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하이웨이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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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매일매일이 특별한 날. 



여중.여고를 거치면서 그 흔한 선생님에 대한 동경을 가져본 적도, 유명인을 대상으로 팬을 자처해본 적도 없는 내가 짝사랑한 사람이 있었으니 <모스크바 신사>의 로스토프 백작이었다. 그 기억이 여전히 생생해 작가의 신작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에밋
1954년 6월 12일, 에밋 왓슨은 15개월의 복역을 마치고 윌리엄스 원장과 함께 설라이나 소년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3개월 일찍 돌아온 에밋에게 남겨진 것은 아버지의 빚이었고, 그 빚을 상환하기 위해서 여덟 살 동생 빌리를 데리고 조만간 집을 비워줘야한다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형제에게 빚만 남긴 건 아니었다. 에밋의 1948년형 스튜드베이커 랜드크루저에 숨겨져 있던 편지 한 장과 현금 3천 달러를 유산으로 남겼다. 

 
더치스 / 울리
윌리엄스 원장의 차에 몰래 숨어들었던 더치스와 울리. 설라이나에 있어야할 두 사람이 에밋의 앞에 나타나서 기껏 한다는 얘기는, 울리의 증조부의 별장에 설치되어 있는 금고 안에 울리가 상속받을 현금 15만 달러가 있으니, 그 돈을 빼내어 3둥분하자는 것. 별장은 항상 6월 마지막 주말 동안만 개방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돈을 빼내올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런데 뉴욕까지 타고갈 차량 소유주인 에밋이 이 계획에 동참할 의사가 전혀 없다. 그리고 현금 15만 달러의 주인인 울리가 정작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   



 빌리가 아버지의 사망 후 그의 방에서 찾아낸 그림 엽서 아홉 장. 그 엽서들은 어머니가 집을 나간 직후에 보낸 것들로서 아들들을 수신자로 하는 어머니의 필체가 적혀 있었다. 엄마가 보내왔던 엽서는 링컨 하이웨이가 통과하는 지역이다. 캘리포니아로 가면 엄마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빌리의 기대감과 자신의 실수와 과오, 그리고 무기력한 아버지에 대한 적대적인 기억이 남아 있는 곳에서 떠나고 싶은 에밋의 바람이 합쳐져 왓슨 형제에게 거의 유일하게 남은 스튜드베이커에 몸을 싣고,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로 향하고자 한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복병과 사건이 발생하고 그들은 캘리포니아와 정반대 방향인 뉴욕으로 차머리를 돌린다. 


ㅡ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때로는 사건을 제3자의 입장에서, 때로는 그보다는 좀더 가까운 입장에 이입되어 관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주요 인물들이 열아홉 살 전후로 매 사건에 부딪칠 때마다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성장소설이면서 동시에 당시 시대를 통해 현재의 우리 모습을 함께 조명하고 있다.  


울리는 기숙학교와 감옥을 비교하면서 그 두 곳의 공통점이 대상을 관리하기에 쉽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훌륭한 직장인을 생산해 내기 위함임을 짚는다. 특히 울리가 사회성이 부족하고 때로는 사회 부적응자로 비춰진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구성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지 않음을 새삼 각성하게 된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점은 주인공 에밋의 입장에서 뭔가 한발짝씩 어긋나는 느낌이지만 결국 그들이 가야할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는 읽으면서 "아, 이런..." "안돼!"를 중얼거리다가 어느 순간에 이 난처한 상황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에밋을 따돌리려고 했던 더치스가 빌리를 데리고 의도치 않게 에밋이 있던 곳으로 오게되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에서 악인은 없다(존 목사가 악인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그에 대한 히스토리가 깊지 않으니 독자는 이 또한 장담할 수 없다). 더치스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 누명을 썼고, 타운하우스는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죄를 뒤집어 썼으며, 울리는 선행이라고 여겼던 행위가 불상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에밋은 단 한 번의 실수가 최악의 불운이 되었다. 그들이 새로운 인생을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의 키맨은 여덟 살 소년 빌리 왓슨이다. 
율리시스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가족의 가치를 깨달았으나, 가족을 잃은 후 희망 없이 사는 부정적인 삶의 방식만을 취하다가 자신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갖고 있는 율리시스왕의 이야기를 빌리로부터 듣게 된 뒤 희망을 품고 싶어진다. 기적같은 만남으로 빌리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책 속에서 존재하는 모험을 넘어서 현실의 인생을 개척하고자 노년에 과감하게 펜을 던져버린 애버커스 교수의 새로운 시작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외에도 빌리는 낙담하는 사람들에게 의도와 사심이 없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그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빌리는 자신이 크세노스라고 생각한다. 평범하고 소박한 우리 주변 인물로서 이름이 밝혀지지않는, 보통의 사람. 그러나 항상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나타나서 필수적인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 실제로 이 소설에서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관지어 고민을 던지면서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도록 하는 매개체다.  


