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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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파티」

2022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처음 접했던 작품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별 감흥 없이 읽고 넘겼던 것 같은데, 다시 읽으니 내가 그때 왜 그리 큰 감동이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적지 않은 등장인물들이 한 장소에서 계속 대화를 해대니, 빡-집중 하지 않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놓치기 쉽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번엔 독서모임을 준비하며 개-빡집중 하며 읽었고, 다행히 여러 생각할 지점들과 전에는 얻지 못한 울림을 얻을 수 있었다.

다시 읽으며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다름 아닌 ‘결말’이었다. ‘묘한 만족감’ 내지는 ‘승리감’(41p)을 느끼던 ‘오대표’라는 인물에게 주인공이 오묘하고도 적확한 복수를 한 것이 확 와닿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오대표가 ‘여왕벌’ 같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 모임을 주최한 사람이자 자신의 언행에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처럼) 동조하지 않으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인물,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에 보였던 주인공의 ‘사랑에 빠진 사람’(43p)을 연기한 것은 여왕벌의 날개를 꺾는 듯한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기에 나는 얼마간의 통쾌함과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숲속 작은 집」

이 소설은 초반이 무척 흥미로웠다. 여행을 떠나 외진 숙소에서 머물고 있는 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인데, 그들이 머물고 있는 방에 있는 물건들이 묘하게 위치가 달라지는 등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무언가를 훔쳐간 것이라면 차라리 이해라도 되겠는데, 없어진 물건은 없고 오히려 ‘왠지 의도한 것처럼’(62p) 느껴져 더욱 호기심이 자극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소 뻔한 이유로 밝혀진다.) 아무튼 앞선 「홈파티」와는 다르게 서사 진행 자체가 대단히 흥미롭고 재밌게 읽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일단 인물들에게 공감 내지는 감정이입을 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는데, 이들의 생각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던 것이다. 먼저 ‘메이드’라는 단어를 두고 두 부부가 약간의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직원’이라는 쉽고 친절한 단어를 왜 생각하지 못하고 싸우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작가가 의도하여 일부러 페미니즘적 주제의식을 넣으려고 한 걸까 싶은데,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부모님이 돈을 보내줘서 ‘고맙고 미안하다’고 한 문자를 보고 주인공은 뿌듯함이 아닌 ‘오랜 시간 상대가 내게 주었다 생각한 무언가를 도로 빼앗은 기분’을 느끼는데… 이 무슨 배은망덕인가??

「좋은 이웃」

가장 현실적으로 읽혔던 소설이다.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적인 민낯을 낱낱이 고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달까? 신형철 평론가가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였’다고 말한 이유를 납득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좋은 이웃」에서는 부동산 대란 사태를 맞은 일반 서민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소설 속 주인공은 현재 살고 있는 집을 계약할 때 대출을 낀 매매가 아닌 ‘전세’로 했고, 이를 지금에 와서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가’를 가진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넘어서는 열등감, 자격지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 소설이 좋았던 점도 바로 이런 데에 있다. 현실의 민낯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는 데에 있다. 쉽게 말해 어떤 인물의 선/악을 구분케 하지 않고 강점과 약점을 모두 묘사하여 이것을 주제의식으로 끌어낸다는 것이다. 작품의 제목이 ‘좋은 이웃’인 것도 바로 이 소설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 주제의식이 문학의 근본적 탐구 주제인 ‘연대’와도 이어지기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마음 깊이 공감하고 감탄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142p)

「이물감」

김애란 작가는 못 쓰는 게 뭘까? 「숲속 작은 집」의 도입부에서는 스릴러 소설만의 음산한 분위기를 구현해내더니 「이물감」에서는 찌질한 중년 남성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심리 묘사를 선보인다. 소설 속 주인공 ‘기태’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에게 여러 가지의 찌질한 행보를 보인다. 전부인의 SNS 계정을 염탐한다던가, 전부인의 썸남으로 추정되는 훈훈한 남성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음식을 냅다 남기고 오는 소심한 복수를 한다던가, 부하 직원들에게 쓴소리 격인 충고를 하다가 되려 역공당하고 후회한다던가 등등… 하지만 이런 주인공의 행동을 욕하기만 하기엔, 우리도 남몰래 어디선가 해봄직한, 아주 ‘현실적인 찌질함’이었다. 그래서 주인공을 보며 혀를 쯧쯧 차면서도 왠지 모르게 미운정이 간다.

