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의 장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8
윌리엄 허드슨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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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문명인과 야생 소녀의 열정적이고 순수한 사랑 이야기라고 읽힐 수 있지만, 소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소녀 리마는 15미터 정도의 높은 나무와 그 사이, 그리고 온 숲속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며 종횡무진 자유롭게 누빈다. 거미줄로 짠 옷을 입고 맨발로 다니는 것은 예사이고, 동물을 형제와 가족이라고 여기기에 절대로 육식을 하지 않는다. 자연은 시시각각 다채로운 존재로서 이름이 하나일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작은 잎사귀부터 곤충, 물소리, 벌의 날갯짓 소리, 새소리 등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하고, 아벨에게 입이 아닌 눈으로 말하라는 리마는 자연, 그 자체다.   


리마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아벨의 열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의 감정으로 옮겨가고,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사색하던 아벨은 자신이 변했으며, 이 변화로 인해 도시에서의 인공적인 삶이 참된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진짜 삶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면서 오염된 문명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두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싶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다. 리마는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악마의 딸로 상징된다. 그래서 추장 루니와 그의 아들은 아벨에게 부탁해 리마를 죽이려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악마의 딸과 교류하고도 아무런 이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매번 죽을 위기를 넘기고 살아 돌아온 아벨까지 적대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죽이려 든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리마를 죽이고자 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아벨이 '녹색의 장원'이라고 명명한 숲에서의 사냥 때문이다. 인디언들이 리마를 두려워하는 듯 하지만, 실상은 아벨을 만나기 전까지 숲 바깥 세상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채 인디언들로부터 늘 목숨을 위협받아 온 리마야말로 고립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였다. 



리마는 자아에 대해 각성하면서 자신과 같은 존재, 어머니의 종족을 찾아 세상에 나아가 아벨과 함께 온 세상을 둘러보고 싶어 한다. 아벨은 리마의 안전과 그녀가 실망할 것을 우려해 숲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구 만류하지만, 그의 본심은 과연 그것 뿐이었을까. 아벨은 리마를 향한 열망이 점점 더 커진다. 처음에는 그녀를 생각하고 함께 하는 꿈만으로도 행복했는데, 갈수록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이 앞선다. 이러한 아벨의 열망은 앞서 사냥 욕심으로 인간을 죽이는데 서슴치 않는 인디언, 금과 땅을 차지하고자 원주민을 학살하고 탐욕에 눈이 멀어 무리 안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백인들과 같은 선상에 있다. 명분이 다를 뿐이다. 이는 리마를 중심으로 인간의 욕망과 제국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소설의 마지막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여정을 견디며 아벨이 지키고자 했던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인류가 사랑만큼이나 지켜야할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단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과야나를 떠난 후 식량이 떨어지고 몸도 쇠약해져 광기만 남은 아벨에게 리마의 환각이 찾아와 당신은 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안심하라고, 또한 아벨 삶의 몫은 그의 것이니 스스로를 용서하고 살아가라고 말한다. 아벨이 공개석상에서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하는 자신의 변호는 이념적.정치적으로 대립하며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물질 만능주의에 매몰되어버린 세상에 대한 비판이다. 자연을 훼손하고, 생명을 경시하며, 탐욕과 욕망에 눈이 멀어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우리를, 리마는 용서하라고 말한다. 


'나'를 용서할 수 있고 면죄할 수 있는 것은 기도도, 선행도, 금욕도 아닌 나 자신이며, 우리의 영혼을 위무할 자도 바로 우리 자신 뿐이라는 것. 리마가 절망으로 인한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누풀로의 청원을 듣고 가까스로 회생하는 장연은, 아직은 우리에게 기회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더 늦지 않게 지구의 자연과 사랑의 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애달픈 리마와 아벨의 사랑 이야기를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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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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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편의 작품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늑대 인간, 환경 오염, 복제 인간, 지구 멸망, 해리성 인격 장애, 좀비, 인공지능, 가정폭력, 우주 전쟁 등의 소재를 SF, 판타지, 미스터리, 공포 등 다양한 방식을 취해 그려내고 있다.  







