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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ㅣ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평점 :
제목을 서울대의 슬로건에 빗대어 위와 같이 쓴 이유는, 정호승 시인님의 시는 언제나 직관적이고 쉬운 표현들로 독자들에게 거대한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동은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의 감동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함축적인 언어가 내밀한 속마음으로 와닿는 감각에서 비롯하는 묵직한 여운이다. 시집을 읽어보고는 싶은데 어렵게만 느껴져서 어떤 시집으로 입문해야할지 모르겠다 하는 분들에게는, 꼭 이 시집이 아니더라도 정호승 시인님의 시집 아무거나 집어들어 읽어보기를 꼭 권한다. 전에 읽었던 <슬픔이 택배로 왔다>에 이어 이번 <포옹>이라는 시집까지, 읽는 동안 적잖은 감동과 여운에 흠뻑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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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티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꼼짝도 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다
나는 허물을 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어 있는 줄 알았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
허물은 허물을 벗고 날아간 어린 매미를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허물이 없으면 매미의 노래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허물의 힘에 놀라
슬며시 손을 떼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보았다
팔순의 어머니가 무릎을 곧추세우고 걸레가 되어 마루를 닦는다
어머니는 나의 허물이다
어머니가 안간힘을 쓰며 아직 느티나무 둥치에 붙어 있는 까닭은
아들이라는 매미 때문이다
- <허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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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슬픔이 택배로 왔다>에서도 그렇고, 이번 <포옹>이라는 시집에도 부모님을 소재로 한 시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부모님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만날 때면 언제나 마음이 크게 동하는 편이다. 때문에 소설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 등에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다루는 작품을 의도적으로 피할 때가 종종 있는데, 정호승 시인님의 시 같은 경우에는 읽을 때 마음이 무거워지기 보다는 따뜻해지므로 오히려 더 찾아 읽게 되는 듯하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자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어머니의 마음을 매미 허물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상당히 신선하면서도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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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나리 핀 국도에 차들이 달린다
할머니 한 분이 아까부터 허리를 구부리고
길을 건너지 못하고 서 있다
그때
할머니 뒤에 서서 개나리를 쳐다보고 있던 흰 거위떼들이
뒤뚱뒤뚱 떼지어 길을 건넌다
순간
있는 힘을 다해 달려오던 차들이 놀라 멈춰선다
버스가 멈춰서고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멈춰선다
거위들은 경적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거위 뒤를 따라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길을 건넌다
- <거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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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는 할머니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을 도와주려는 듯이 보이는 거위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시의 도입부에는 그저 개나리를 구경할 뿐이었으나, 할머니가 길을 건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자 그제서야 ‘뒤뚱뒤뚱 떼지어 길을 건넌’ 것이다. 한낱 거위들에게 적잖은 감동을 받을 줄이야… 그리고 예상 외로 감동을 받은 측면이 또 하나 있다. 거위들이 길을 건너려고 하자 그를 로드킬(?)하지 않고 운전을 멈춰서 거위들을 기다려준 버스와 트럭들이다. 우람한 크기의 버스와 트럭이 작디 작은 거위들을 위해 멈춰 선 모습을 상상하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