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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노래 - 2023 부커상 수상작
폴 린치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평점 :
#도서협찬
2023년 아일랜드에서 출간되어 부커상을 받은 이 작품이, 2024년 대한민국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을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예언자의 노래>는 아일랜드에 전체주의(파시즘) 정부가 들어서서, 그로 인해 한 가정이 파탄나게 되는 과정 하나하나를 적나라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는 분명 이 작품을 두고 비록 허구이지만 ‘경고’이자 ‘시뮬레이션’으로 읽히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진짜 그럴 줄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소설은 노조에 참여한 남편을 정부에게 빼앗기는 아내 ‘아일리시’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아일리시는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돌보고 있고, 넷이나 되는 아이들도 부양하고 있다. 즉 아일리시는 잃을 게 많은, 다시 말해 지켜야할 것이 너무 많은 ‘엄마’이다. 그렇기에 소설에서는 아일리시에게서 남편부터 자식들까지 하나씩 그것들을 차례로 빼앗고 부수는 과정을 선연하게 비추고 있어, 그 처절한 비극을 지켜보는 것이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약 40년 전의 우리나라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가 많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런데……. 12월 3일 윤 대통령의 기습적인 비상계엄 선포를 계기로, 한낱 과거의 역사인 줄만 알았던 것이 뼈저리게 현실적인 순간으로 체감될 줄 전혀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의 노래>에서 그리고 있는 모습이 어쩌면, 진짜 우리 삶의 모습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소름끼치는 공포가 피어오른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너무도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다. 그렇지만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읽어야만 했다. 왜일까. 이렇게 고통스러운 소설을 굳이, 왜 읽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사실 문학에 어떠한 ‘효용’이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학’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하다고도 믿는다. 이전에 올린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리뷰에서도 밝혔듯, 문학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추체험’이다. 그 간접적인 체험이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고, 그 다양한 시각과 시선으로부터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나와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문학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1인칭’이라 답할 것이다. 이를테면, 세상을 고발하는 방법으로 문학 말고도 기사나 뉴스 등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저널리즘’의 방식은 가장 직관적이지만, 3인칭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국가에게 폭력을 당하는 국민에 대해 쓴다고 치자. 이때 저널리즘의 경우에는,
[군인이 시민에게 총구를 겨눴다.] 고 적을 테지만, 문학은 위와 다르게
[나는 군인이 저지르는는 총질의 표적이 되었다.] 고 표현할 수 있다. 이런 점은 그 피해의 참상과 고통을 훨씬 더 깊이 몰입하여 체감할 수 있게, 즉 ‘절감’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이해와 공감의 깊이가 훨씬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의 노래>는 지금 이 시국을 겪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작가의 상상에 불과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만 생각했던 이 작품은, 결국 지금의 우리나라에 대한 ‘경고’이자 ‘시뮬레이션’이게 되어버렸다. 부디, 다시는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정말 슬프고 아프고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더더욱 좋았던 <예언자의 노래>의 감상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