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
장석주 지음 / 현암사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인은 책 머리에 책과 책들 사이를 서성이며 이 글들을 썼다고 했다. 경이롭고, 침잠하고, 기다리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귀 기울이는 날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일단 그저 좋았다. 두어 달 동안 축적되어진 피로와 고단함 끝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던지. 제목에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나도 그랬다). 물론 이 책에 에밀 시오랑에 대한 글과 시인의 감상이 실려있지만, 온전히 에밀 시오랑에 대한 책은 아니다. 에밀 시오랑, 니체,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좋아하는 시인의 글을 읽다보면 책 제목의 선정 이유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독, 멜랑콜리, 노스탤지어, 망각의 미덕,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의 문화, 밤과 고요, 존재와 소실, 공허와 무, 기다림의 부조리, 디지털 시대에 책 읽기의 유용함, 몰입한 독서의 희열, 음악이 주는 기쁨, 상상력의 부재, 동식물과의 공존, 사랑의 정념, 침묵의 장엄함, 나이듦의 가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과 더불어 소비되는 값싼 연민. 


팬데믹 사태, 정인이 사건, 이태원 참사 등 근래 몇 년 사이에 벌어졌던 여러 사건.사고들뿐 아니라 개선되지 않는 노동 현장과 산업 재해, 전쟁과 내전 난민, 살인적 기아, 학교 및 직장 폭력, 증오 범죄, 인종주의, 유혈폭동, 사회적 약자를 향한 억압과 차별, 청년 실업, 지구 온난화, 한국 정치의 구태, 갑질사회의 비대칭 구조, 혐오와 제노포비아 등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사회 문제들을 짚으며 불행의 서사가 넘쳐 이제는 불행과 재난이 상습화된 현대 사회가 이미 디스토피아라고 단언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직시해야하는 것들에 대해 인문학으로 고찰한다. 



필립 들레름은 아침 식탁에서 조간신문 읽는 일을 두고 "이것은 모순적인 사치다"라고 했다고 한다. 평온한 아침 식탁에서 펼쳐든 신문에는 훈훈한 기사보다는 흉악 범죄와 자연 재해, 정치적 비난, 전쟁과 내전, 테러 등 죄악이 난무한다. 아침 식탁의 고요함과 소란스러운 신문의 극단적인 부조화. 시인은 종종 이 부조화의 괴리에서 기묘한 고통에 빠진다고 했는데, 현재를 사는 우리는 글쎄... 그가 느끼는 고통조차 무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 이 부분을 읽는 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젊건 늙건 인생은 어렵다고 말한다. 그리고 잘-죽음은 잘-삶에 잇대어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이 삶의 지혜나 잃어버린 길을 찾는 데 지침서가 된다고 장담할수는 없다. 다만 때때로 지치고 고단할 때 쉼이 되어줄 것이다. 시인이 묘사하는 삶의 비루함으로도, 쾌청한 가을 하늘의 볕 좋은 어딘가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잠시나마, 나는 충분했다.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나, 마들렌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섯 개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좀비, 트랜스젠더, 강박적 모성애, 자아 분열, 사회적 계급, 삶과 죽음, 사랑과 연민, 노화, 성적 욕망, 그리고 연대 등 여러 소재를 데려와 판타지를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김초엽 작가는 추천사에서 "책장을 넘기며 연신 놀랐다. 와, 이게 어떻게 전부 한 작가가 쓴 이야기지?"라고 썼는데, 소설집의 두 작품만 읽고도 이 말에 수긍이 갔다. 장편 <체공녀 강주룡>을 떠올려봐도 이번 소설집은 확연히 다른 색깔인데, 심지어 실린 소설마다 소재, 주제, 형식적인 면까지 마치 여러 명의 작가가 협업한 옴니버스 소설집같은 다채로운 느낌이 든다.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초토화된 서울을 빠져나와 연천으로 향하는 '나'. 그가 연천으로 향하는 이유는 생사 여부를 모르는 남편을 만나러 가기 위함인데, 그렇다고 이혼 소송 중인 남편을 사랑해서는 아니고, 다만 무엇을 해야 할지 달리 떠오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 속 '나'는 비감염자를 구해야 한다는, 감염자가 없는 곳으로 도망가야 한다는 등의 뚜렷한 목표가 없다. 그저 살아있기에 살아갈 뿐이다. 아마 온 세상이 좀비 형상을 한 감염자 뿐이라고해도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 살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의 우리가 삶을 위한 투쟁을 그치지 않는 것처럼.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갤러리 큐레이터인 한나와 호텔 메이드 클레어. 각각 갤러리와 호텔을 벗어나 군중에 섞여 있다면 그들의 직업, 나이, 학력 등을 알아볼 재간이 없다. 고작 호텔 직원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한나, 비슷한 또래의 여성에게 갖는 클레어의 동경과 질투. 소설은 두 사람에게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보이지 않는 사회적 계급에서 우위에 있고 싶은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한나와 클레어) 