그러나 만일 기태의 가슴에 어떤 그리움이 남았다면 그건 희주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한 시절들 때문이었다. (155p)

「레몬케이크」

솔직히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 중 가장 아쉬웠던 작품이 바로 「레몬케이크」다. 개인적으로 취향에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몇 가지 있는데,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날카로운가’ 아니었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 많았는가’ 아니었다. 딱 하나 있었다. ‘주인공이 매력적인 인물인가’ 이 또한 아니었다. 특색 없이 너무도 무난한 인물이었다. ‘해피엔딩이나 구원의 서사인가’ 절대 아니었다. 물론 이 소설이 절대 ‘혹평’을 남길 만한 안 좋은 작품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내가 그리 느낀 바가 크지 않아서 할 말이 없을 뿐이다. 어차피 여러 편의 소설이 수록된 단편집에서 모든 소설이 좋은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런 소설 하나 쯤이야 눈감아줄 수 있다. (나 뭐 돼?)

「안녕이라 그랬어」

이 작품이 표제작이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바로 「안녕이라 그랬어」였다. 씁쓸하고도 뭉클한 여운이 일품이었고, 소설 속 등장인물 모두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따뜻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이 소설의 주제의식 또한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이었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이 소설에는 세 명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은미’와 그의 전남친 ‘헌수’, 그리고 은미의 화상영어 선생님 ‘로버트’까지. 앞서 언급했듯이 세 인물은 모두 성품이 따뜻한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은미와 헌수는 이미 이별하였고, 로버트와 은미의 수업도 결국 끝나게 된다. 어째서일까. 좋은 사람임에도, 그것을 알면서도 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이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사람임을 알더라도 헤어져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헤어질 때, 헤어져야할 때 우리는 ‘안녕’이라 말할 것이다. ‘안녕’이라는 표현에는 단순한 인사말 의미 외에도, ‘아무 탈 없이 편안함’이라는 뜻도 있으니 말이다.

「빗방울처럼」

‘전세사기’라는 소재를 전면으로 끌어올린… 독자로서 읽는 내내 너무나도 마음이 무겁고 아팠던 소설이었다.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소설들 중에서 읽는 게 가장 힘들었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힘들었다’는 거지 ‘어려웠다’는 것이 아니다. 작가님의 문체가 전세사기 당한 인물들의 불행과 비참함을 예리하게 그려내어 마치 내가 전세사기를 당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과몰입이 되었기 때문에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작품이 별로였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절대 그건 아니다, 라고 단언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소설의 결말, 즉 주제의식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빗방울처럼」은 낙숫물 사이에 들리던 ‘해, 할 수 있어, 그럼 끝나’(281p)라는 목소리가 ‘안 돼, 하지 마, (스포일러 방지 위해 생략)’(293p)으로 바뀌며 끝난다. 이는 결국 모든 걸 다 잃었다고 생각하고 삶을 끝내려는 주인공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살려는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져 너무나도 뭉클했다. 그런 마무리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좋은 평을 하지 않았을 것 같으나, 이런 여운을 주는 결말이라면… 그 무엇보다 두 팔 벌려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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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눈이 내리다
김보영 지음 / 래빗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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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 문학을 즐겨 읽어오면서, 그리고 같은 몇 년 동안 북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며 끊임없이 독후감을 작성해오면서, 내게는 문학에 대한 두 가지 명제가 머릿속에 자리했다.

1) 나는 SF와 판타지 장르랑 잘 맞지 않는다.

2) 나는 단편 분량보다 장편 분량을 더 선호한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된 ’SF 단편’은 어떻겠는가. 당연하게도 나는 SF 단편집을 단 한번도 만족스럽게 읽은 적이 없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테드창이나 켄 리우의 소설집은 물론이거니와, 그 유명한 김초엽, 천선란의 단편집도 모두 중도 하차했다. 상상력이 부족한 편인 나로서는 완전히 비일상적인 SF(혹은 판타지)의 세계관에 몰입하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고, 그런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는 단편 분량의 SF 소설들은 즐겁게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내게, 올해 처음으로 별 다섯개를 준 소설이자, 난생 처음으로 별 다섯개를 준 SF 단편집이 생겼다. 바로 김보영 작가님의 『고래눈이 내리다』이다. 단편집의 특성상 수록된 모든 단편이 좋은 경우는 너무나도 극히 드물다. 일반적인 순수문학을 읽을 때에도 모든 단편이 좋았던 단편집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나는 건… 김병운 작가님의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정도?) 근데 『고래눈이 내리다』가 그 어려운 걸 해냈다. 그것도 SF 장르로 말이다.

