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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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마거릿 애트우드 작품을 지금까지 단 한 권도 완독하지 못했다. 시도는 몇 번 하였으나, 모두 중도하차 하고 말았다. 어째서일까. 그 이유는 아마 애트우드 특유의 문체가 나와 너무도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애트우드의 소설을 읽노라면... 모든 장면이 ‘프롤로그’처럼 읽힌다. 등장인물의 소개나 세계관의 설명이 일절 없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떡 하니 장면을 그릴 뿐이다. 마치 ‘프롤로그’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프롤로그들이 계속 이어지며 한 작품이 완성된다. 상상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인물 소개와 세계관 설명이 너무나도 필요한데, 애트우드의 작품에서는 이를 찾아낼 수 없으니 결국 읽다가 덮어버리고 만 것이다.

『시녀 이야기』 역시 호평이 자자한 작품이라 꼭 한 번은 읽어보고 싶었다. 2년 전 패밀리데이 때 소설을 구입해서 시도해보았지만 역시나 개같이(?) 실패… 더불어 미드로 영상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시즌이 4개라 너무 길어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렇게 내 인생에 『시녀 이야기』를 읽을 날은 없겠다 싶었다. 그러던 차에 올해 패밀리데이 행사에서 『시녀 이야기 그래픽노블』을 발견한 것이다…! (어머 이건 사야해)를 속으로 외치며 난 이 책을 곧바로 집어들었다.



그래픽노블을 읽으면서도 나는 이러한 감상을 지울 수 없었다. 특정한 사건이 발생하여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구조를 갖춘 소설이 아니라, 그저 세계관을 끊임없이 묘사하고 그 속의 인물들의 행동들을 그려내는 데에 그친 작품이라는 것을 말이다. 소설은 전쟁과 환경오염, 각종 성 질환 등으로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진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를 틈타 ‘길리아드’라는 전체주의 정부가 구성되어 계엄을 선포(!)하고 국민들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특히 정부는 여성들을 여러 계급으로 분류하여 교묘하게 통제하고 착취하는데, 소설 속 주인공 ‘오프브레드’는 시녀 계급으로서 사령관의 아이를 잉태하도록 강요당한다.

초반부터 중후반까지 작품은 계속 오프브레드가 세계관 안에서 겪는 일들을 그려내며 별다른 사건을 등장시키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닉’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사령관’과의 접점을 따로 만들면서 분위기가 고조되더니… 결말에서 갑자기 클라이맥스를 펑 하고 터뜨렸다. 작가가 정말 교묘하게 직조해놓은 그물에 제대로 월척당한(?) 기분이 들어 상당히 당황스러우면서도, 그 서사가 야기하는 도파민에 흠뻑 젖어 소름끼치는 쾌감을 만끽하는 기분도 들었다. 후속작이 34년 만에 나왔다고 들었는데,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도서전에서 『증언들』 구입해서 바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만약 나처럼 애트우드의 소설을 즐기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래픽노블로 접해보는 건 어떨지 제안하고 싶다. 활자 만으로 상상하기에 부족했던 느낌을 그림으로써 완벽히 충족해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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줍는 순간 - 안희연의 여행 2005~2025
안희연 지음 / 난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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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문학동네 이달책 1호부터 3호까지 전부 다 ‘산문’이라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이름부터 ‘문학‘이 들어가는 문학동네에서 ‘소설’을 내버려두고 굳이 산문만을 고집하여 이달책으로 고른 이유가 무엇일까. 특히 나는 여행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이번 이달책 3호 『줍는 순간』이 특히 달갑지 않았다. 산문도, 여행도 안 좋아하는 사람한테 ‘여행 에세이’라니;; 그럼에도, 안희연 시인의 글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 하나로 구입하였고,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제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줍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줍느냐고요? 저를 찌르는 순간들이요. 저를 관통해가는 감정들이요. (10~11p)

책제목이 ‘줍는 순간’인 이유가 바로 위의 문장에서 드러난다. 시인님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바로 ‘줍기 위해서’라는 것, 무엇을 줍느냐 하면 자신을 ‘찌르는 순간들, 관통해가는 감정들’이라는 것. 줍는다는 표현은 ‘놓치지 않고 자각해내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치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굳이 여행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동안 ‘줍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줍는가. 나는 무엇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려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내가 내린 답은 ‘행복을 찾는 것’이다. 요즘 행복은 무엇일까 고민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행복이란 거창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답을 내렸다. 다시 말해 ‘앞’이 아니라 ‘옆’에 있는 것. 무언가의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얻는 행복은 너무 찰나에 불과하고 오히려 그 후유증, 속된 말로 ‘현타’가 더 크게 오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행복이란 바로 내 옆에 있는 것, 때문에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주위를 돌아보며 살아야 소소하고도 확실한 행복을 놓치지 않고 이것들을 주우면서 살 수 있다는 것.

