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로맹 가리. 그의 작품은 결말도 완벽하다.

아! 내가 당신을 꼭 만나야만 했을까요, 당신이 내 마음에 들어야만 했을까요, 순진하게도 내가 당신에게 고백해야만 했을까요, 거만하게도 당신은 침묵을 지켜야만 했을까요, 내가 당신을 사랑해야만 했을까요. 당신이 날 절망에 빠뜨려야만 했을까요, 그런데도 내가 당신을 숭배해야만 했을까요. 그래서 당신이 날 살해해야만 했을까요!
레이디 L은 늘 영국 하늘을 무감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은밀한 동요도, 어떤 분노도, 어떤 걱정도 상상할 수 없었다.‘심한 폭우가 쏟아질 때조차 참극은 없었다. 격렬한 비바람조차 그저 잔디에 물을 주는 정도로 그쳤다. 벼락은 아이들에게서 먼곳에 떨어졌고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은 피했다. - P11
그런데 그녀가 하늘에 더 요구하는 게 있다면‘몇 시간이고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며 추억하고 꿈을 꿀 수 있도록 황금빛 둥근 지붕에 청명한 배경을 빌려달라는 것뿐이었다. - P11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진짜 위대해지고 싶습니까? 인류의 역사에서 최고의 저명인사들 가운데 자리하고 싶습니까? 당신의 이름이 영원히 살아남길 바라십니까? 억압받는 대중이 당신 쪽을 돌아보고, 당신의 이름을 환호하고, 그 속삭임이 커져 승리의 노래가 되고, 그 메아리가 자유로운 새 세상에 영원히 울려 퍼지길 바라십니까?" - P52
"극단주의자는 비열한 수단을 이용할 때조차 열광한다. 말하자면 그는 거기서 자기 신념의 정당성을 찾는다. 사람들은 단지 대의가 요구할 때만 피를 흘리지 않는다. 대의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피를 흘린다. 주저하지 않고 이용하는 잔인하고 비열한 수단들에서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의 성스러움과 중요성을 입증해주는 피의 증거를 본다." - P59
그러나 그녀는 이미 아르망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한 마디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와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녀에겐 충분했다. 그러나 그 뒤 오래도록 그녀는 그때 아래층에서 리스트의 선율이 들려오는 동안 그가 한 말을 감미로운 냉소까지 전부 기억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를 너무도 잘 알게 된 그녀가 잘못 생각할 리가 없었다. 그의 아나키 개론에 그녀가 새로운 장 하나를, 마지막 장을 덧붙일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 정도였다. - P70
‘기억하세요. 당신은 다가갈 수 없는 먼 존재입니다. 당신은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올림포스 산에 홀로 선 여신입니다. 누구도 감히 어느 누구도 이런저런 추측을 할 수 없고 아주 멀리서 정중하게 당신을 숭배하며 한숨만 내쉴 수 있을 뿐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에게서 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얻어낼 겁니다. - P99
그녀가 그와 함께 보낸 시간들은 금세 그녀에게 흔적을 남겼다. 그녀는 의식하지 못한 채 감염되듯 조금씩 달라졌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만의 방식, 삶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감추는 냉소적 회의주의, 관대하고 호의적인 배덕까지 허용할 정도로 철저하게 선입견이 없다는 점이 그녀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작용했다. 재빨리 그녀는 그 방식을 자신이 옷 입듯 입는다면 넋을 빼놓을 만큼 잘 어울릴 거라고 판단했고, 단지 쳐다보는 방식만으로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게 해주는 그 기술의 비밀을 파악하려고 애쓰며 디키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는 그녀의 과거에 대해 한 번도 묻지 않았다. - P109
"그자는 썩어빠진 인간이오. 우리가 그에 대해 좋게 말할 수 있는 건 그의 부패가 너무도 명백해서 어떤 면에서는 그가 우리를 위해 일한다고 할 수 있다는 거요. 그가 혁명 과정을 재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는 오직 자기 쾌락에만 관심을 갖는 이기적인 향락주의자요. 냉소주의와 회의주의를 지혜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는 초연한 자유주의자의 태도보다 더 혐오스러운 건 없어요. 게다가 그는 자기 주변의 추악함과 비참함을 보지 않으려고 자기 눈에 예술의 황금가루를 뿌리고 있단 말이오." - P112