자본주의 흐름에 학교라고 예외일까. 어쩌면 지성의 전당은 옛말이고 학교야말로 사회적 계급을 가장 여실히 느끼게 되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소위 '루저'라고 매도되는 이들을 향한 애도조차 인색한 세상에 살고 있다.
(세네갈식 부고) 



'나'가 두 개의 자아로 쪼개진 시점이 인상적이다. 가해자가 마들렌을 성추행 한 것에 분노하는 한편, 자신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즉 질투에 의한 분노를 느끼는 '나'. 가해자인 소설가를 미워하면서 한편으로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나'의 모습을 통해 미처 깨닫지 못할 만큼 잘못된 관습과 가부장제 프레임에 익숙해져 있으며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이중성, 그 이상을 깨닫는다.
(나, 나, 마들렌) 



삶에 대한 누군가의 절박한 소망이 누군에게는 돈의 가치로 환산되는 시장 경제 논리.
(마치 당신 같은 신) 



<김수진의 경우>는 트랜스젠더 여성 김수진의 임신 및 출산기라고 할 수 있을텐데, 작가의 독특한 상상이 돋보인다. 



실린 작품들이 모두 50쪽을 넘기지 않는 짧은 소설들이지만 그 안에서 다루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소설들은 독자가 마음의 준비를 하기 전에 이미 읽는 이의 마음을 슬쩍 건드려놓는다. 소설을 읽는 동안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모른 척하고 싶은 각자의 마음 한 조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덕후 일기 - 시간 죽이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2
송승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서문에서 그가 '경험해온 여러 작품에 관해 제멋대로 쓴 감상문'이라고 썼다. 나 역시 서평이라기보다는 이 책을 읽은 감상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어쩜 이럴수가... 270쪽 분량의 책을 읽는 동안 186쪽까지 아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 아는 게임이라고는 테트리스가 전부고, 중국 드라마는 한 편도 본 적이 없으며 웹툰도 마찬가지, 거기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10년 안쪽에 극장에서 개봉한 작품들 외에는 문외한이다보니 "어쩔..."하며 읽었는데(그래도 드래곤볼은 학창시절 만화책으로 몇 권 읽었더랬다), 의외(?)로 재.밌.다. 








아무튼 신세계를 만났다. 일단 게임에 관련한 부분을 읽는 내내 "와..." 혹은 "헉!"을 연발하며 거의 입을 벌리고 읽은 것 같다. 위에 썼듯 '게임=오락실' 정도로 인식하고 있던 나로서는 게임 자체에 대한 얘기에서 크게 공감하지 못했으나 정말 많은 것들을 알게 됐다. 생존형 전략 시뮬레이션, RPG 등을 처음 접했고, 영화도 아닌 게임을 이렇게까지 조밀한 스토리로 구성한다는 것, 개인이 후원자를 받아 게임을 개발한다는 것, 게임 동영상을 관련 사이트에 중계하고 기금을 마련해 불우 어린이들을 돕는 후원 기금 행사도 한다는 것 등 모두 처음 알게 된 사실들이다. 덕후들 사이에서는 특정 개발자를 선호한다는 점이 조금 낯설었는데, 생각해보면 다독을 하는 독자들 중에도 저마다 선호하는 작가가 있는 것과 비슷한 일일터다. 


게임 관련한 부분을 읽다보니 내가 그동안 너무 편협한 사고로 게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아바타'가 정말 일상화 되는 날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왠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게임이 현실을 모방하고, 종종 모방을 넘어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하고, 대안 현실로 기능하기도 하는 시대이니 어떤 선(경계)을 그어야할 필요성에 대한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종류별 게임의 성격과 소비자가 호구가 되는 게임 시장의 구조적 문제, 그리고 게임이 플레이어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들을 부담없이 가볍게 분석하는데,무겁게 썼다면 나같은 사람은 읽는 데 더 난감했을 것 같았다(가벼워서 좋았다는).