소설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들은 엇길린 길 위에서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알아가며, 선입견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타인을 판단해 왔던 것들에 대해 반성한다. 여러 사람을 대면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그들. 우리가 타인과 어우러져 사는 데에 필요한 미덕은 용서라는 메세지가 깊게 와닿는다.  


이를 이미 알고 있었던 울리와 빌리, 그리고 세라. 그래서 울리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이들 중 가장 가슴 아파할 사람은 세라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도시든 사람이든 버려두고 방치하면 안 될 터. 샐리의 바람처럼 자신이 하는 행위가 오로지 스스로를 위한 삶이 될 수 있는 세상이기를, 과거의 잘못된 사슬을 과감히 끊고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이러한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서로에게 아낌없이 박수쳐줄 수 있는 모두가 되기를 바람한다. 



811쪽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소설을 읽으면서 단 한 장도 지루하지 않았다. <스토너> <모스크바의 신사> 에 이어 머릿속에 꽉 박힐 소설이 될 듯하다. 



599.
다시 희망할 수 있는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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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와 잠수복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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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를 얘기할 때면 다수의 독자들이 <공중그네>를 떠올리는데, 나에게 있어 그의 대표작은 <남쪽으로 튀어> 다. 호쾌, 통쾌, 유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진한 페이소스가 소설 전반에 가득했던 그의 작품이 최근에는 훈훈한 인간애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아내의 외도로 당분간 별거를 결정하고 곧 철거를 앞두고 있는 바닷가 마을의 낡은 빈집을 단기 임대해 머물게 된 무라카미 고지. 조기 퇴직 권고를 거부해 교외 공장의 위기관리부에 발령이 난 다섯 명의 중년 남자들. 지명 1순위로 프로구단에 입단했으나 부상과 성적 저조로 슬럼프에 빠지며 2군에만 머물렀던 남자친구 다무라 유키가 입단 4년만에 상승세를 타면서 올스타 명단에 이름이 오르자 위기감을 느낀 아사노 마이코. 자신이 코로나에 감염됐다고 확신해 스스로 자가격리에 들어가고, 잠수복을 입은 채 생활하는 야스히코. 55세가 되자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젊은 시절 너무나 갖고 싶었던 1980년 초대 피아트 판다를 사기로 결심한 고바야시 나오키. 


ㅡ 


아는 후배는 결혼 생활을 자식 때문에, 혹은 의리로, 혹은 정으로 지속하는 건 별로라고 했다. 결혼이든 연애든 영원히 열정적이기만한 사랑이 있을까? 쉽지 않은 세상의 풍파를 함께 견뎌온 사람이라면 그 이름이 의리든 우정이든 사랑이든 함께 할 가치는 충분하지 않으려나... .


그야말로 청춘을 다 바친 회사에서 사실상 지명 해고를 당한 중년의 다섯 남자들은 복싱을 하면서 잊었던 청춘의 기억을 떠올린다. 기업은 설득과 타협, 상생의 과정없이 가장 손쉬운 해고를 선택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비인간적인 처우로 해고 대상자의 모멸감을 자극하는 가혹한 방식으로 목적을 이룬다. 직원들은 그 화살이 언제 자기한테 향할지 모르니 함부로 나설수도 없다. 중년을 맞는 대다수 사람들의 자화상이다. 이들이 복싱을 통해 얻은 것은 과연 흐릿한 청춘의 기억 뿐일까. 


