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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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4008

"정말로 네가 예전과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어쩌면 참을성이 더 많아졌겠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확실히 낮아졌고."


내가 소설을 주로 읽는 이유는 간접체험 때문이다. 매일 접하는 일상적인 이야기 보다는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흥미가 많아서, 과거를 살아볼수 있는 고전을 좋아하고, 다른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외국 소설을 좋아한다. 뉴스로 접할 수있는 이야기나 인문학, 역사 분야는 아직 내 취향이 아니다.

그래서 공감이라는 부분은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의 우선순위에서 약간 밀린다. 하지만 '앤드류 포터'의 <사라진 것들>은 달랐다. '간접체험' 보다는 '공감'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앤드류 포터'는 15편의 단편을 통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우리로부터 '사라진 것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인상적인 작품들과 감상평을 간단히 적어보자면...




어린시절 함께 했던 친구들과는 어딘지 다르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더 이상 예전처럼 웃고 놀 수 없는, 가족이 생기면서 책임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그래서 뭔가가 변화되고 위화감을 느끼는 40대 남자의 이야기인 <오스틴>.

우리가 잃버버린 청춘, 그때와 지금은 뭐가 달라진 걸까?

[마치 그들은 멈춘 시간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그동안 나만 다른 곳에서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으며 늙어간 것 같았다.] P.9 (오스틴)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빠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그냥 지켜만 볼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 '나',

[나는 잔을 내려놓고 마야를 바라보았다. 벌써 마야가 떠나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빛이 어딘가 달랐다. 아마도 그 때가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그런 감정을 느낀-이미 가버 린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내 인생의 유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P.58 (넝쿨식물)


하지만 연인이었던 그녀는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그냥 저냥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갑작스럽게 죽게되고, 몇년 후 그런 그녀가 나에게 남긴 그림 하나를 우연히 발견한 후 그녀를 추억하는 이야기인 <넝쿨식물>.

왜 나는 나를 떠나간 그녀를 원망하거나 미워할 수 없었던 걸까? 왜 그렇게 담담하게 보냈던 걸까? 다시는 만날수 없는 그녀를 떠올리면서,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그리고 내게서는 무엇을 원했을까? 라이어널에게서 원했던 것과 같은 것일까? 마야와 나는 우리 인생의 두 해에 가까운 나날을 밤마다 나란히 누워 함께 잤는데 지금도 나는 내가 마야를 진정으로 알았는지 궁금하다. 혹은 마야가 나를 진정으로 알았는지.] P.65 (넝쿨식물)




40대에 접어든 나는, 첼리스트인 아내 '내털리'에게 어지럼증과 균형감감 이상이라는 증상과 신경질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고, 그녀의 이런 증상이 파킨스병과 연관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우리 몸은 더이상 건강할 수 없고, 삶도 과거와는 같을 수 없으며, 불길한 미래가 안오기만을 바래야만 하는 이야기인 <첼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허약해 지는 건 몸 뿐만 아니라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갑자기 나에게 내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가끔씩 떠오른다.

[지금까지 여러 달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이 회 색 지대를 부유하면서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채로 모든 결과를 조마조마 걱정하고, 혼자 있는 순간에는 요즘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있 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하며,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 P.92 (첼로)




언제나 함께일것만 같았던, 영원한 관계일 것만 같았던 친구들. 하지만 영원한 건 없다. 오랜 세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었지만, 어느 순간 더이상 필요가 없어지고, 불편해지는 시기가 오게 된다. 그런 시기가 왔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는 않고, 말하기는 더 쉽지 않겠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불편한 진실...돌아보니 너무 많이 와버려서, 이제는 친구들 없이 나를 그릴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린 '나'에 대한 이야기인 <라인벡>.

나는 왜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모든 청춘을 쏟았던 걸까? 그래도 그 시절의 추억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여전히 나를 위로하긴 하지만...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꿈을 꾼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 P.127 (라인벡)




나의 능력이 부족해서 직장을 잃었지만, 나에 대한 의심보다는 친구의 모함에 의해 직장을 잃었다고, 그래서 나를 누구보다도 챙겨주는 그 친구의 선의를 의심하고 질투하고 상처주는 이야기인 <실루엣>.

나이가 들수록 실패와 잘못의 원인을 타인과 주위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나의 부족을 인정할 수 없어서 그런걸까? 아님 나를 탓하기에는 내가 너무 가여워서 그런걸까?