게임에 대한 글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애니메이션, 웹툰, 영화 등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대부분 대중이 쉽게 접하지 않는 작품들이다. 지극히 사적인 견해를 지인들과 얘기하듯 써내려간 글 사이사이에 게임을 비롯한 여러 매체나 콘텐츠들이 전달하는 여성 차별, 반전反戰, 성폭력, 동물 학대, 고어물에서 찾는 윤리, 약물 도핑과 이에 대한 정치적 활용, SNS 폐해, 환경 오염 등을 언급한다.  


이 책을 재밌게 다 읽었으나 사실 책에서 언급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및 영화를 경험해볼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누군가의 경험을 즐겁게 들을(읽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새삼 느꼈다. 그저 나 혼자 조금 웃겼던 건 저자와 나의 취향은 전혀 다른데, 저자가 스스로 덕후가 될 수 없다면서 얘기한 그의 성향이 많은 부분에서 비슷해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나 역시 내가 덕후가 될 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걸 잘 알고 있고.   


저자는 자신이 절대 오타쿠가 아니라고 누차 강조하는데, '이 정도인데 오타쿠가 아니라고?' 하다가도 문득 궁금한 건 못 참아 검색 엔진을 돌리며 지인들의 모임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간헐적 덕후 기질을 보이는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저자는 이 책에 대해 시간을 죽이는 것으로써 살아냈던 시간들의 여정이라고 썼다. 무엇이든 많은 것들을 사랑하라고, 그 사랑한 것들이 각자 자신의 총합이라고 말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오타쿠가 아닐런지.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량위기, 이미 시작된 미래
루안 웨이 지음, 정지영 옮김 / 미래의창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일곱 개의 장章을 통해 현재 식량위기에 처한 우리의 현실과 이에 대한 원인, 식량 안보의 실태 및 대안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전쟁, 내란, 바이오 연료 등 우리가 식량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여겼던 부분들이 어떻게 기아 난민을 양산하고, 축산 및 과잉 생산이 어떻게 지구 온난화를 불러오는지, 최근 자료부터 되짚어가며 자세히 서술한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식량 문제의 새로운 원인은 육식의 확대다. 1980년대 이후 세계 농업은 인간이 주식으로 먹는 곡물을 증산하기보다 축산 사료용 옥수수와 콩의 증산으로 중심축을 옮기고 있다. 육류 수요가 급증하고, 사료 재배가 확대하면 언젠가 가축의 먹이가 인간의 주식인 쌀과 밀의 농지를 빼앗거나 사료 재배를 위해 더 많은 농지가 개척될 수 있다. 이것은 추가 살림 벌채와 온실가스 배출등으로 지구 환경을 한층 더 파괴하게 될 것이다. 


밀집 사육과 자동화 시스템을 통한 축산의 공업화, 비육 기간의 단축과 사료 비용의 절감을 위해 성장 촉진제와 항생물질 사용, 그리고 개발도상국들의 육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축산 진흥책을 펼쳐 사료 곡물의 수입을 확대하고 있다. 이로써 신흥국과 개발도상국들이 사료 곡물 쟁탈전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육류 사료의 효율을 살펴보면 과연 이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알 수 있다.  

 

현재 지구 전체로 보면 식량 가격이 급둥한 주된 요인은 전쟁이나 글로벌 물류 혼란 때문이지 곡물 재고는 충분하다. 앞으로 예상되는 식량위기는 인위적 요인을 제외하면 주로 지국 온난화에 기인하는 대규모 기후 변화가 가장 큰 요인이 될 것이다. 세계 농업이 직면한 눈앞의 과제는 오히려 과잉 생산에 있고 이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이다. 저자에 따르면 주목할 만한 것은 선진국이 생산하는 옥수수 등의 잉여 농산물이 에탄올 같은 바이오 연료가 되어 지구 온난화 대책의 핵심인 탄소중립으로 가는 큰 흐름 속에 있다는 점이다. 미래에 인류는가축도 모자라 수송 수단과 농산물을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여야한다는 웃지 못할 현실에 직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ㅡ 


