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사랑이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며, 아마도 이젠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3

불을 켜자 하늘에 남아 있던 것이 자취를 감췄다. 언덕과 별들을 보려면 불 곁에서 약간 떨어져야만 했다. - P14

사람들은 외쳤죠. 러시아 남자라고? 그런 일을 당하고도 어떻게 러시아 남자를 사랑할 수 있지? 그럴 때면 그녀는 약간 기분이 상해서 어깨를 으쓱하곤 했죠. 당연히, 사랑을 하면서 국적을 고려했던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동포들은 그녀를 무척이나 비난했죠. 이웃들은 길에서 만나도 그녀를 빤히 보며 인사조차 하지 않고 지나쳤지요. 용기 있는 사람들은 혼자 있는 그녀를 만나면 큰소리로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죠. 이를테면 군대 선봉에 서서 그녀를 짓밟고 지나간 사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 P27

장교에게는 전속을 준비할 시간이 사십팔시간 있었는데, 그는 즉각 준비를 했죠. 탈영해서 그녀와 함께 프랑스 영역으로 달아나기로 마음먹은 겁니다. 그들이 프랑스 영토를 택한 것은, 프랑스 인들이 남달리 사랑 이야기를 잘 이해한다는 평판 때문이었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 P30

제가 만족하는 법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시죠. 그렇지만 그런 걸 어쩌겠어요. 어떤 막연한 욕구, 여기 있고 싶지 않은 욕구가 생기는 걸요. - P32

- 독일 사람이오?
-네.
그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그는 가방을 바에다 내려놓았다.그렇다면 우리는 동포나 다름없군요. 나도 조금은 독일인인 셈이오. 말하자면 거기 정착해 살았으니까요. 나는 전쟁 때 끌려가서 이년 동안 여기저기 수용소에서 생활을 했소. 영원히 그곳에 남을 뻔도 했죠. 그 나라에 정이 들어서. - P53

나는 코끼리를 잡지 않아요. 코끼리들과 함께 살 뿐이오. 코끼리를 좇고 연구하느라 몇 달씩 보내곤 하지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코끼리를 보고 감탄하죠. 사실 난 코끼리가 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건 내놓을 거요. 좀 전에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난 독일 사람에 대해 특별히 나쁜 감정이 없어요. 내가 싫어하는 건 훨씬 광범위한 것입니다. - P54

그래서 개머리판으로 이놈을 쳤죠. 이 못된 놈이 코끼리 떼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걸 다시 보는 날이면 내 이놈을 묵사발 내놓을 거라고, 그리고 코끼리들도 가만 있지 않을 거라고 하비브에게 전하시오. 그뿐이오. 안녕히 계시오. - P55

원주민들에게는 적어도 구실이 있다. 그들 식량에 단백질이 모자란다는 구실이다. 그들은 먹기 위해 코끼리를 사냥한다. 코끼리가 그들에게는 고기인 것이다. 그러니 코끼리를 보호하려면 먼저 아프리카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어야 한다. 이는 자연보호를 위한 모든 캠페인의 선결조건이다. 그러나 백인들은 어떤가? 그들은 ‘스포츠‘로 사냥을 한다. 총질의 ‘아름다움‘을 위해?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의 부드러운 갈색 눈에는 그 어떤 말보다 분명한 비탄의 표현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첫마디에 곧 명료하게 이해했다. 이 사람에게도 고독이 문제라는 것을. - P57

그들이 건드릴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 그들이 우리에게서 앗아갈 수 없는 어떤 허구, 어떤 신화가 있어 그것이 우리를 지탱하게 해준다는 사실이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죠. - P61

그리고 그가 마음 깊이 느끼고 있는 어떤 것을 말로 표현하다 보면 그 의미가 달라져버려 그것을 전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말을 하면서 자기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가끔은 생각만으로 충분한지, 생각이 단순히 모색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참된 시각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닌지, 인간의 뇌 속에 아직 사용되지 않고있는 신경이 있어서 언젠가 이 생각들을 무한한 비전의 영역으로 몰고 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 P80

파리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정치적 테러라는 보고를 받고 싶었던 모양일세. 내가 보고서 내용을 견지하니까 그들은 정말 빈정거리는 어조로 내게 대꾸하더군, 만일 이 사건이 조직적인 행동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난 용서받을 여지가 없을 거라고 말일세. 정말이지 그들은 내가 단지 차드에서 마우마우 테러 집단을 길러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내 책임을 다 못했다고 질책하는 것 같았네. 결국 그 사람들은 식민지 정책이 반란 폭동이나 학살에 이르지 않는 한 성공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야. 어떤 의미로는 그들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 P86

그러나 신문기자들은 계속해서 그를 둘러쌌다. 모렐이 반기를 들기 전에 지사님께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늘 거절당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이 사건이 세상에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대중의 동정은 모렐 편, 코끼리 편으로 기울지 당국 편으로는 기울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해마다 삼만 마리의 코끼리를 죽인다는 것, 그것이 모두 당구공과 페이퍼나이프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 사실입니까? 현재 금렵지구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 P101

개인적으로는 물론 그들이 어떤 민족주의자들이건 상관 않소. 흑인이건 백인이건, 황인이건 홍인이건, 구세대이건 신세대이건 말입니다. 내 관심을 끄는 건 오직 자연의 보호뿐이오. - P154

