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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평점 :
N25018
"더이상 세상의 일들을 집착하지 않게 되면서부터 인생이란 그저 사소한 우연의 연속처럼 보였다. 인생이란 납득하는 일이지, 따져보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읽은 김연수작가님의 작품은 단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과연 그럴까 라는 의심반 기대반으로 선택한 다음 작품은 단편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였다. 표지가 좀 별로여서 이번에는 기대를 좀 내려놨으놔... 결과는 전혀 아니었다. 도대체 이렇게 좋은 단편만 모아놓을 수 있는게 가능한건가?
단편들은 모두 인상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쓸쓸함과 우울함이 가득하며, 사람과 사랑에 대한 질문들이 계속 나온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게 가능하긴 한걸까? 기록이라는게 진실을 다 담을 수 있는 걸까? 삶에 있어서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정도일까? 이 단편집을 다 읽고 나면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다.
[한 개인의 진실이란 깊은 밤, 집자리에 누워 아무도 몰래 끼적이는 비망록에나 겨우 씌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비망록이 씌어지는 곳은 그 사람의 마음속이니 사랑하고 서로 살을 비비며 살아가는 부부라고 하더라도 옆에 누운 사람의 비망록을 들여다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P.284(이렇게 한낮 속에 서있다)
이 단편집은 겨울에 딱 맞는 책이다. 봄에 읽는건 계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모든 단편들이 좋았지만 그중 몇개만 골라본다면...
1.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그녀에 대해 말해야겠다."
제목을 보고 하루키가 떠올랐다면 내가 이상한걸까? 그런데 작품을 읽으면서도 왠지 하루키 느낌이 났다. 작가님한테는 죄송하지만...
배경은 런던, 세희와 나(네즈미)는 동거중이었고, 어느날 세희의 동생 세영이 영국으로 온다. 칠년만에 만난 자매는 지나온 세월 만큼이나 어색하다. 동생 세영은 한국에서 남편이 사고로 죽은 후 심한 정신적 고통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감을 갖게 하는 일이 어떤건지 알고 싶어서 동생 세영은 나(네즈미)와 섹스를 한다. 그리고 이를 목격한 세희는 나(네즈미)와 헤어지기로 한다. 왜 동생 세영은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감을 갖게 하는걸 궁금해 했던걸까? 남편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동생 세영은 나(네즈미)에게 이런말을 남기고 한국으로 떠난다.
"우린 이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야."
한국으로 돌아간 동생 세영은 자실을 하고, 세희는 이 소식을 나(네즈미)에게 알린다. 세희는 동생 세영이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해서 자살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네즈미)는 그게 원인이 아니라는 걸 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게 어디까지 가능한걸까?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 든다는 것은 무모한 열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열정의 대상이 된다는 건 확실히 부러운 일이었다. 어쩌던 그때 나는 그녀가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P.49
2. <뿌넝숴>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비 이야기라면 어떨까? 가슴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서는 삶을 온통 뒤흔들어놓는 빗줄기 말이지."
'뿌넝숴'의 뜻은 '말할 수 없다'라는 중국 말이다. 우리는 현실을 어느정도까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을 다시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있다면 진실을 전할 수 있을까?
[세상 가장 작은 소리에도 쫑긋 귀를 세우는 사람들로, 세상에는 그렇게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꽃이 피었다가는 또 져버리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어찌 봄이 왔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꽃들이 피어오르겠는가 말이야.] P.77
이 단편은 6.25.전쟁에 참가했던 중국의 노병이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동료들이 죽어가는 전쟁속에서 노병은 한쪽 다리를 잃고 손가락을 잃지만 조선인 구호대에 의해 살아남는다. 그녀의 피를 수혈받아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면서. 전쟁사에는 단지 숫자로만 죽음이 기록되지만 그게 전부일수는 없고 진실일 수는 없다. 책에 씌어진 이야기보다는 몸으로 겪은 이야기가 진실이다.
[사실 전쟁은 재미있지만, 전쟁 이야기는 재미없어.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으니까. 내가 전쟁이란 삶을 닮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P.69
3.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나는 이렇게 썼다."
시작부터 '왕오천축국전'이 나온다. 2인칭 시점을 가장한 전지적 시점의 작품인 <다시 한달을...>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주인공인 너(?)는 방에 틀어박혀서 집에 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다. 집에 있는 책을 다 읽자 드디어 방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는 곧장 도서관에 가서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으려는 기세를 보인다. 그의 그런 행위는 책속에서 여자친구가 자살한 원인을 찾기 위해, 위안을 받기 위해서였다. 왜 그녀는 유서에서 그에 대한 언급도 없이 그렇게 자살했을까? 언급되지 않은건 은밀한 존재였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둘중 하나일텐데...
["부모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용기가 없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야만의 시대에 더이상 회색인이나 방관자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후회는 없어"] P.139 (유서내용)
도서관의 책을 읽던 중 그는 여자친구가 죽기전에 읽었던 마지막 책인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고 그 책을 가져온다. 이후 아홉달 동안 그와 여자친구가 등장하는 소설을 쓴다. 그는 '왕오천축국전'이나 '등반일지' 처럼 일어났던 일들을, 인과관계에 맞는 것들을 소설로 써간다. 하지만 소설을 써내려 갈수록 소설 속 여자친구의 삶 속에서 그가 점점 지워진다는 걸 알게된다. 여자친구와 소통하지 못했던 부분은 글로 쓸 수 없었기에, 그가 모르는 달의 이면이 많았기에...
[하지만 그가 결국 깨단게 된 것은, 아무리 해도, 그러니까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총동원해도' 문장으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이 삶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P.141
이후 그는 1988년 한국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들어가고, '왕오천축국전'에 등장하는 그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여자친구가 자살한 이유를, 그에게 남긴 유서의 의미를 찾을수 있었을까? 아마 그와 함께 한 검은 그림자가 알려줬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과 함께 걸어가는 검은 그림자의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껄껄거린다.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저기. 바로 저기.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니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 P.177
위의 세편 이외에도 다른 작품들 역시 매우 좋았다. 여기 실린 작품들을 쓰기 위해서 김연수 작가님이 관련 역사를 깊이 연구하고 다양한 책들을 읽었겠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괜히 위대한 작가가 아니구나, 역사에 대한 관점을 조금만 다른게 바라본다면 이렇게도 이야기를 쓸 수 있는구나 라는 감탄을 했다. 김연수 작가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