[대화는 한참을 그런 식으로ㅡ어색하게 띄엄띄엄ㅡ뚜렷한 방향도 목표도 없이 계속되었다. 분명 폴과 개릿은 어떤 화제를 피하고 있었다. 예컨대 내가 심리학과에서 일하던 시절, 폴의 연구 주제, 개릿이 이룬 업적을 비롯해 내가 예민하 게 반응할 거라고 판단되는 모든 것들을 건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공통의 관심사 없이는, 애초에 오래전 우리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했던 그런 주제들 없이는, 할 얘기가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P.178 (실루엣)




우울을증 겪고 있는 아내, 그리고 세탁실에 생겨난 벌집... 아내는 가끔 따로 지내고 싶다며 나와 아이를 남겨 두고 다른 숙소를 얻는다. 그렇게 나는 멀어져 가는 아내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고, 아이는 엄마의 존재를 그리워하면서도 원망한다. 떨어져 지낼수록 가족의 갈등은 점점 깊어진다, 그리고 결국 폭발한다. 가족의 갈등과 함께 (은유적으로) 늘어나는 벌에 대한 이야기인 <벌>.

도대체 그렇게 가까웠던 마음은 무엇때문에 멀어지는걸까? 한 사람을 안다는건 왜 그렇게 어려운 걸까?

[그때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우리가 다른 단계로, 좀더 깊은 단계로, 끝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저멀리 마당 끝자락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그곳 어둠 속 어딘가로 그들이 돌아왔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세탁실 벽 주위를 느린 동작으로 선회하며 아마도 그 숫자를 점점 불려가고 있을 그들이.] P.230 (벌)





그래도 역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은 표제작인 <사라진 것들> 이었다. 주인공인 '나'와, 부인인 '타냐'에게는 최근에는 자주 보지 못했지만, 오래된 친구인 '대니얼'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 죠슈아 국립공원에서 실종된 것이다. '대니얼'에게는 '앙투아네트'라는 여자친구가 있었고, 나는 '대니얼'의 짐 정리를 도와주기 위해 '대니얼'의 집으로 간다. 아내에게도 함께 가자고 하였지만 그녀는 거부한다. 그곳에서 그는 친구의 여자친구인 '앙투아네트'와 기묘한 이틀을 보낸다.

과거 '대니얼'의 연인이었을 거라 추측되는 '타냐', 최근에 나는 '타냐'와의 관계에서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대니얼'이 실종되고 나서는 그 위기가 더 커짐을 느낀다. 나는 나의 상실과, '타냐'의 상실, 그리고 '앙투아네트'의 상실 사이에서 뭔가 다름을 느낀다. 오래된 친구의 상실과 함께 찾아온 불안감과 기묘함.

도대체 나에게 '사라진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친구? 아내? 마음? 아니면 바로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마침내 눈을 뜨고 앙투아네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있었다. 미소를 짓지는 않았지만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고, 그래서 나는 그녀도 아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우리는 아주 이상한 이틀을 함께 보냈다고, 그리고 내가 떠난 뒤 우리는 아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어쨌든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에겐 아직 반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 순간이 계속되는 척할 반시간, 어둠 속에서 고요히, 하지만 둘이서 함께 물에 뜬 채로 누워있을 반시간, 해가 뜨고 어둠이 걷히면서 이젠 떠나야 한다는 것을,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끼며 깨닫기 전까지의 반시간.] P.325 (사라진 것들)






쓰다보니 주저리 주저리 글이 길어졌는데...<사라진 것들>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 책은 '40대라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청춘에 관한 이야기들' 이라고 하고 싶다.

이제 어느정도 삶을 경험한 나이가 되고보니, 얻는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아졌고, 희망보다는 후회가 늘었으며, 몸은 더이상 건강하지 않다는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사라진 것들>을 읽는 내내 나의 지나간 청춘과 내게서 사라져 버린 것들을 돌이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수도 없는, 그저 추억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뭐 그렇다고 지금이 나쁜건 절대 아니지만...)

이래서 책을 끊을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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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2-17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 어제 잠깐 리뷰 쓰다가 임시저장 해둔 상태인데.. ㅎㅎ 새파랑님이 잘 요약해주셨네요!^^

새파랑 2024-02-17 17:04   좋아요 1 | URL
앗 ㅋ 밀린 리뷰나 써보자고 해서 썼는데,

책 읽은지 시간이 좀 지나서 기억이 안나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읽었습니다 ~!! 먼가 급하게 쓴다고 두서없이 썼습니다...

미미 2024-02-18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밀린 책이 많아서 엄두를 못 내는
소설인데 평이 다 좋네요.^^

새파랑님이 책을 끊으면 안되죠 술도요ㅎㅎ

새파랑 2024-02-18 18:19   좋아요 1 | URL
오늘은 오후부터 각잡고 조셉콘래드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ㅋ 재미있네요~!!

당분간 주말은 술 안마시는걸로 하고 있습니다ㅋ

페넬로페 2024-02-21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간접체험과 공감을 다 할 수 있는 소설을 원하는데 새파랑님께서는 간접 체험이 우선이시군요 ㅎㅎ
이 책 좋다는 평이 넘 많네요
기대됩니다^^

새파랑 2024-02-21 10:05   좋아요 1 | URL
이 책 정말 좋습니다. 2024년 올해의 책~!! 페넬로페님은 이 책 완전 좋아하실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