구성한 사회는 변하며, 사회 구성원들이 처한 새로운 관계와 환경에 따라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신조어를 통해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 추구하는 가치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생한 축약어 역시 마찬가지며, 한글을 문자 놀이로 삼고 있는 야민정음 또한 한글의 형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으로써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다.  


언어학은 노동하는 인간의 언어에는 관심이 없다. 언어학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본을 움직이는 자들의 언어, 자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언어, 또는 자본을 대변하는 국가의 '정상 언어'이다. 본래부터 언어학은 근대 부르주아 국민국가의 국가 장치로 기능해 왔다는 것인데, 대목을 읽다보니 불현듯 조지 오웰의 <1984>가 생각난다. 규정된 최소한의 언어만 사용 가능하고, 그 이외에는 전혀 용납되지 않는, 국가적 차원의 언어 단일화. 이 유사한 맥락의 느낌은 좀 무섭기까지 하다. 


뉴노멀, 그린 뉴딜 등 고상한 언어들이 끊임없이 변신을 하는 이유는 착시 효과를 일으켜 부조리와 불평등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똑같은 노동 하에서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는 차별을 정당화하고, '플랫폼 노동'은 자발적 착취를 가능하게 한다. 국가와 자본은 정기적으로 흔들어대는 그럴듯한 구호 아래 노동 현장의 사람과 언어의 죽음은 변함없이 묻힐 것이다. 과연 불순한 언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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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인들이 빚어내고 있는 말들의 지형은 혐오와 차별의 언어다. 문제의 심각성은 청소년들이 실생활 곳곳에서 이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무의식적으로 교육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공 구조물에 불과한 현재 언어의 지형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통해 누구라도 혐오의 대상자가 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 재난의 피해자가 순식간에 가해자로 돌변하는 세태를 떠올려보면 혐오가 가져오는 상처와 고통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혐오는 특정 대상자의 것이 아니다.  


분노에 대한 얘기가 인상적이다. 분노는 순수한 감정이고, 우리는 분노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작금에 분노는 순수가 결여된, 인터넷 산업이 생산하는 공산품이 되었다. 거간꾼들은 실재를 왜곡하고 편집해 증오 사회를 조장하고, 기다렸다는 듯 분노를 판매한다. 그 안에는 어떠한 진실도, 진정성도 없다. 가짜나 실수가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넘어서 이제는 가짜가 보편화되는 세상이 될까 우려스럽다. 


텍스트 유형은 세상의 정보를 틀에 맞추어 받아들이게 하는 사회적 인식 틀이다. 그래서 혐오의 헛소리가 구체적이고 규격화된 텍스트 유형의 꼴을 갖추어 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이 걱정된다. 잘못 인식된 틀이 상식으로 작동하는 사회는 함께 고민해야 하는 사회 문제들을 일방적인 관점에서 가공 및 소비된다. 일례로 현대의 인종차별은 소수자를 노골적으로 비하하는 방식이 아닌, 차별받는 소수자의 부정적인 부분을 반복해서 부각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이 방식은 교묘하고 차별을 행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정의로운 일을 행하고 있다는 믿음을 준다. 이는 최종적으로 침묵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차별은 체계이기에 우리는 차별하지 않으면서도 차별한다. 체계로서 차별을 작동시키는 역학의 핵심은 차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차별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두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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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교실에서 배우는것은 힘에 굴종해야한다는 사실 뿐이다. 진짜 질문은 묻는 이가 자신이 묻는 내용에 대한 답을 정말로 모르는 경우다. 그렇기에 교사의 질문은 진짜 질문이 아니다. 우리는 질문으로 비난, 요구, 강요, 감탄 등 모든 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 저자는 교사가 수업 시간에 질문과 답만 오갔다면 그건 인간 시험지 역할을 한 것 뿐이라고 일갈한하면서, 시험은 응시자의 자율을 보장하기에 느슨해 보이지만,사실은 강력한 정신적 통치 장치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시험이라는 틀로 평가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전적으로 신뢰했던 시험 왕국이 무너지면 남는 건 폐허 뿐이다.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한국어 교실. 이 모순의 고실에서 시험 공화국 한국 사회가 품은 욕망과 부조리가 그대로 재현된다. 가르침과 배움이란 공동체 안에서 함께 몸을 통과해 얻는 것이다. 학습이란 추상적인 지식의 묶음을 전달받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와 상호 개입 같은 실행을 통해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온라인 대중 강의가 대체로 실패하는 이유는 공동체의 부재에 있다. 언제 어디서나 학습할 수 있다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된다는 말과 같으며 학습자는 시청자로 전락한다. 교육이란 결국 사람이 서로를 살펴야 하는 일, 사람의 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라는 말에 크게 공감하는 바다.  



읽으면서 나 역시 언어에서만큼은 '단일'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많은 부분에서 동감했고,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들을 짚어갈 수 있어서 꽤 유의미한 읽기였으며 단순한 읽기를 넘어서 언어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립해가는 과정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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