학벌, 집안, 연봉, 재산이 결혼 조건의 우선 순위가 된지는 이미 오래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삶의 위기가 왔을 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인지, 마찬가지의 상황에서 자신은 상대에게 품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사실 그보다 앞서야 할 것은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나 스스로 미래를 설계할 힘이 있는지를 살펴야한다. 자립이 가능한 사람이야말로 상대를 더 사랑할 수 있을테니.  


팬데믹 시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많은 부분 달라졌고, 달라진 세상에 익숙해졌다. 좋고 나쁘고, 옳고 그름을 떠나서 세대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와 시각에 차이는 있을 것이다. 이제 세상이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졌음은 분명해 보인다. 포스트 코로나를 염두해 두고 여러 책들이 출판되고 있으나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정작 내가 생각하는 건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가 잃은 것과 새롭게 만들어진 것,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이다. 


그나저나 한동안 잠잠했던 코로나 확진자가 다시 증가 추세다. 왜 이러냐, 또... .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있는 요즘이다. 작가는 인류의 구세주가 다음 세상을 이끌어갈 아이들이라고 얘기하는데, 그 아이들이 잘 넘겨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하는 이들은 지금의 어른이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더 크게 생각되어진다.   


<판다를 타고서>는 수록된 소설 중에 가장 마음에 남는 작품이다. 도미타의 추억 여행보다는, 쉰다섯의 나이에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물리적 심정적 여유가 생기고, 타인의 인생을 통해 치열하게 달려왔던 자신의 지난 인생을 위무하며 안식하는 나오키를 통해 우리 시대 중년들의 모습에 뭉클함을 느낀다 (나오키가 '파이트 클럽'의 멤버 중 한 명이라고해도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내가 쉰다섯 살에 한 가지를 산다면 뭘 살까... 생각해 봤는데 단번에 피아노가 떠올랐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대여섯살 무렵부터 함께 한 지금의 투박한 피아노를 과연 내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우리 주변에 아는 누군가의 사연이라고 해도 믿겨질만큼 지금을 살고 있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각각의 단편인 소설들에는 공통적인 장치가 등장한다. 비현실적인 소설 속 이 장치가 현실의 우리에게는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인생에는 믿기지 않는 비극도, 믿기지 않는 희극도 존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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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그라비아의 음모 레이디 셜록 시리즈 2
셰리 토머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리드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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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돌아왔다!'라고 쓰고 싶지만 그건 후속편을 기다리던 독자의 입장이고, 소설은 1권과 큰 시차를 두지 않고 이어진다. 스토리는 세 가지 사건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레이디 잉그램이 의뢰한 실종 사건, 다른 한 가지는 밴크로프트가 의뢰한 살인 사건, 또 다른 하나는 밴크로프트가 샬럿에게 청혼한 사건(?)이다(샬럿의 인생에 가장 큰 사건일지도).  






 




레이디 잉그램은 핀치 부인을 사칭해 샬럿에게 만나 달라는 전갈을 보낸다. 물론 그녀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대중들이 실재한다고 믿는 셜록 홈즈이지만. 아무튼 샬럿은 그녀가 보낸 편지만으로 발신자가 핀치 부인이 아닌 레이디 잉그램이라고 유추한다. 서로 직접적으로 인사한 적은 없으나 샬럿은 이미 사교계에 부정적인 소문의 중심에 있고, 레이디 잉그램은 그 반대의 이유로 유명한 사람이니 정체가 들통날 우려가 있음은 당연하다. 샬럿은 페넬로페에게 홈즈의 여동생 역할을 부탁한다.  