내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코끼리 사냥을 금한다는 선언뿐이오. 그것만 실현되면 나는 곧 항복할 것이오. 그들이 나를 감옥에 넣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를 단죄할 프랑스 법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소. - P158

그제야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나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의 신화에 어울리는 사내를 발견하게 되리라고 기대하며 그를 맞으러 나갔지요. 그리고 그의 단순함과 작은 키, 약간 거친 그의 얼굴에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단순함이란 사람들이 이야기를 지어내고 천진성에 관해 끊임없이 말하는 모든 민중의 영웅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단순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나는 그를 전혀 다르게 보고 있어요. - P161

가엾은 모렐. 그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인간들과 더불어 인간적인 이상을 옹호하려고 하는 그 모순을 해결한 사람은 지금껏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 P186

그러면 드 생드니 씨, 왜 그녀가 내 이름 앞에 ‘드라는 말을 붙였는지 모르겠더군요) 어떤 사람이 당신들에게, 당신들의 잔인성에, 당신들 얼굴에, 당신들 목소리에, 당신들 손에 질렸다고 해서 당신은 그 사람이 미쳤다고 보세요? 그 사람이 당신들, 당신네 학자, 당신네 경찰, 당신네 기관총과 더는 조금도 닮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신병원에 가둬야 합니까? 요즈음엔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아셔야 해요. 다만 그 사람들은 그가 하는 행동을 할 용기가 없을 뿐이죠. 너무 비겁하거나 너무 지쳤거나 너무 냉소적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이를 이해합니다. 아주 잘 이해하지요. 그 사람들은 그들의 사무실로, 수용소로, 군대로, 공장으로 가서 복종해야 하는 걸 지긋지긋해하지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이를 생각하고 미소 짓지요. 나처럼 말이에요. - P190

오,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동정 따윈 필요 없어요. 많은 남자가 내 위를 덮치고 지나간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건 체념하고 받아들여야죠. 남자들이 바지를 벗었을 때 하는 것으로 그들을 판단할 순 없어요. 정말 더러운 짓을 할 땐 오히려 옷을 입고 하지요. - P191

- 만약 아무도 데려가지 않으면 저 개들을 어떻게 하나요?
- 일주일을 놔두었다가 그 후엔 가스실로 보내죠. 가죽은 회수하고 뼈는 젤라틴과 비누를 만들죠………… - P272

- 이슬람에서는 이것을 ‘하늘의 뿌리‘라고 부르오. 멕시코 인디언들에게는 이것이 ‘생의 나무‘로, 모두들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눈을 들어 아프도록 가슴을 두드린다오. 모렐 같은 고집쟁이들이 청원서며 투쟁위원회, 보호조합 등을 통해 밖으로 드러내려 애쓰는 어떤 보호 욕구 말이오. 그들은 가슴속에 깊이 묻힌 이 하늘의 뿌리들을 드러내려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의 욕구, 자유 욕구, 또는 사랑의 욕구에 응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지요. - P273

모렐,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 대해 자네가 환상을 품지 말았으면 하네. 자네야 괘념치 않겠지만.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은 이긴다는 확신이 있어서 그러는 것 아닌가. 자넨 이길 거야. 그렇지만 내 분명히 말하는데, 자넨 총에 맞아 죽을 거야. - P291

그자에게 그런 괴벽이 생긴 건 나치 수용소에 있을 때였다고 뒤파르크는 주장하더군요. 거기서는 그게 밀실공포증과 철조망에 맞서 싸우는 수단이었던 것 같소. 자기들이 아프리카의 자유스런 공간을 질주하는 큰 코끼리 떼라고 상상한다 말이오! 그게 아직도 그자 마음에 남아 있는 거죠. - P323

알고 있소. 모두들 코끼리를 끌어들이는 걸 교활하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코끼리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저마다 코끼리를 자기 자신에게 맞는 것과 연결시킨다면, 난 그럼 된 거요. 나머지야 뭐, 그들이 공산주의자건, 티토주의자건, 민족주의자건, 아랍인이건, 체코 인이건 상관없소. 그런 건 난 관심없소. 그들이 합의만 한다면 난 된 거요.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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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1-26 1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늘의 뿌리>야말로 로맹 가리
에서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책인
데...

정작 사서 읽지 않고 뻐팅기고만
있네요. 그것 참.

새파랑 2023-01-27 23:17   좋아요 2 | URL
완전 벽돌책입니다~!! 나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진도가 안나가네요 ㅋ 제가 완독해 보겠습니다~!!

희선 2023-01-27 0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끼리는 사랑이다 코끼리가 나오는지... 제가 얼마 뒤 볼 그림책에 코끼리 나와요 그게 생각나서... 새파랑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3-01-27 23:18   좋아요 1 | URL
이 책의 주인공이 코끼리입니다 ㅋ 희선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3-01-28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주말 날씨가 차갑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새파랑 2023-01-29 12:1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ㅜㅜ 카페 가려다가 추워서 집콕중입니다 ㅜㅜ

감기조심하시고 주말 잘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희선 2023-01-31 0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 일월 마지막 날이에요 어느새 2023년 한달이 가는군요 며칠 추웠는데 좀 풀렸습니다 일월 마지막 날 잘 보내고 이월 잘 맞이하세요 새파랑 님 이월에 건강하게 지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3-02-01 12:26   좋아요 1 | URL
이제 2월이 되버렸네요 ㅋ 희선님에게 2월은 좀 더 즐거운 달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