이렇게 나는 에세이 장르의 글도 그냥 읽고 덮으면 그만인 게 아니라, 깊이 생각해보게 하는 통찰이 담긴 산문이 좋다. 널리고 널린 힐링 에세이에서 그저 글자 그대로를 읽음으로써 얻는 가벼운 힐링이 아니라, 책 속에 담긴 문장을 능동적으로 읽고 자신의 삶과 적극적으로 관련지으며 진정한 위로를 갖게 되는 산문이 좋다. 관심없는 ‘여행’이라는 소재의 산문이라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너무 좋았던 독서 시간이었다.

그 모든 우연을 헤아려보니 지금 이 순간이 더욱 특별해졌다. 그가 건넨 한 장의 시디는 이 모든 우연의 총합이었다. 나는 이 행운을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43p)

[폴 발레리]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그때껏 그의 시를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었지만, 어쩐지 저 구절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모든 사랑은 와락 시작되는 것이니까. (99p)

문학은 필연적으로 언어를 통해 이야기해야 하는 장르였다. 사실에 대한 기록이든 감정에 대한 고백이든 상상을 통한 확장이든, 어쨌든 무언가는 말해져야 했다. 내 안에는 어떤 갈망이 있는가.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176p)

그때 그 여행에서 만난 스라바스티의 대인스님은 “인도인들 마음에는 전쟁(다툼)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매일같이 강가에 나와 몸을 씻고, 사원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 죽으면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라 했다. 이번 생의 행복과 슬픔은 이번 생으로 끝난다는 것. 그래서 더 나은 삶, 더 크고 좋은 집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오늘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지속해나갈 뿐이라는 것. (199p)