레이디 잉그램은 결혼 하기 전 가난한 사생아를 사랑했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견습 회계사였고, 언젠가 런던에서 회계사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안락한 가정을 꾸려 성공하는 게 꿈이었다. 레이디 잉그램은 허세와 가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부모로부터 벗어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원했지만, 딸의 결혼에 남동생들의 미래와 가정 경제의 짐을 지우는 부모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잉그램 경과 결혼했다. 결혼이 결정되자 가난한 연인은 헤어진 후 매년 남자의 생일 바로 전 일요일에 스치듯 지나쳐 서로의 안부만 확인하기로 했다. 그 약속은 어김없이 지켜졌는데, 올해 그 남자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한 지는 6년 전이어서 레이디 잉그램은 그가 어디 사는지, 직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레이디 잉그램의 요청은 그 남자의 생사와 행방을 수소문해 주고, 더 나아가 그의 의중을 알아와 달라는 것이다. 그 남자의 이름은 마이런 핀치. 그런데 마이런 핀치는 샬럿의 의붓 오빠다. 


ㅡ 


이렇게 시작한 사건은 언뜻 보기에 아주 단순하고 쉽게 해결될 듯 보인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레이디 잉그램의 행동, 이와는 별개로 보였던 다른 살인 사건과 핀치의 예상치 못했던 연관성, 오리무중 상태인 마이런 핀치의 소재와 생사, 샬롯의 언니 리비아에게 접근하는 의문의 남자, 미로같이 복잡한 암호와 부호들, 두려움의 대상인 모리아티의 그림자. 그리고 명확하지 않은, 샬럿의 직감이 가리키는 막연한 불편함.


소설은 이번에도 빅토리아 시대 상류층의 허세와 가식, 그리고 여성 차별에 대해 꼬집으며 여성 연대의 힘을 다시 보여준다. 몇 끼를 굶는 한이 있어도 사교계 파티 준비는 해야하고 그들의 사치를 위해서라면 딸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시키는 것쯤은 예사다. 1권에서 레이디 홈스가 그랬듯이 레이디 잉그램 역시 돈 때문에 자유와 맞바꾼 결혼을 했다. 대책도 없이 집을 뛰쳐 나온 샬럿은 문란한 도덕 관념으로 사교계에서 이단아로 낙인이 찍혀 결혼은 영 글렀고(본인도 원하지 않지만), 리비아는 여성으로서 어렵게 글쓰기를 이어간다. 경사 트레들스의 아내 앨리스는 영리하고 유능하고 조직을 관리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회사를 경영하겠다는 야심을 품을 수 없다. 당시의 여성들은 절대 자유와 권력을 꿈꾸어서는 안 되었다. 어쩌면 레이디 잉그램 역시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았다면 부자는 되지 못했을지언정 상황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설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한 모리스 부인의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외도도 모자라 버젓이 아내가 있는 집에 여자를 들어앉히고, 상심해 찾아간 친정 아버지는 새 장가를 들겠다고 딸을 내보내려는 속셈에 알레르기 유발 음식을 먹인다. 가족 내 남자가 없으면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레이디'들이 가졌을 두려움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이 소설에서 당시의 남성을 대변하는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트레들스가 아닐까싶다. 현 상태로 존재하는 세상을 숭배하고, 세상이 이대로만 존재하도록 강제하는 규칙에 복종한다. 규칙을 깨는 사람은 세상의 질서에 위협이 되니 처벌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규칙이 정당한지는 생각하지 않은 채 규칙을 강제로라도 지키게 하는 것 밖에 모른다. 트레들스는 자기보다 유능한 여자들을 참기 어렵다. 경찰보다 더 뛰어난 '여자' 샬럿 홈스, 사업 경영에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내 앨리스, 이 두 여성을 보면 열등감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른다. 트레들스는 자신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아내가 처가의 사업 경영에 대해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나마 이러한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에서 앞으로 달라질 그의 모습을 기대한다.  


