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와 마지막 숨결은 너무 좋다. 역시 로맹 가리다.


<폭풍우>
침묵이 흘렀다. 페슈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엘렌은 불규칙한 리듬으로 거칠게 헐떡이는 그의 숨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무슨 일로 이 외딴섬까지 찾아온 건지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베란다 앞쪽에 펼쳐진 안뜰은 텅 비어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절망적으로 맑고 구름 한 점 없었다. - P27

<폭풍우>
그는 이제 곧 죽을 터였다. 곧 죽을 인간이 남은 자들의 앞날을 염려하는 건 웃기는 일이었다. - P39

<폭풍우>
"그는 나병에 걸렸어. 퓌지 섬 원주민에게서 옮은거지. 그 섬에선 아주 흔한 병이니까. 그런데 엘렌,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 갑자기 둔탁한 우르릉 소리에 방갈로가 지붕까지 흔들렸다. - P42

<마지막 숨결>
나는 호기심을 안고 그 가게로 들어갔다. 사실 어떤 기대감에 들떠 있기도 했고, 쉰셋이라는 나이에, 게다가 숨가쁘게 분주한 삶을 살아온 후에 아직도 새로운 종류의 희망이나 미지의 경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덤벼든다는 건 그 자체로 고무적인 일이니까. - P46

<마지막 숨결>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자기가 사랑했던 여자에 대해 말할 때, 그 여자가 아주 아름답고 지적이고, 완벽했다고 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과장은 과거를 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전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P66

<마지막 숨결>
물론 내가 다른 여자를 그녀만큼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 이후로 내가 더이상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일 뿐인지도. - P67

<마지막 숨결>
결국 나는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을 찾아내려 애쓰고 그 누군가에게 희망을 걸면서 평생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 P85

<마지막 숨결>
나는 전화번호부, 사람들과 휴머니즘으로 가득 찬 그 책, 이 세상의 어떤 책도 아닌 바로 그 책, 한 휴머니스트의 마지막 숨결과 함께하기에 가장 적합한 바이블과도 같은 그 책을 손에 든 채로 방 안에 서 있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 P85

이 모든 게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 오직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 그리고 기억 속의 젊은 얼굴들은 결코 늙지 않을 것이다. - P103

게다가 뭘 해서 먹고사냐니? 그건 정말 어이없는 질문이다. 당신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그건 살아 있다는사실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삶 자체를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 - P161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01-22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쉬! 가리옹!👍

새파랑 2022-01-22 12:44   좋아요 1 | URL
역시 가리옹 x2

리뷰 쓰려다가 날씨가 좋아서 외출했어요 ^^

바람돌이 2022-01-22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이 책은 제가 모르는 책인데요. 가리옹 책 또 하나 겟하는 순간입니다.
외출은 즐거우셧나요?

새파랑 2022-01-22 18:43   좋아요 1 | URL
이 책은 로맹 가리의 사후에 출판된 단편집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앞의 두 단편이 너무 좋네요~!!

집에는 아직 안들어갔습니다 ^^

서니데이 2022-01-22 2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전화번호부가 우리나라도 집에 있던 시절이 있었지, 그러면서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세어보니 한참 전의 일이 되었네요.
새파랑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새파랑 2022-01-22 22:20   좋아요 2 | URL
이젠 집에 전화도 없는집이 많더라구요. 저도 어렸을때 전화번호부 넘겨보던 기억이 나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