수록된 아홉 편의 단편을 비좁은 이곳에다가 소개하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일 것 같고, 그렇다고 해도 이 아홉 편의 훌륭한 소설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제외하기도 너무나 힘들다. 보통 단편집의 리뷰를 쓸 때에는 좋았던 몇 편의 소설들에 대해서만 쓰게 되는 반면, 『고래눈이 내리다』는 ‘좋았다’는 감상이 기본으로 깔려있기에 ‘무엇이 더 좋았는가’를 따져야 해서 무척이나 힘든 것이다. 다만 수록된 모든 단편들을 관통하는 몇 개의 주제의식이 있다. 그건 바로 기후위기나 인간 존엄성 등과 같은 것이고, 그에 대한 저자의 사유가 너무나도 깊이 와닿았으므로 구구절절 공감해가며 읽을 수 있었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아홉 편의 소설 중 딱 하나만 골라보라면, 나는 「까마귀가 날아들다」를 꼽을 것이다. 작년 12월 3일 말도 안되는 일을 현실로 겪어서 그런지 소설 속 내용을 더더욱 절실히 통감했던 것 같다. 워낙 짧은 단편이기에 내용 소개는 하지 않겠지만, 작품 속의 한 문장 정도만 남기고 싶다. (제발…. 이 책 읽지 않은 사람 없게 해주세요…🙏)

“어…… 그렇구나. 너 죽을 결심을 했구나. 죽을 마음은 조금도 없으면서 말이지. 그렇지?” (1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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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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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남자와 이별하는 장면으로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은 시작된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헤어지는 걸까. 둘의 대화를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는데, 남자는 “내 마음은 그대로예요.”라고 하는 반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여자는 “내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라 한다. 즉, 두 사람이 이별하게 된 원인은 여자가 처한 ‘상황’ 때문인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사랑하는 연인을 갈라놓게 하는 것인가.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여자 주인공이 아닌 그녀의 여동생 이야기가 등장한다. 동생은 그녀의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고 두 아이와 함께 도망치듯 본가로 내려왔고, 그렇게 갑자기 스무 평 조금 넘는 집 안에 어른 넷과 아이 둘이 함께 살게 되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동생은 바깥일을 하며 육아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했지만 부모님은 이미 노쇠하신 몸이었고, 결국 아직 등단하지 못한 습작생 신분인 주인공이 두 아이의 육아를 맡게 된다. 바쁜 동생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선한 마음도 분명 있었겠으나, 서른이 넘어서도 제대로 된 돈벌이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채감을 지우기 위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게 여자는 자신의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녀에게 남자는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쓰는 시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읽어주는 구절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주체적으로 살아본 적 없던 주인공은 이러한 사랑이 늘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 내가 이렇게 좋은 걸 누리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언제나 품고 있었다. 결국 자신이 처한 상황이 그 사람에게 짐이 될 것을 걱정하여 이별을 통보하고 만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남자는 당신의 감정보다 동생분 살길이 더 중요하냐고, 자기가 짐을 나눠 짊어지는 것도 싫냐고 물어보며 그녀를 붙잡아보지만, 덜덜 떨면서도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결국 둘은 이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스포일러를 위해 입틀막🫢)

이 소설이 유달리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을 쓰면서도 곰곰이 생각해본다. 이 소설의 문체가 부드럽고 서정적이어서 작품의 분위기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점도 분명 한 몫을 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성과 남성을 적대적 관계로 몰아붙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요즘 쉽게 접할 수 있는 페미니즘 소설들을 읽노라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남성들을 싸그리 없애버려야 하는 것마냥 절멸시켜야 될 존재로 여기는 작품들이 있어 심히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은 그렇지 않다.

분명히 작품 속 ‘동생의 남편’은 아내에게 (성)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전처를 만나는 (죽어 마땅한) 악인이지만, 주인공의 연인은 그렇지 않다. 작품 끝까지 그녀를 믿어주고 보듬어주고 그녀에게 안식처가 되어주는 인물로 묘사된다. 또한 여성을 ‘피해자’로만 그려내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난 너무나 좋다. 주인공의 동생은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쳐온 ‘피해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후에는 주인공에게 육아를 떠맡기고 자유로운 연애를 하기도 하는 모습에서 주인공을 힘들게 하는 악인의 모습도 선연히 보인다. 다시 말해 ‘성별’이라는 기준으로 인물들의 성격과 위치를 평면적으로 그리지 않고, 소설 속 인물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입체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간추린 줄거리만 보면 주인공이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의 삶의 궤적을 요약한 장면을 읽으면 그녀의 모습이 분명 납득될 것이고, 또 결말에 가서는 주인공이 주체적으로 독립적인 선택을 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난다. 하여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가장 완벽한 결말이 아니었나 싶다. 어쩌면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키워야했던 두 아이도 아니고 그들을 떠맡긴 동생도 아닌, 바로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이겨낼 주인공을 응원하면서 뭉클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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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세고 촛불 불기 바통 8
김화진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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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잎1기 #은행잎서재