이집트는 밀과 쌀 생산이 성행한 농업 국가였다. 그런데 미국에서 오는 식량 수입이 증가하면서 이집트에서 농업이 정체되기 시작했고, 급격한 인구 증가와 더불어 식량 수입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 선진국이나 농업 강국에서 곡물을 수입하면서 자국 농업의 잠재력이 억제되어 식량 자립을 할 수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처럼 농민들이 스스로 경작하기보다 지원받은 식량에 의존하게 되어 농업이 쇠퇴하는 나라들이 생겨났고, 선진국들은 각기 내놓은 원조자금으로 자국의 잉여 농산물을 사들여 아프리카의 식량 지원으로 돌리는 이기적인 식량 공급 시스템을 무역 밖에서 구축해갔다.


3대 화학 비료인 질소, 인산, 칼륨의 원료와 생산은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높은 세계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새롭게 깨달은 바는 비료의 부족과 가격 급등은 단기적인 곡물 수급의 차질 이상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 그 이유는 화학 비료가 석유나 천연가스처럼 특정 국가에 의존하는 리스크 상품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세계 최대 비료 수입국인 브라질(85%를 수입에 의존)이 콩과 설탕, 옥수수로는 세계 2위 수출국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ㅡ 


정리해보면, 식량위기 시대를 앞두고 심각한 문제는 세계의 농업은 농지 등의 생산 여력이 있어도 정치적 대립, 군사적 긴장, 나아가 시장원리에 따라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농업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자원 제약과 지구 온난화가 가속되는 점도 문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보았듯이 현대의 전쟁은 공격 대상을 농업지대까지 넓혔고, 곡물 수출을 방해해서 식량을 무기로 삼는 행위에까지 손을 뻗었다. 특히 지구 온난화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농업 생산과 식량문제인데 세계는 이에 대해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유엔세계식량계획에 따르면 2022년 초에 이미 전 세계는 지구 온난화, 내전과 전쟁, 전염병 여파로 사상 최대인 2억 7600만 명이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4700만 명의 급성 기아 인구를 만들었고, 2050년에 세계 인구는 97억 명에 이를 전망이다. 인류는 현재보다 20억 명분의 식량을 더 확보해야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소비자가 일상적인 식생활, 건강한 영양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식량 안보의 기본이다. 현실적으로 식량 안보를 자국 내에서 모두 떠맡는 것은 불가능하며 자급, 수입, 비상 사태 대응 시 비축이라는세 가지 조합과 균형에 의해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이에 대해 몇몇 나라의 사례를 들어가며 과정에 있어서의 오류를 짚으며 실질적인 대안과 방법을 고민한다.  


ㅡ 


이전에 지구 온난화(기후 변화)에 관련한 책들을 읽으면서 이것이 인류 전반에 걸쳐 있는 종합적인 문제임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식량을 중심으로 접근한 기아와 지구 온난화가 이토록 다양한 분야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또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가져온 후폭풍이 전쟁 난민 및 기아뿐 아니라 남미와 아프리카의 농업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따져볼 때 그야말로 우리는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세상에 살고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 전부터 '식량위기'에 대한 읽을 만한 책을 찾고 있었는데, 의외로 자료가 많지 않았다. 너무 오래됐거나, 학술자료라서 너무 어렵거나, 아예 청소년 대상(주로 초등고학년이나 중학생)으로 출판한 책들 혹은 기후 변화 중 일부분으로 다룬 책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책은 '식량위기'에 집중해서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기는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서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무엇보다 저자가 어렵게 쓰지 않아서 대중의 접근이 용이하리라 생각된다.   


설령 이 문제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일독을 권한다.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끼 귀 살인사건
안티 투오마이넨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흔 살 헨리 코스키넨은 수학자이자 보혐계리사다. 권고사직을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의 사망 소식과 함께 그가 소유하고 있던 탐험공원(일종의 놀이공원) '너랑나랑공원'이 상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탐험공원 직원들은 새로 부임한 대표가 떨떠름하다. 직원들이 마음에 안 들기는 헨리도 마찬가지. 공원의 회계 장부를 살펴본 헨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공원의 사업 활동은 마이너스 없이 지속 가능하고, 오히려 이윤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형은 청구서 대부분을 지불하지 않았고 공원 이름으로 추가 대출까지 받았다. 시간 순서를 보면 회계사무소가 계약을 해지했을 무렵부터 청구서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뒤로는 거의 모든 것이 체납되었다. 대출금과 탁자 위에 놓인 미지불 청구서를 모두 합하면 거의 20만 유로 가까운 돈이 겨우 1년 사이에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정도 돈이면 사용 흔적이 분명히 어딘가 있을텐데 어디에도 돈의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낭비와 사치하고는 거리가 먼 형이다. 도대체 그 많은 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수학적 사실에 입각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것을 최우선시 하는 헨리 앞에는 이제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합리적인 사건들이 줄줄이 펼쳐진다.  