트레들스를 보면서 관계의 형태가 부부든 연인이든 부모자식간이든 개별적이라는 인식을 갖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생각하는 부분인데, 앞서 언급한 관계에서 우리는 종종 상대를 동일시하는 경우를 본다. 트레들스의 경우 아내가 경쟁자가 아닌 이상에 자신의 성공과 아내의 성공이 무슨 관계가 있나(물론 전혀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심지어 당시의 남자들과는 다르게 샬럿의 능력을 인정하면서 청혼을 했던 밴크로프트조차 트레들스의 유사한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차원이 다른 호탕함으로)은 당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어느 지경이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처남이 죽고 아내가 친정 아버지의 회사를 상속받았다는 소식을 전하자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외로웠다는 트레들스가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ㅡ 


별거 아닌 듯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이 소설 읽는 내내 흥미를 가질만한 또 하나의 주제는 윤리적 딜레마다. 물론 이는 잉그램 경과 샬럿의 깊은 우정과 사랑 사이 어디쯤에 있는 그들의 관계와 감정을 전제로 한다. 샬럿은 의뢰인 레이디 잉그램의 신뢰를 지키면 친구로서 잉그램 경을 배신하는 꼴이 되고, 레이디 잉그램의 사정을 잉그램 경에게 얘기하면 의뢰인의 신뢰를 저버리게 된다. 심지어 레이디 잉그램이 찾는 남성은 샬럿과 혈연 관계다. 잉그램 경과 샬럿의 로맨스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충분히 고민될만한 상황인데, 작가는 마지막에 한방에 해결한다. 두 남녀의 우정과 사랑의 미묘한 기류는 시리즈 내내 계속될 것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이 모든 사건을 아우른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이들은 페넬로페, 왓슨 부인, 샬럿이다. 그리고 부모조차 책임을 방기한 리비아와 버나딘을 끝까지 보호하려는 사람은 그들의 동생 샬럿이다. 이들의 끈끈한 연대와 우정은 여느 사랑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그려진다.


 소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레이디 잉그램이 의뢰한 사건의 진상, 리비아에게 접근했던 남자와 핀처를 사칭했던 남자의 정체, 아무도 몰랐던 레이디 잉그램의 진실, 그들 가까이,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있었던 마이런 핀처.   


1권이 레이디 셜록의 서막이었다면 2권이야말로 본격적인 시리즈의 시작이 아닐까싶다. 뿌려놓은 밑밥이 무궁무진하다. 하룻밤만에 뚝딱 읽고, 출간도 안된 3권을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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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
임우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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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과의 비교는 부족함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아지기 위한 새로운 영감을 주는 용도일 때 의미가 있다.(p303)" 이 문장으로 저자가 어떤 태도로 책을 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사람인 먼저인 도시'를 추구하는 그의 생각이 그대로 녹아있다. 건축 혹은 도시 미관이나 공간 활용에 대한 설명보다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거나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보이지 않은 '도시'의 인식을 다른 시각에서 포착해 이야기한다.  








프랑스 파리와 우리나라 신호등 위치에 대한 글을 읽고 처음에는 오호~했는데, 서구의 도시 문화가 기본적으로 인간을 신뢰하지 않으며, 항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 지킬 수밖에 없도록 만든 시스템이라고 하니 어쩐지 생각이 많아진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서구의 도시들처럼 도시 시스템을 더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이라는 지적에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신호등 위치가 과연 인간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선진국은 있어도 선진 국민은 없는 셈이라는 저자의 말이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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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은 모든 방이 직사광선이 아닌 마당에서 반사되는 간접광에 의지하는 구조로써 방향에 강하게 구속되는 집이 아니었기에 남향에 대한 집착도 없었다는데, 결국 양옥집을 거쳐 아파트 문화가 대세가 된 근현대 이후부터 남향에 집착할 수 밖에 없게 됐다는 말씀일 터다. 그동안 다녀왔던 적지 않은 답사지를 떠올려 보면 전통적인 집이 땅 주변 환경에 순응하는 식으로 지어져 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남향집을 선호하면서도 정작 남향의 거실과 안방에서 머무는 시간대는 주로 해가 진 이후의 저녁 시간 이후라는, 그래서 방향은 남향집이나 실생활은 북향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4장을 읽으면서 집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집을 리모델링 해야할지 이사를 가야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덕분에 생각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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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도시 환경에서 길은 도시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자 건물보다 절대 우위를 점한 공공재다. 서구에는 길이 존재하지 않으면 건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길을 단지 연결로가 아닌, 도시라는 생태계를 구성하고 유지시키는 뼈대와 신경계로 여긴다. 반면 한국의 경우 마을이 먼저 하나둘씩 형성되면서 집을 짓고 남은 땅이 자연스럽게 길이 되었기 때문에 전통적 의미의 길은 집과 집,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연결로에 가까웠다. 한국이 잘 정비된 가로를 따라 건물이 들어선 것은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였다는 설명을 하면서 파리와 안동을 비교하는 사진이 실려있는데, 그 차이가 확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문득 로마가 가장 우선했던 사회 인프라가 도로 정비였던 것을 떠올려보면서 이러한 차이들이 자연환경과 지형이 다른 것에 일부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다른 것에도 일부 원인이 있을 터다.