 
인류를 구원한 불가해한 존재의 존속 여부를 두고, 제 이기에 맞춰 취하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온갖 허울 좋은 명목으로 감시와 통제를 가하는 모습을 소설은, 웃어야만 했던 아이와 웃음이 죄가 되었던 아이를 통해 우리가 삶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며, 진정으로 두려워해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도리어 인간 세계를 잠식한다. 인간을 모방한 존재는 또다시 인간이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고, 인류는 오히려 원시적인 삶으로 회귀하는 방법을 선택하지만, 그들은 보란듯이 가축의 위치에 놓여진 인간을 가차없이 학살한다. 만약 독자가 이 소설이 불편하다면 아마도 바티카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길게 놓고 봤을 때 죽으면 그뿐인 인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다정하다, 착하다, 성실하다, 정직하다, 라는 평가는 더 이상 칭찬이 아니다. 세계는 
많이 갖고 야무지고 똑똑하고 경쟁력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누군가 죽어나가도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세상. 새벽 안개로 인해 야생동물을 치고 숨이 남아 있는 동물을 버려둔 채 피해가는 자동차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상처와 슬픔을 외면한다. 마치 <이름 없는 몸>의 화자가 외면리에 들어가는 것을 말리지 않는 버스 운전사처럼.



수록된 작품들의 공통하는 키워드는 '이름(존재)', '기억', '공유', '삶'이 아닐까. 자신의 삶을 지키고 싶은 이들이 다른 세계를 꿈꾸지 않아도 되는 세상, 억울하게 혹은 아프게 죽어간 이들에게 정치적.이념적 프레임을 씌어 악용하지 않으며 함께 애도할 수 있는 마음이 왜 이렇게 어렵기만 한건지. 종종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진실이나 상대를 이해한다는 착각이 아닌 애도의 시간이다.


안일하고 무책임한 태도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고.사고들이 난무한 사회에서 좀금은 덜 경쟁적이고, 덜 적대적이면 좋겠다. 열 편의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애와 지구 생명체의 공존. 


작품들마다 하나하나 짚어가면 써내려가다 모두 지웠다. 이 소설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누가 읽어도 분명하다. 우리가 정작 읽어야할 것은 소설 속 그들의 마음과 이 책을 펼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어야할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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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 미래의 문학 10
새뮤얼 딜레이니 지음, 공보경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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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2년, 레드 가문은 우주여행이 시작되던 시절부터 사업을 해왔고, 지구에 확고하게 기반을 두고 드라코의 시스템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본 레이 역시 플레이아데스 연방 내에서 영향력이 대단한 가문이다. 그 두 가문이 일리리온 7톤을 먼저 차지하려고 경쟁이 붙었다. 우주선 '록호'의 선장 로크 본 레이는 일리리온 7톤을 레드 가문보다 먼저 차지하기 위해 신성까지 장거리 여행을 함께 할 사이보그 승무원을 모집하고, 이에 집시 출신 떠돌이 마우스, 소설가 지망생 케이튼, 쌍둥이 형제 이다스와 린케우스, 커플 세바스티안과 타이이와 그들의 애완 동물 새 여섯 마리가 합류한다. 그들은 신체의 기능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여정에 몸을 싣는다.  









소설은 로크, 마우스, 케이튼의 시점에서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진행하고, 과학 뿐만 아니라 역사, 신화, 전설,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가 어우러져있다. 정체와 변화, 사라진 국가적.세계적 연대, 그 자리를 대신한 사이비 행성 간의 전통 속에서 목표없이 부유하던 이들이 신성을 통해 얻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32세기 전全 우주적 공통된 문화 형상은 플러그와 소켓이다. 그 장치가 인간 기능의 연장선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모든 사회 계층이 받아들였다. 소켓 미설치자들은 평범하게 소켓을 달고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불안하게 하고,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 여긴다. 주로 지구인들 중에 미설치자들이 있는데, 프린스가 소켓 미설치자라는 설정은 자칫 지나치기 쉬우나 소설이 후반부로 갈수록 로크와의 대조를 이루는 하나의 장치이기도 하다.  