인도를 여행하는 내내 이 질문은 어김없이 나를 따라다녔다. 선의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열면 곧바로 돈을 요구하며 돌변했고, 믿지 못해 마음을 닫고 지나치면 참 좋은 사람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너무 경계해도 안 되고 경계를 하지 않아도 안 되는 정말 어려운 곳이었다. (2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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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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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난 이런 물음에 빠져있다. ‘나는 왜 소설은 좋아하면서 에세이는 좋아하지 않는 걸까.’ 더구나 에세이라고 해서 다 싫은 건 또 아니다. 인생책으로 꼽는 에세이도 분명히 있다. 이런 모순적인, 아니 모순적이라기보다는 양가적인 데에는 이유가 분명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 이유를 찾느라 계속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영하 소설가의 신작이자 베스트셀러 『단 한 번의 삶』을 읽으니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일단, 내가 에세이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저자의 ‘리얼’한 경험이 너무도 ‘내밀’하게 담겨있다는 데에 있다. 허구를 기반으로 쓰인 소설과는 다르게 에세이는 실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기 때문에 온전히 즐기기가 힘들다. 뭔가… 타인의 아프고 힘들었던 경험들이 그저 가볍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달까? 그리고 또 하나, 다른 사람의 인생이 나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그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이 사는 거고, 내 인생은 그와는 다른 또 나만의 삶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여기서 MBTI를 언급하고 싶다. S 성향이 96%나 나오는 것을 방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를 바탕으로 내가 좋아하는 소수의 에세이들을 살펴보니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다루고 있는 소재가 나의 관심분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문학과 삶]을 다루고 있는 『밑줄과 생각』(정용준), 『고요한 읽기』(이승우), [술]에 대해 쓰인 『아무튼, 술』(김혼비) 그리고 [카페 알바] 경험담이 적힌 『카운터 일기』(이미연) 등이 그러하다. 이런 소재들은 나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그렇기에 이에 대해 깊이 탐구해놓은 혹은 리얼한 경험담이 담긴 글들이 내게 너무나도 재밌고 즐겁고 깊이 있게 읽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읽은 『단 한 번의 삶』은 어떨까. 소설가가 썼기에 [문학]에 대한 부분이 녹아들어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고, 제목에서도 ‘삶’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에 인생에 대한 통찰 또한 깊이있게 담겨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문학이라는 키워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삶에 대한 통찰 역시 전에 읽은 『고요한 읽기』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등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김영하 소설가의 부모님에 대해 자식으로서 그들을 회고하며 쓴 글들이 가득 있어서 그런지 내겐 너무 지나치게 내밀했다.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이 책이 억지로 떠먹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연유에서 나는 한줄평을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라고 적었다. 베스트셀러에 대해 혹평을 남긴다는 것이 적지 않은 부담이 되지만, 베스트셀러이기에 오히려 이런 글 하나 적어봤자 판매량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어 오히려 부담이 줄어드는 것도 같다. 그런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글을 적는다. 부디 이 책을 읽은 누군가가 기분 나빠하지 않길 바라며, 또 누군가는 나의 감상에 조금이라도 공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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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 치유와 자유의 경계에서 쓴 불온한 질병 서사
김도미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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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는 저자가 실제로 혈액암의 일종인 백혈병을 앓은 경험담이 녹아든 책이다. 환자로서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주위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고 그것이 환자인 자신에게 어떤 기분으로 다가왔는지, 또 환자이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있었고 무엇을 할 수 없었는지를 상세하게 적어냈다. 직접 환자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절대 감각할 수 없는 지점들을 구체적이면서도 연민 없이 써서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친구와 만나는 대신 메신저나 화상통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일상이 재배열된다. 생존을 중심으로 매일의 구성이 바뀐 만큼, 혼자 끌어안거나 함께 나누는 기쁨과 슬픔의 성질도 조금은 달라진다. 이 새로움마저 몽땅 재앙이라고 하기에는 삶이 그보다 깊다. (11p)

암 경험자에게도 그런 순간은 필요하다. 맥주 한 모금이 목구멍을 찌르르 넘어가는 순간, 퇴근 후 카우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회복을 뭉클하게 실감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큰 병에 걸린 적이 있다는 이유로 유해하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일절 못하도록 막는 것이 온당할까. (40p)

감염 위험 때문에 가사노동을 직접 하면 안 된다는 병원 위생 관리 교육 내용은 지킬 수 없었다. 24시간 상주하는 보호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버거웠지만 생활감이 필요했다. (97p)

지금 와서 보험이 있어 다행이냐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보험금을 받는 과정은 꽤 까다롭고 대체로 모욕적이었다. (241p)

그러나 이 책은 그런 ‘투병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환자로서 직접 겪었던, 아니 겪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 사회 보장 제도의 허점들을 낱낱이 고발한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만큼이나 의료 보험 제도가 잘 짜여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한국의 의료 보험은 꽤 체계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와 달랐다. 특히 ‘간병’ 등과 같은 일상적 돌봄에 대한 제도는 거의 공백에 가깝고, 제도적 지원을 받고자 하더라도 본인이 절대적 빈곤에 처해있음을 증명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 외에도 한국 사회의 돌봄 현실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이 책은 끊임없이 설파했고, 이에 나는 아픈 마음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 가족에게 매일 발생하는 가사와 육아를 지역사회 안에서 나누어 할 수 있었다면, 환자를 돌보는 일이 가족에게만 떠맡겨지지 않았더라면 사정은 달랐을 수 있다. 노인과 장애인에게만, 그마저도 세세한 의심과 증명을 거쳐야만 적용되는 돌봄 제도가 아픈 사람에게도 폭넓게 적용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136p)

공공재원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분배정의를 실현하고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을 크게 확대한다고 한들, 약가 자체가 인하되지 않는 이상 면역항암제 치료를 시도하고자 하는 모든 환자에게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176p)

전남편으로부터 양육비를 받지 못한 채 풀빵을 구워 팔며 어린 남매와 함께 시한부 인생을 살아냈던 고 최정미 씨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풀빵엄마>(2009)는 피 끓는 모정으로 사람들의 눈물을 쏙 빼놓았지만, 사실 이 다큐멘터리가 폭로한 건 암 경험자에게 더 가혹한, 사회안전망이 부끄러운 수준으로 취약한 한국 사회다. (309p)