『셋 세고 촛불 불기』는 ‘기념일’을 주제로 한 여덟 편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사실 처음에는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다. 평소에 앤솔러지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워낙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이 한 곳에 담겨 있기 때문에 작품들이 따로 논다고 느껴지거나,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한들 모든 수록작이 재밌던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셋 세고 촛불 불기』 생각보다 좋은 이야기들이 많아서 놀랐다. ‘기념일’이라는 소재 덕분일까? SF, 가족 이야기, 일상의 단면들, 심지어 안드로이드 등의 소재까지 활용하여 ‘기념일’을 여러 결의 변주로 만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책에 실린 여덟 편은 모두 다 달랐고, 그래서 더더욱 좋았다. 어떤 이야기는 따뜻했고, 또 어떤 이야기는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김화진 작가의 글이 유달리 잘 안 읽힌다…), 이러한 ‘불균형’이야말로 앤솔러지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이 책은 ‘오늘이라는 날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기념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는 꽤 괜찮은 위로라고도 생각된다. ‘셋을 세고 촛불을 불기’ 전의 그 짧은 순간처럼, 삶의 작은 순간들을 잠깐 멈춰서 바라보게 만든달까. 은행잎 1기로 활동하면서 좋은 책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 너무도 행복했다. 출판사 담당자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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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묻는다
정용준 지음 / 안온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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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방되거나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아동 학대 가해자들이 연이어 실종된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작가 ‘유희진’은 지난번 아동학대를 다룬 특집 ‘토기장이와 그릇’에 이어 ‘끊기지 않는 고리’의 방영을 위해 취재를 하던 중 해당 사건을 알아차리고 이를 추적해가는 구조로 서사가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을 후원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뭔가 의뭉스러운 ‘장석기’와 그의 후원을 받고 자란 아이 ‘박기정’, 대놓고 아동학대 가해자들에게 분노를 드러내는 ‘김민수’ 등 수상한 인물들을 여럿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설의 주제의식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한다.

“교화니, 갱생이니, 수형자의 인권이니, 사회적 합의니, 다 피해자는 고려하지 않은 방안일 뿐이죠. 제일 좋고 확실한 건 범죄자를 교도소가 아닌 피해자에게 던져주는 거예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게 가장 확실하죠. 허나 그럴 수는 없죠. 지금은 현대고 우리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니까. 자경단을 옹호할 수는 없죠.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하지만 알아볼 것 같네요. 누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심판하는 자와 심판받는 자 양쪽의 이유를 다 살펴보면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겠죠. 사건의 이면을 고려하지 않고 행위의 동기를 살피지 않으면 미디어에서 보도되는 일들은 다 괴상하거나 뻔한 사건처럼 보일 테니까.” (152p)

위 문장에서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자경단’과 ‘행위의 동기’. 만약 자경단이 실제로 조직되고 활동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우리나라의 법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혹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대신 복수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는 다른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왜 법이 모든 것을 보호해주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바로 두번째 키워드, 법은 ‘행위의 동기’를 아주 중요하고 엄격하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아동학대 범죄는 ‘학대’에서 그친 경우 보통 형량이 5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살해’로 이어진 경우에는 20년 이상으로 훌쩍 뛴다. 그러나 아동학대로 인해 실제로 아이가 죽는다 하더라도, 법정에서 그 가해 부모가 ‘죽을 줄은 몰랐어요’라며 엉엉 울어댄다면 법원은 아동 살해 행위의 대해 ‘고의’가 아닌 ‘과실’로 판단하여 형량을 낮게 내린다. 다시 말해 ‘고의성’이라는 행위의 동기가 인정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참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법의 가장 큰 원칙 중 하나가 ‘무죄 추정의 원칙’이므로 고의가 [있었다/없었다]로 주장이 갈린다면 고의가 없었음이 아닌 ‘있었음’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학대 사건에서 낮은 형량 혹은 가석방 처분을 받는 가해자들이 정말 많은 것이고, 이로 인해 사회적 분노 또한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법이 처벌하지 못하는 이들을 대신해서 복수하겠다는 ‘자경단’은 어떤가. 이를 옹호할 수 있는가? 이들의 행위의 동기는, 마냥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의 행위가 속시원하다는 점을 부정할 순 없겠으나, 그들의 마음 또한 일개 범죄자들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고, 그런 점에서 나는 이를 절대 옹호할 순 없을 것 같다.

마치 독서모임으로 이 책을 다루면 열띤 토론이 벌어질 것 같은 정용준 작가의 신작 『너에게 묻는다』는, 흥미진진한 전개 속에서도 생각해볼 만한 주제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충분히 추천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작품의 소재나 주제가 다른 컨텐츠들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 같아서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흔하디 흔한 자경단 이야기의 또 한 가지 버전을 접하는 느낌이었달까?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적극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재밌게 읽었다. 올해 처음으로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다 읽은 장편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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