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초상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30
헨리 제임스 지음, 정상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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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올비니에서 살고 있던 이사벨 아처는 영국 상류층 부인인 리디아 이모의 유럽 여행을 제안받고 영국으로 건너온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리디아 이모의 남편이자 은행가인 터치트 씨의 저택이다. 그곳에는 몸이 불편한 이모부 터치트 씨외에도 터치트 부부의 아들인 랠프가 살고 있고, 랠프의 친구인 워버턴이 자주 방문한다. 소설은 이들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19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자유와 주체적인 삶을 선망하는 한 젊은 여성의 사랑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인데, 등장하는 인물마다 예사롭지 않아 흥미롭다. 일단 리디아 터치트가 영국의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부터 독특하다. (중략)


리디아가 이사벨을 찾아가 대면하는 장면에서 나는 어쩐지 두 사람이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남편과 동일한 지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리디아가 이혼 대신 남편과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원만한 관계를 이어나간 것처럼, 이사벨은 리디아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행동하겠다는 약속을 할 수는 없지만, 피렌체에 데려가준다면 가능한한 이모의 말을 듣겠다는 모습이 유사하게 느껴진다.   


소설에서 표현된 당시 여성들의 모습은, '대개의 여자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어떤 운명을 제공해 주기를 다소 우아하고 수동적인 자세로 기다린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주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사벨을 비롯해 헨리에타, 마담 멀 등은 당시의 여성들과 사뭇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에서 키워드라고 한다면 결혼, 주체성, 정체성을 꼽겠다. 
당시 청혼을 하는 주체는 남성이고 대체로 여성은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인다. 물론 거절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남성의 경제력과 지위와 건강에 큰 흠이 있지 않으면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이사벨은 외모와 경제력, 사회적 지위 등 표면적으로 나무랄 것이 전혀 없는 두 남자의 청혼을 모두 거절한다. 일단 그녀는 두 남자를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물음표를 놓는다. 더하여 결혼으로 본격적인 인생을 시작하고 싶지 않고, 견문을 더 넓히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결론적으로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여기까지는 제인 오스틴 소설에서 흔히 보여지는 자아가 강한 여성상의 등장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결혼을 놓고 봤을 때 흥미로운 인물은 사실 헨리에타다. 


이사벨의 절친이자 기자이며 작가인 헨리에타는 그야말로 신新 여성이다. 언론계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자유롭고 자발적인 삶을 꿈꾸는 이 여성은 이사벨과 굿우드의 결혼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며 종용한다. 이사벨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녀가 머무는 주소를 허락도 없이 굿우드에 보내는가 하면, 이사벨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도의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마치 이사벨의 인생에 있어 다른 선택지는 불행을 가져다 줄 것처럼 말이다.  


헨리에타는 이사벨이 받은 유산이 측복으로 위장된 저주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 재산이 결국 이사벨을 망칠까 우려하는 그녀는 이사벨이 스스로 만든 이상적인 꿈의 세계에 지나치게 빠져있어 현실과 접촉하지 않고, 노동하며 분투하고 고통이 존재하는 세상을 도외시하다가 결국 몇 차례의 불편한 일들을 겪게 되면 자기의 환상을 잃을까 두려워 현실적인 세상의 문을 닫아 버릴 거라고 우려하면서 어떤 삶을 살든 그 삶에 영혼을 쏟아붓기를 바란다. 영혼을 쏟아 붓는 순간부터 그 삶은 낭만이 아니며 현실이 된다. 인생이란 때로는 누군가에게 마음에도 없는 즐거움을 주어야 하고, 때로는 불편을 감수하고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해야 한다. 그러한 불쾌함과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삶은 환상에 불과하고, 이사벨이 바로 이 환상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런 조언을 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굿우드와의 결혼을 주장하고 있다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은 헨리에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사벨도 마찬가지다. 자유를 우선하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그녀는 영국의 귀족과 상류층에 상당히 호의적이며, 워버턴이나 터치트 씨를 통해 보다 우월한 입장에서 사람들을 평가할 수 있는 존재, 즉 귀족성의 본질과 귀족적 위상을 목표로 삼는다. 인간 개개인의 삶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평소 이사벨이 추구하는 신념대로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사벨은 마담 멀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삼는데, 그 이유가 인생의 고통을 통과한 그녀의 삶인지, 아니면 어찌됐든 많은 다양한 상류층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우위에 있어 보이는 현재 그녀의 위치에 있는 것인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한 건 이사벨에게 있어 기본적인 소신은, 남녀가 관계를 맺는 데에 있어 서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여기며, 결혼을 함으로써 일상적인 기회와 위험, 다양한 경험들로부터 단절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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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버턴은 스스로를 스스로를 급진주의자라고 말하지만 귀족적 속성은 버리지 못한다. 워버턴이 지위와 권력에 준하는 재산과 권력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책임과 의무도 그에 못지 않기에 거기에서 오는 혼란 역시 크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도 모르는 그가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얘기하는 랠프는 워버턴이 비참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워버턴이 급진주의적인 생각이 꽤 멀리 나아가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멈추고 싶어해서 일관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터지트 씨의 의견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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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프는 언뜻 보기에는 그야말로 인간성 좋은 사촌 오빠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이 마담 멀 못지 않게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종을 앞둔 터치트 씨는 랠프에게 이사벨과의 결혼을 권하고, 랠프는 그녀를 사촌으로서 좋아하지만 여자로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한다. 랠프는 자기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들며 그녀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이사벨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고 얘기한다. 랠프는 결혼이라는 보상 없이 순수한 호의로 자기 몫의 유산 중 절반을 이사벨에게 주기를 바란다. 여기까지는 훈훈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사벨에 대한 랠프의 호의는 그녀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대리만족에 훨씬 가깝다. 랠프는 자신이 바라는 상상력의 욕구를 이사벨이 채워주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바로 이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마치 자기가 꿈꾸는 삶을 이사벨을 아바타 삼는다는 느낌이 크고, 랠프에게서 굿우드의 일방적 집요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해준다는 것 자체도 그녀에게 의사를 전혀 묻지 않은 상태에서 두 부자가 작당하듯 주고 받는 대화는 선의라는 허울을 뒤집어 썼을 뿐 그 시대 남성들에게 있는 권위적인 모습이 보여진다. 돈을 통해 자기가 이룰 수 없는 상상력의 욕구를 충족하겠다는 랠프의 모습은 얼마나 오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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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미국인'과 '영국인'의 차이가 자주 언급된다.
터치트 씨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정착한 인물로서 애국심으로 똘똘뭉친 헨리에타는 그에게 정체성에 대해 묻는다. 랠프는 정체성에 대해서 언어가 아닌 국민성에 있다고 말하고, 터치트 씨는 소속된 국가보다는 삶이 살아가는 곳이 어딘지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말한다. (중략)  


헨리에타가 미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게 조국을 '버렸다'고 표현하는데(사실 헨리에타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것도 납득은 안 된다), 과연 그녀가 미국의 이민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지 의문이다.  



유산 7만 파운드가 화근이 되어 마담 멀과 오즈먼드가 작당해 이사벨과 결혼하려고 한다. 로마에서 재회한 워버턴. 로마까지 쫓아온 오즈먼드. 이때까지 읽은 것으로 보아서는 소설이 막장으로 흐를 것 같지는 않다. 이사벨이 과연 결혼을 할 것인가, 한다면 누구랑 할 것인가에 촛점이 맞춰진다면 이 소설의 재미와 가치는 반토막이 나고 말 것이다. 여러 이유에서 결론이 무척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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