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하이웨이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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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매일매일이 특별한 날. 



여중.여고를 거치면서 그 흔한 선생님에 대한 동경을 가져본 적도, 유명인을 대상으로 팬을 자처해본 적도 없는 내가 짝사랑한 사람이 있었으니 <모스크바 신사>의 로스토프 백작이었다. 그 기억이 여전히 생생해 작가의 신작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에밋
1954년 6월 12일, 에밋 왓슨은 15개월의 복역을 마치고 윌리엄스 원장과 함께 설라이나 소년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3개월 일찍 돌아온 에밋에게 남겨진 것은 아버지의 빚이었고, 그 빚을 상환하기 위해서 여덟 살 동생 빌리를 데리고 조만간 집을 비워줘야한다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형제에게 빚만 남긴 건 아니었다. 에밋의 1948년형 스튜드베이커 랜드크루저에 숨겨져 있던 편지 한 장과 현금 3천 달러를 유산으로 남겼다. 

 
더치스 / 울리
윌리엄스 원장의 차에 몰래 숨어들었던 더치스와 울리. 설라이나에 있어야할 두 사람이 에밋의 앞에 나타나서 기껏 한다는 얘기는, 울리의 증조부의 별장에 설치되어 있는 금고 안에 울리가 상속받을 현금 15만 달러가 있으니, 그 돈을 빼내어 3둥분하자는 것. 별장은 항상 6월 마지막 주말 동안만 개방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돈을 빼내올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런데 뉴욕까지 타고갈 차량 소유주인 에밋이 이 계획에 동참할 의사가 전혀 없다. 그리고 현금 15만 달러의 주인인 울리가 정작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   



 빌리가 아버지의 사망 후 그의 방에서 찾아낸 그림 엽서 아홉 장. 그 엽서들은 어머니가 집을 나간 직후에 보낸 것들로서 아들들을 수신자로 하는 어머니의 필체가 적혀 있었다. 엄마가 보내왔던 엽서는 링컨 하이웨이가 통과하는 지역이다. 캘리포니아로 가면 엄마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빌리의 기대감과 자신의 실수와 과오, 그리고 무기력한 아버지에 대한 적대적인 기억이 남아 있는 곳에서 떠나고 싶은 에밋의 바람이 합쳐져 왓슨 형제에게 거의 유일하게 남은 스튜드베이커에 몸을 싣고,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로 향하고자 한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복병과 사건이 발생하고 그들은 캘리포니아와 정반대 방향인 뉴욕으로 차머리를 돌린다. 


ㅡ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때로는 사건을 제3자의 입장에서, 때로는 그보다는 좀더 가까운 입장에 이입되어 관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주요 인물들이 열아홉 살 전후로 매 사건에 부딪칠 때마다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성장소설이면서 동시에 당시 시대를 통해 현재의 우리 모습을 함께 조명하고 있다.  


울리는 기숙학교와 감옥을 비교하면서 그 두 곳의 공통점이 대상을 관리하기에 쉽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훌륭한 직장인을 생산해 내기 위함임을 짚는다. 특히 울리가 사회성이 부족하고 때로는 사회 부적응자로 비춰진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구성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지 않음을 새삼 각성하게 된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점은 주인공 에밋의 입장에서 뭔가 한발짝씩 어긋나는 느낌이지만 결국 그들이 가야할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는 읽으면서 "아, 이런..." "안돼!"를 중얼거리다가 어느 순간에 이 난처한 상황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에밋을 따돌리려고 했던 더치스가 빌리를 데리고 의도치 않게 에밋이 있던 곳으로 오게되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에서 악인은 없다(존 목사가 악인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그에 대한 히스토리가 깊지 않으니 독자는 이 또한 장담할 수 없다). 더치스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 누명을 썼고, 타운하우스는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죄를 뒤집어 썼으며, 울리는 선행이라고 여겼던 행위가 불상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에밋은 단 한 번의 실수가 최악의 불운이 되었다. 그들이 새로운 인생을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의 키맨은 여덟 살 소년 빌리 왓슨이다. 
율리시스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가족의 가치를 깨달았으나, 가족을 잃은 후 희망 없이 사는 부정적인 삶의 방식만을 취하다가 자신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갖고 있는 율리시스왕의 이야기를 빌리로부터 듣게 된 뒤 희망을 품고 싶어진다. 기적같은 만남으로 빌리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책 속에서 존재하는 모험을 넘어서 현실의 인생을 개척하고자 노년에 과감하게 펜을 던져버린 애버커스 교수의 새로운 시작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외에도 빌리는 낙담하는 사람들에게 의도와 사심이 없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그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빌리는 자신이 크세노스라고 생각한다. 평범하고 소박한 우리 주변 인물로서 이름이 밝혀지지않는, 보통의 사람. 그러나 항상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나타나서 필수적인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 실제로 이 소설에서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관지어 고민을 던지면서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도록 하는 매개체다.  


소설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들은 엇길린 길 위에서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알아가며, 선입견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타인을 판단해 왔던 것들에 대해 반성한다. 여러 사람을 대면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그들. 우리가 타인과 어우러져 사는 데에 필요한 미덕은 용서라는 메세지가 깊게 와닿는다.  


이를 이미 알고 있었던 울리와 빌리, 그리고 세라. 그래서 울리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이들 중 가장 가슴 아파할 사람은 세라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도시든 사람이든 버려두고 방치하면 안 될 터. 샐리의 바람처럼 자신이 하는 행위가 오로지 스스로를 위한 삶이 될 수 있는 세상이기를, 과거의 잘못된 사슬을 과감히 끊고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이러한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서로에게 아낌없이 박수쳐줄 수 있는 모두가 되기를 바람한다. 



811쪽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소설을 읽으면서 단 한 장도 지루하지 않았다. <스토너> <모스크바의 신사> 에 이어 머릿속에 꽉 박힐 소설이 될 듯하다. 



599.
다시 희망할 수 있는 권리.



♤ 출판사 가제본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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