가족적 규모의 소집단에 강하게 결속되어 큰 규모의 연대로 발전하기 힘든 문화권, 개인성이 강하지만 당면한 문제에 의견을 나누고 연대해서 사회적인 규모로 발전시키는 것이 수월한 문화권. 이를 통해 사람들의 관계가 사회적인 제도와 물리적인 건축 혹은 도시 공간에  미치는 영향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 철학 중 하나가 자기 땅 담장 밖의 세상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즉 '자기 내향형' 건축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방증을 '담'에서 찾는다. 혹자는 낮은 담을 예로 들며 반문하는데, 동네 사람 대부분이 혈연이나 지연으로 엮여 있고 이방인 유입이 거의 없던 씨족 마을의 경우 방범을 위한 높은 담의 필요 없었을 뿐. 재미있는 점은 경복궁과 루브르궁의 그림을 놓고 다른 점을 비교하는데, 소통의 차원에서 보자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주시해야할 논점은 도시, 그리고 도시를 이루는 건축과 그 건축물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의 내재적인 특성에 대한 연관성이다.   

사는 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다면 공통점도 있다. 바로 인간의 욕망이다. 도시는 생존과 경쟁을 위한 상징물로 채워졌고, 시민을 소비의 대상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웃'이 아닌 소비체가 된 시민은 도시를 소비의 대상으로만 사용하게 된다. 누구를 만나는 것도, 잠시의 휴시도 비용을 지불해야 가능하지만, 이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고대부터 인간의 욕망과 경쟁을 상징하는 것은 건축물의 높이. 바벨탑부터 시작된 높이 지향은 현대 사회에서 초고층 빌딩들이 뒤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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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사회 구심적 공간과 사회 원심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두 공간을 나누는 핵심은 '주도권'이다. 즉 누가 공간 사용의 주도권을 가졌느냐인데, 이것으로 두 공간의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주도권이란 그 공간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 심리적 소유권을 뜻한다. 공간 소유권은 공간에 대한 애착으로 발전하는 핵심 요소라는 것. 우리가 지금의 도시가 예전보다 점점 더 삭막해졌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저자는 이에 대한 원인을 '도시 공간 주도권 박탈'이라는 소견을 내놓는다. 무엇보다 '사회 원심적 공간' 방식을 현대 도시의 공간 구성 방식으로 선호하는 것이 오늘날 도시민이 느끼는 외로움의 실체적인 원인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주변을 둘러보게 됐다. 주거지를 선택할 때(특히 아파트) 많은 사람들이 살기도 전에 환금성을 따지고, 그 안에서 살게 될 나와 가족들의 삶의 질조차 '상품'으로 대체되는 사회 분위기를 따져볼 때 저자의 말이 현실적으로 틀리지 않음을 새삼 느낀다. 그러다 보니 집에 대해서도 심리적으로 온전한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집에 흠이 생기면 팔 때 곤란해지니), 이러한 사고가 확장되면 도시에 소유권은 구조물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이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종속되어 수동적인 시민이 될 수 밖에 없을 터다. 탈脫 아파트를 꿈꾸는 나같은 사람으로서는 참 와닿는 얘기들이었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공간 활용이나 예술적인 건축물에 대한 찬양보다는 '함께 사는 사람들의 공동 가치'에 목적을 둔 글들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얻기도 했고, 읽는 동안 내 나름의 생각을 확장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기존에 읽었던 건축에 관련한 도서들과는 결이 조금 다른 책이었다. 개인적으로 맨 마지막 '수국 마을'의 이야기와 묘지를 '가족의 집'이라고 표현한 프랑스의 시한부 묘지 제도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저자가 사는 아파트의 1층에 거주하는 겁 없는(?) 할머니가 참 좋았다.