작가는 클라크와 소쿠엣의 출현을 통해 현대 사회를 짚어낸다. 클라크와 소쿠엣이 출현하기 전까지 인류의 노동은 일반적으로 사무실에 출근해서 일을 하고 급료를 받았다. 하지만 노동자가 일하는 장소와 그 사람이 남은 하루를 보내는 방식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1차산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점점 줄어들어서 사람들 대다수는 노동 방식과 살아가는 방식 사이의 괴리가 점점 커져갔다. 산업혁명이 거듭될수록 그 폭의 크기는 더 커지고, 기술 사회가 크게 발전할수록 인류의 노동과 생활 방식은 돈 문제를 제외하면 직접적인 관계가 없게 된다. 인간은 일을 통해 무언가에 변화를 가하고 그 변화에 성취감과 존재감을 갖게 마련이다.  


작가는 산업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탈脫 노동화가 아닌 노동에 직접적 참여에 대해 얘기한다. 이처럼 30세기에 인류를 다시 노동하는 인간으로 설정한 것은 이 소설이 출간됐던 현대 사회의 노동이 개인의 심리적 만족과 정신적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의미하며 좀더 노동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자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물론 21세기에는 그마저도 박탈당한 사람이 더 많지만). 더불어 물질 위주의 사회와 돈을 좇아 유목민처럼 살아가며, 한편으로 사회의 문화적 견고함의 결여와 이에 따른 역사와 전통의 붕괴를 지적한다. 작가는 모든 것을 융합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짚으면서 그 상징을 집시 청년 마우스의 시링크스에 두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마우스의 시링크스 연주는 음악을 듣는 것에서 보는 것, 체험하고 느끼는 것으로 확장시키며 아름다움을 더한다.   


소설에서 재미있는 소재 증 하나가 타로다. 이 타로점을 통해 로크의 앞날을 암시하는데, 그의 앞날은 곧 그와 생사를 함께 하는 이들과도 관계가 있다. 로크는 케이튼에게 상대를 이해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고, 케이튼은 대대로 뿌리내려온 정신과 개인의 성장 환경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는 훨씬 앞서 마우스가 자신의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성찰과 같은 연장선에 있다. 즉 과거에 의해 현재의 모습이 된 것처럼, 현재의 모습이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 따라서 우리가 더 집중해야하는 것은 미래의 설계에 앞서 현재의 성찰과 각성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프린스는 아무 잘못이 없는 브라이언을 죽였고, 로크는 본의 아니게 댄을 죽게 만들었다. '그들 중 누가 더 괴물에 가까울까?'라는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으려나. 소설은 일리리온을 쟁취하기 위한 인간의 욕망과 탐욕에 대한 그저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타로점에서 보여지듯 인간은 타인의 영향없이 오롯이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영향'이 어떤 형태이든 간에.  


마우스와 케이튼을 비롯한 로크에게 고용된 승무원들은 목표 없이 떠도는 존재들이었다. 로크를 만남으로써 비록 혼란스럽지만 목표와 질서를 부여받았다. 소설 속 케이튼의 말은 목적 없이 시류에 따라 집시처럼 떠도는 우리네 모습을 대변한다. 우리는 과연 인생을 제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들여다보고, 느끼며 살고 있을까. 


읽어왔던 SF소설과는 조금 다른 결의 작품이다. 초판이 출간된 1960년대의 사회를 반추하는듯 하지만,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삶을 영위해야할지를 이야기하면서 종단에는 다양한 분야를 접목시켜 예술과 문학로 마무리하는,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이 재기발랄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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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1~3 세트 - 전3권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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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카이사르의 여자들>이지만,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로웠던 대목은 세 가지다. 


먼저 '원로원 최종 결의'와 카이사르의 '토지 법안'이다.
당시 로마의 정치 상황과 술라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 아주 면밀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부분임에도 흥미롭게 읽혔다


다음은 키케로와 키케로의 정치 생활이다. 2권이 정말 재미있는데, 도대체 내가 일던 그 키케로는 어디에 간 건지... .  이런저런 책을 통해 키케로가 입(혀라고 해야하나)을 조심하는 편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실수가 잦았을 줄이야. 물론 소설이다보니 보태진 상상이 있겠으나 그것을 감안해도 보니파와 폼페이우스의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끼어 우왕좌왕하는 그의 처지는 한 편의 코미디같다. 부풀려진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감안하고 키케로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보는 시간이 즐거웠다.  