책을 읽으면서 (아직은) 환자가 아닌 내가, 한 개인에 불과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되뇌었고, (아직도) 명쾌한 답을 내리지를 못해 무력한 마음에 씁쓸하기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글을 읽고, 깊은 진심으로 공감하고, 이러한 목소리를 내는 분들에 동의와 응원의 목소리를 더하는 것이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환자가 아닐지언정 우리 모두는 ‘잠재적 환자’인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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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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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어둡고 우울하고 비참했던 정용준의 첫 소설집 『가나』와 아픔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시선과 손길이 느껴졌던 가장 최근의 단편집 『선릉산책』, 같은 작가가 쓴 것이 정말 맞을까 싶을 정도로 두 책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출간 순서만 보더라도 두 작품의 딱 중간에 있는 정용준의 두번째 단편집인 만큼, 그 두 작품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섞어놓은 듯했다. 『가나』에서 『선릉산책』으로 가는 그 과정 중간에 쓰인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일단,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 수록된 소설들은 대부분 『가나』의 분위기처럼 대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하고, 불안하다. 표제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서는 부부싸움 중에 화를 이기지 못하고 엄마를 죽인 아빠를 둔 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친척 가정으로 입양이 되었고 이후 성인으로 자랐을 때 간호조무사가 되어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그 병원에 환자로 그의 아버지가 나타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개들」이라는 작품의 배경은 개를 사육 및 도살하는 농장(도축장)이다. 그곳의 주인은 개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종업원 등의 인간들도 너무나 험하게 다룬다. 「이국의 소년」 역시 베트남전 참전으로 인한 후유증을 심하게 앓는 주인공과 군대에서 총기 자살 시도를 한 그의 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좀처럼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겠는 암울함이 작품들의 주(主)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작품을 추천하는 이유는, 작품 전반을 뒤덮고 있는 비참 속에서도 한줄기의 희망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부」라는 단편은 나를 가장 힘들게 했으면서도 이 소설집 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데 이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싶다. 「안부」는 군대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군부대 측에서는 자살 사건으로 빠르게 종결짓고 마무리했지만, 어머니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러 개의 구타 및 폭행의 흔적들이 아들의 몸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그마치 6년이 넘는 시간을 바쳐서 주인공은 투쟁한다. 여러 곳에 나가 시위를 하고 판사와 대통령 등에게 편지를 쓰는 등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한다. 사람들은 사건을 점차 잊어가고 주위에서도 이제 그만 아들을 보내주라고 주인공을 말리지만, 그녀는 절대 물러날 수 없었다.

곧 사람들은 다 잊을 거예요. 그것에 대해 서운해하거나 화내면 힘들어져요.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아들을 믿으세요. (182p)

이 작품이 내게 너무나도 깊이 와닿았던 것은, 단순히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비애(悲哀)만을 보여주는 것에만 그치지는 않았다는 데에 있다. 만약 어머니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포기해버리고, 물러나버리면 나는 이 소설을 절대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좋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부」는 그렇지 않다. 「안부」의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이렇게 말한다.

내게 더는 안부를 묻지 말기를. 나는 아직 괜찮다. (184p)

결국 그녀는 이겨내지 않을까. 아들의 원통함을 풀어내고서 힘겹지만 후련하게 아들을 보내줄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이렇게 말해주는 듯했다.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주인공의 의지와 함께 아주 약한 희망의 가능성을 암시해주는 것 같아서, 그래서 더더욱 이 소설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부」 뿐만 아니라 다른 소설들에서도 미약하게나마 한 줄기의 빛이 느껴진다. 앞서 언급한 「개들」의 결말도 주인공이 누구에게 이끌려 하게 되는 행동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큰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기며 끝을 맺는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설명을 생략하도록 하겠다만, 작품 속에서 온갖 고생을 마다 않는 인물들이 이제는 자유를 맞을 수 있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고는 말하고 싶다. 오랜만에 정용준 작가의 단편집을 읽었는데, 역시나 정용준 작가님은 내게 ‘실망을 주지 않는 믿고 읽는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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