184.
소위 트렌드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도시 상징들은 도시 공동체의 시간과 기억을 '휘발성'으로 변질시켜, 세대가 달라도 서로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것 같은 도시적 경험의 축적을 말살시킨다. (...) 거리를 점령한 화려한 간판은 강렬한 자극을 주며 시민을 집단적 기억상실증으로 이끄는 머릿속 지우개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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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장소들의 지도 - 잃어버린 세계와 만나는 뜻밖의 시간여행
트래비스 엘버러 지음, 성소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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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미 사라졌거나 현재 사라지고 있는 풍경들, 과거의 지도에서 지워져 잊혀져가고 있는 장소들, 서른일곱 곳을 여행한다. 


저자는 지도책이 아님에도 각 도시 혹은 지정하는 장소마다 지도상에 나타나는 위도와 경도를 표시해 독자가 특정 장소의 위치를 가늠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2020년 영국에서 '올해의 여행책'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이 책은 여행책으로만 국한하기에는 아깝다. '고대 도시', '잊힌 땅', '사그라지는 곳', '위협받는 세계' 등 총 네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는데 신화와 전설, 도시의 태동부터 역사, 자연 환경과 기후 변화, 그리고 물러설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다른 현재까지 무겁지 않게 훑고 있어 여행서이자 복합적인 교양책의 역할을 하고 있다.  



먼저 책에서 언급된 장소들 중 나에게 꼭 가고 싶은 곳을 골라 보라면 요르단의 페트라, 말리 팀북투를 들겠다. 페르라는 비잔틴 시대 내내 번영했던 사라진 도시로 향하는 통로인 시크를 걸어보고 파사드의 웅장함을 실물로 영접하고 싶은 마음이 크고, 말리는 지금 읽고 있는 중인 작품의 주인공들 트라오레 집안의 네 형제들의 여정이 떠올라 그들의 길을 짚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사그라지는 곳', '위협받는 세계'를 통해 현재 여러 이유로 소멸 위기에 놓인 장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럽의 주요 강 가운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유일무이한 강인 다뉴브의 동쪽 끝은 저수지와 폐공장에서 중금속과 유독성 폐기물로 가득 찬 웅덩이가 발견되고 있다. 사해는 농업 및 생활 용수의 필요에 의해 길이가 절반 수준으로 줄었으며, 수위도 매해 1미터씩 낮아지고 있다. 이에따라 사해 주변의 생태계 문제 뿐만 아니라 싱크홀까지 많이 생겨났다. 인도 야무나강의 수질 오염 때문에 타지마할은 누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절벽 붕괴, 습지 매립, 해수면 상승, 기온 상승에 의한 물 부족, 열대 우림의 사막화 등으로 투발루가 속한 남반구 뿐만 아니라 북반구의 수많은 도시들도 위협받고 있다.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베네치아나 북반구 거의 끝에 있는 캐나다도 예외가 아니다. 다뉴브강이 기억과 역사를 품고 있으나 이 강이 건강한 미래까지 품을 수 있을지의 여부, 사해 주변 지반 약화에 따른 심각한 참사 예방 등은 결국 우리에게 달려있다.  


수많은 동.식물의 멸종 및 멸종 위기종 발생으로 인한 생태계 교란, 자연재해, 과도한 농지 개발과 화학 비료 사용, 근대 산업(공업)화와 도시화 등의 영향으로 인해 나타난, 오랜 세월 축적된 결과물에 대해 우리 스스로 각성과 대안이 필요한 시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모쪼록 우리가 아끼는 땅과 자연과 문화유산들, 이 지명들이 지도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람한다. 




사족.
지도와 도판이 무척 좋았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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