느닷없이 든 쓸데없는 생각은... 만약 카이사르가 율리아와 브루투스가 결혼하게 놔두었더라도, 먼 훗날 그의 칼날이 카이사르에게 향했을까. 그러다 또 율리아가 장수하지 못했으니 어차피 마찬가지의 결과였겠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간혹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을 보면 과거의 변화가 미래를 바꾸는 듯 하지만 결과를 놓고 봤을때 역사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그래서 어차피 카이사르는 그렇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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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
이종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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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편 일곱 작품이 실린 소설집이다. 
여성의 가족, 직장, 관계에 있어서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긴장과 공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소설에서의 오컬트 요소와 공간에서 오는 음산함은 독자가 섬뜩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나는 표제작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과 실린 작품 증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커튼 아래 발>, 그리고 <언니>가 인상적이었다. 


술 취한 남자가 휘두른 빈 쇼핑백에 젊은 남자가 사망했다. 쇼핑백 안에는 과연 아무것도 없었을까? 현장 목격자인 진아가 빈 쇼핑백에 맞아서 죽은 남자를 잊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외상이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피가 철철 흐르는 모습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녀 역시 남편이 휘두르는 보이지 않는 빈 쇼핑백에 맞고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 그 빈 쇼핑백 안의 내용물은 휘두르는 사람에 따라, 혹은 피해자에 따라 달라질 터다. 분노, 증오, 외로움, 상실, 고통, 절망 등 대상을 가지리 않는, 보이지 않는 폭력에 우리는 얼마나 두드려 맞고 사는지.  


가족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충격과 고통, 상실감도 클텐데, 범인이 자기를 스토킹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살아 남은 자에게 죄책감까지 지운다. 스토커를 두고 '특별히'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어떤 조처도 취해줄 수 없다는 경찰의 말, 얼마나 특별한 해를 끼쳐야 사건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살펴보려나. 


어린시절부터 강박증이 있는 엄마의 부당한 편애 피해자인 딸은 마흔 살이 되도록 상상할 수 없는 언어폭력을 당한다. 마흔 살 딸이 운신도 자유롭지 못한 일흔 살 엄마한테 가정폭력을 당한다면 누가 믿기나 할까? 중년의 딸은 엄마를 위해 자기가 얼마나 큰 것을 포기했는지 몰라주는 것에 대해 서러워 새벽까지 울지만, 엄마가 그녀에게 포기하라고 요구한 적은 없다. 엄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녀는 누구의 강요도 없이 결국 엄마를 선택했다. 왜일까?  


노년에 접어든 남자에게 자신은 당신과 다르게 살 거라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비정규 계약직을 전전하는 현재의 삶에 미래는 막막하기만 하다. 죽어서도 밥벌이 터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네 인생이여.  


ㅡ 


혐오와 질투, 동경, 편견, 콤플렉스 등 욕망을 흔드는 감정들. 그리고 여기에서 오는 스스로에 대한 불편함과 자괴감 등 작가는 독자가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 안에서 일어나는 여성 혐오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볼 필요성을 갖게 한다. 


귀속말로 들리는 낯선 목소리, 철창 같은 거울, 커튼 밑으로 보이는 두 개의 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DM. 이들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구속과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들과 일상에 스미듯 부유하는 공포를 상징한다. 


​언제까지 욕망을 스스로 거세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좀더 나은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기의 무능함을 탓하며 스스로를 학대해야하는 걸까. 또한 가정과 직장 내 혹은 여타의 관계에서 조여오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 걸까. 폭력과 학대를 가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또한 '맞을 만한' 사람은 더더욱 없다. 우리를 불안과 공포로 밀어 넣는 일은 누군가 던진 아주 사소한 한 마디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잊지 않기를.  


책을 덮고 나니 처음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을 읽었을 때가 기억났다.
오랜만에 대놓고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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