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귀 살인사건
안티 투오마이넨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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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 헨리 코스키넨은 수학자이자 보혐계리사다. 권고사직을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의 사망 소식과 함께 그가 소유하고 있던 탐험공원(일종의 놀이공원) '너랑나랑공원'이 상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탐험공원 직원들은 새로 부임한 대표가 떨떠름하다. 직원들이 마음에 안 들기는 헨리도 마찬가지. 공원의 회계 장부를 살펴본 헨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공원의 사업 활동은 마이너스 없이 지속 가능하고, 오히려 이윤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형은 청구서 대부분을 지불하지 않았고 공원 이름으로 추가 대출까지 받았다. 시간 순서를 보면 회계사무소가 계약을 해지했을 무렵부터 청구서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뒤로는 거의 모든 것이 체납되었다. 대출금과 탁자 위에 놓인 미지불 청구서를 모두 합하면 거의 20만 유로 가까운 돈이 겨우 1년 사이에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정도 돈이면 사용 흔적이 분명히 어딘가 있을텐데 어디에도 돈의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낭비와 사치하고는 거리가 먼 형이다. 도대체 그 많은 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수학적 사실에 입각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것을 최우선시 하는 헨리 앞에는 이제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합리적인 사건들이 줄줄이 펼쳐진다.  





 



소설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모든 상황을 수학적으로 판단하며 공감력 부재와 타인과의 관계를 철저히 무시하는 중년 남성 헨리의 내면 성장기를 누아르와 스릴러 형식으로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다.  


헨리는 다른 사람의 기분, 생각, 감정을 알 필요가 없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어지간해서는 웃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직원들의 요구와 그들의 개인적인 사정을 들으면서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면의 변화가 일어난다. 무엇보다 라우라만 대면하면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자신은 온데간데 없고 생각지도 않은 말과 행동이 툭 튀어나온다. 무엇보다 그녀와 대화할 때면 헨리는 웃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헨리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제 입장에서만 감정이 앞서 막무가내로 일방적인 요구만 하던 직원들은 객관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헨리를 통해 그들이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즉 '탐험공원'이라는 공간 안에서 서로에게 필요했던 부분이 무엇인지를 깨달음으로써 상호작용을 하는데, 이 방식이 진지한 토론이나 회의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곤란함을 피하기 위한 임기응변식 잔꾀였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효과를 보았다는 점에서 재미있고, 특히 헨리의 어리바리한 모습이 머릿속에서 영상처럼 떠올려져 읽는 동안 내내 웃었더랬다.  


ㅡ 


이 소설의 백미는 블랙코미디다. 
암살자는 어처구니 없게 싸움이라고는 말싸움도 제대로 못하는 평범한 사람에게 조형물의 귀로 맞아죽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살인도 마다않는 암흑가 사내들이 신용카드와 체크카드가 없어서 열차에 무임승차하고는 검표원에게 들통나 벌금을 물고 열차에서 쫓겨날 것을 걱정한다(도마뱀 사나이와 AK 콤비는 영화 '나홀로 집에'의 두 도둑같다고나 할까). 평범한 보험계리사는 졸지에 두 명을 살해한 살인자가 되는데 한 명은 토끼의 귀에 맞아죽고, 다른 한 명은 저혼자 운전하다 나자빠져 죽는, 한마디로 얼떨결에 죽임을 당한 꼴이다.  


물론 이 소설이 웃기기만한 건 아니다. 사라진 시체의 행방, 차에 갇힌 또 다른 시체, 암시처럼 던져지는 등장인물들의 대사, 잊을만하면 발생하는 공원 시설물 파손, 헨리의 동선을 귀신처럼 알고 있는 폭력배들, 집요하고 고집스러운 직원들, 그리고 사라진 돈. 산 너머 산이라는 말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난에 분투하는 헨리의 뒤를 쫓으면서 독자 역시 사건 해결에 하나씩 다가가는 맛도 쏠쏠하다.  


이 소설의 강점은 스토리뿐 아니라 주인공과 그외 등장인물 각각의 독특한 개성에 있다. 반드시 공원의 CEO가 되겠다는 크리스티안, 스토리가 진행되는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미스터리한 벤라, 우격다짐으로 마케팅 예산을 올려달라는 민투 K, 공원 내 카페에 진심인 요한나, 헨리에게 처음 겪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 라우라 등 그들과 헨리의 케미는 독자에게 은근한 감동을 준다.  


헨리는 처음 탐험공원에 왔을 때 공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낭비라고 여기며 공원을 없애고 싶어했던 마음과는 달리 공원을 보호하려고 한다. 헨리는 공원을 사랑하고, 이곳을 구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것이라고 다짐하는데, 이제 헨리에게 있어서 공원은 단순한 물리적 소득 생산 공간을 넘어서 직원들의 삶이 녹아 있는 공간이고 자신의 미래가 될 꿈이기도 하다. 


평생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됐는데, 단물만 쪽쪽 빨리고 가차없이 차인 헨리. 그러나 이 소설의 반전은 'power of love'.  


사랑, 헨리가 찾아낸 완벽한 방정식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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