"물론, 당신이 원하는 걸 난 할 거예요. 그렇지만 아르망..…….단 한 번이라도 우리를 위해, 여행을 하고 세상을 보고 함께 행복할 수 있게 돈을 남겨둘 수는 없을까요? 왜 당신은 언제나 모든 걸 당신 친구들에게 다 줘야 하죠? 그 사람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떠들어대기만 하고 돈을 허비할 뿐이에요. 저 어설픈 코발스키처럼 말이죠. 그 사람이 성공한 거라곤 자기 친어머니를 날려버린 것뿐이잖아요. 웃기지 않아요?" - P114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고서 어떻게 사랑할수 있죠? 나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나더러 완전히 달라져서 다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할 수 있죠? 내가 혁명의 소명을 거부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오. 나 자신을 포기하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으라고 요구할 순 없소. - P115
"남자에게 육체적 끌림을 느낄 때마다 여자는 언제나 그 남자의 영혼에, 아니 조금 더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그 사람의 지성에 매료되었다고 주장하죠. 그가 지적인지 아닌지 말 한마디 내뱉을 시간이 없었을 때조차 말입니다. 이 경우도 그런 것 같군요. 당신이 그자의 영혼을 찬양하니 말이오…………. 육체적 끌림을 정신적 사랑과 혼동하는 건 정치와 이상주의를 뒤섞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아주 나쁜 일이지요. 좋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그러니까 그……… 명백하게 일어난 일 말고, 그래서 당신이 대단한 만족을 얻었던 것으로 보이는 일 말고 말입니다." - P125
"움베르토 암살을 제대로 성사시키는 데 정확히 얼마가 필요한 거요? 그 계획에 드는 비용을 전부 내가 부담할 테니 제발 부탁인데 그 귀고리는 좀 가만히 내버려두시오. 그건 그녀가 아끼는 겁니다. 당신이 좋다면 당신이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라 칩시다." - P140
당신과 나, 우리는 둘 다 친구들에게 하듯 사물들에 애정을 줄 줄 알죠. 그것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이 무생물이라고 말하는 것들의 불가사의한 세계를 돌볼 줄 알죠. 사물은 우리가 버려둘 때만 무생물이 되는겁니다. 사물들이 살아나려면 눈길과 우정이 필요해요. 내가 죽게 되면 내 친근한 세계가 모조리 흩어질 겁니다. 사방으로 날아가버릴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정말 고통스럽소. 나는 당신이 내 뒤를 이어 내 작은 마법의 세계를 지켜주었으면 하오. 당신이 나와 결혼해주길 바라오. - P146
‘그녀‘ ‘그 여자‘ ‘다른 여자‘라는 이름으로 아네트는‘ 자신의 경쟁자를 생각했다.인류를 뜻하는 프랑스어 ‘humanité‘는 여성형 명사다. 그녀는‘인류를 자신에게서 연인을 빼앗아 가려는 까다롭고 만족할 줄 모르는 여자로 보기 시작했다. 그렇다. 공주, 대단한 귀부인, 바로 이것이 그 여자였다. 무정하고, 냉혹하고, 무시무시하게 변덕이 심하고, 피 흘리는 놀이를 좋아하는 여자. 그 밖에 사상이며 대의며 정치적 명제들, 이 모든 건 너무 복잡하고 비현실적이었다. - P149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그것은 ‘아무‘를 의미했다. 기껏해야 투박한 콧수염과 중산모를‘쓴 자유, 평등, 박애가 찾아와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단두대로 향하는 길을 그에게 가리키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참으로 이상해. 고귀하고 관대한 생각도 도를 넘어서면 곧 편협해져버리니.‘ 그녀는 다정한 적개심을 품고 그를 바라보고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생각했다. - P216
"난 정말이지 운이 나빴어요. 술주정뱅이를 사랑할 수도 있었고 도박꾼이나 협잡꾼을, 약물중독자를 사랑할 수도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죠! 어째서 진짜 이상주의자여야 했을까요.‘그래서 나 또한 테러리즘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죠. 내가 훌륭한 학생이었다고 말해둡시다. 내 사랑, 내가 얼마나 자주 이곳에 와서 당신께 미소 띤 절망감으로 이 시를 암송했던가요? - P226
그녀는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권총은 가죽 가방 옆에 떨어져 있었고, 노란 궁정 의상에서 먼지가 살포시 날았다. 아르망은 명상하는 자세로 앉아서 손에 들고 있는 붉은 망사 장미를 향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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