 



소설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모든 상황을 수학적으로 판단하며 공감력 부재와 타인과의 관계를 철저히 무시하는 중년 남성 헨리의 내면 성장기를 누아르와 스릴러 형식으로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다.  


헨리는 다른 사람의 기분, 생각, 감정을 알 필요가 없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어지간해서는 웃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직원들의 요구와 그들의 개인적인 사정을 들으면서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면의 변화가 일어난다. 무엇보다 라우라만 대면하면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자신은 온데간데 없고 생각지도 않은 말과 행동이 툭 튀어나온다. 무엇보다 그녀와 대화할 때면 헨리는 웃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헨리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제 입장에서만 감정이 앞서 막무가내로 일방적인 요구만 하던 직원들은 객관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헨리를 통해 그들이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즉 '탐험공원'이라는 공간 안에서 서로에게 필요했던 부분이 무엇인지를 깨달음으로써 상호작용을 하는데, 이 방식이 진지한 토론이나 회의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곤란함을 피하기 위한 임기응변식 잔꾀였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효과를 보았다는 점에서 재미있고, 특히 헨리의 어리바리한 모습이 머릿속에서 영상처럼 떠올려져 읽는 동안 내내 웃었더랬다.  


ㅡ 


이 소설의 백미는 블랙코미디다. 
암살자는 어처구니 없게 싸움이라고는 말싸움도 제대로 못하는 평범한 사람에게 조형물의 귀로 맞아죽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살인도 마다않는 암흑가 사내들이 신용카드와 체크카드가 없어서 열차에 무임승차하고는 검표원에게 들통나 벌금을 물고 열차에서 쫓겨날 것을 걱정한다(도마뱀 사나이와 AK 콤비는 영화 '나홀로 집에'의 두 도둑같다고나 할까). 평범한 보험계리사는 졸지에 두 명을 살해한 살인자가 되는데 한 명은 토끼의 귀에 맞아죽고, 다른 한 명은 저혼자 운전하다 나자빠져 죽는, 한마디로 얼떨결에 죽임을 당한 꼴이다.  


물론 이 소설이 웃기기만한 건 아니다. 사라진 시체의 행방, 차에 갇힌 또 다른 시체, 암시처럼 던져지는 등장인물들의 대사, 잊을만하면 발생하는 공원 시설물 파손, 헨리의 동선을 귀신처럼 알고 있는 폭력배들, 집요하고 고집스러운 직원들, 그리고 사라진 돈. 산 너머 산이라는 말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난에 분투하는 헨리의 뒤를 쫓으면서 독자 역시 사건 해결에 하나씩 다가가는 맛도 쏠쏠하다.  


이 소설의 강점은 스토리뿐 아니라 주인공과 그외 등장인물 각각의 독특한 개성에 있다. 반드시 공원의 CEO가 되겠다는 크리스티안, 스토리가 진행되는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미스터리한 벤라, 우격다짐으로 마케팅 예산을 올려달라는 민투 K, 공원 내 카페에 진심인 요한나, 헨리에게 처음 겪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 라우라 등 그들과 헨리의 케미는 독자에게 은근한 감동을 준다.  


헨리는 처음 탐험공원에 왔을 때 공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낭비라고 여기며 공원을 없애고 싶어했던 마음과는 달리 공원을 보호하려고 한다. 헨리는 공원을 사랑하고, 이곳을 구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것이라고 다짐하는데, 이제 헨리에게 있어서 공원은 단순한 물리적 소득 생산 공간을 넘어서 직원들의 삶이 녹아 있는 공간이고 자신의 미래가 될 꿈이기도 하다. 


평생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됐는데, 단물만 쪽쪽 빨리고 가차없이 차인 헨리. 그러나 이 소설의 반전은 'power of love'.  


사랑, 헨리가 찾아낸 완벽한 방정식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