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84>를 읽으며 다시 한번 느꼈다, 조지 오웰이야말로 ‘칼 같은 글쓰기’를 하는 작가라는 것을. 전에 읽은 <동물농장>이 우화의 형식으로 반공주의 사상을 그려냈다면, <1984>는 보다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강하게 경고한다. <동물농장>보다 소설적인 재미는 덜할지 몰라도, 담고있는 메시지는 훨씬 더 무겁고 날카롭다. 읽는 동안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느낌이 들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소설은 198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약 4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 읽어도 충분히 몰입하고 납득되었기 때문이다. 

.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 1부에서는 작중 배경을 묘사하는 데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다. 소설 속 세계는 끊임없는 전쟁과 약탈을 통해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라는 세 개의 거대한 국가로 통합되었고, 이중 ‘오세아니아’를 작품의 주무대로 하고 있다. 오세아니아의 최고 권력 기구인 ‘당’은 허구의 인물 ‘빅브라더’를 내세우면서 ‘텔레스크린’ 등의 장치를 통해 당원들의 사생활 하나하나를 모두 감시하고 통제한다.

🗣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이 동시에 가능하다. 이 기계는 숨죽인 속삭임을 넘어서는 모든 소리를 낱낱이 포착한다. (…)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내는 소리가 모두 도청을 당하고, 캄캄한 때 외에는 동작 하나하나까지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했는데, (…) (11p)

.

당의 통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골드스타인’이라는 인물을 반역자로 내세워 그를 혐오하게 함으로써 대중의 분노를 그에게로 집중시킨다. 또한 기존의 언어를 줄이며 ‘신어’라는 새 언어 체계를 만드는데, 이는 당에게 반대하는 사상 자체를 막기 위한 활동이었다.

🗣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 (74p)

.

주인공 ‘윈스턴’은 이러한 당의 통제에 환멸을 느끼는 인물이다. 앞서 말했듯 1부에선 작중 배경을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주인공의 생활 방식을 설명했다면, 2부에 들어서는 주인공이 당에게 반기를 드는 과정을 서술한다. 그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줄리아’라는 여성을 만나 연인 관계를 맺고, 내부당원 ‘오브라이언’을 찾아 반당 단체인 ‘형제단’에 가입하며 골드스타인의 저서를 읽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을 해나가려 한다. 그러나 그는 곧 함정에 빠지며 사상경찰에 체포되며 소설은 3부에 접어든다. 3부에서는 윈스턴이 줄곧 고문을 당하는 장면들이 나열된다. 동시에 당은 그의 정신을 개조하고자 하는데, 윈스턴이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는 이만 말을 줄이겠다.

🗣 그는 ‘좌중단’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몇 가지 명제들 - ‘당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한다’, ‘당은 얼음이 물보다 무겁다고 말한다’ - 을 제시하고, 이와 반대되는 견해는 듣지도 생각하지도 않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켰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상당한 추리력과 임기응변 능력이 필요했다. (385p)

.

브라더라는 존재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세계관이, 어쩐지 지금 시대에 부합하는 설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3년에 쓰인 작품해설에선 ‘CCTV’ 등을 예로 들고 있는데, 20 정도가 지난 지금에선 그보다 체계화된 시스템이 우리를 훔쳐보고 감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바로알고리즘이다. 유튜브 쇼츠를 보거나 인스타 광고 등을 , 우연히 초간을 지속하여 어떤 영상을 보면, 해당 영상과 관련된 콘텐츠들이 뒤로 우후죽순 쏟아져 내리는 경험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무서움을 느끼는데, <1984> 그런 점을 정확하게 꼬집으며 경고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읽는 동안 계속 무서웠고, 오한을 느낀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무섭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과 우연들 (리커버 에디션)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평점 :
품절


나는 김초엽 작가에 대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초대박 베스트셀러 데뷔작을 통해 화려하게 등단한 천재 SF 소설가… 라고만 생각했었다. 개인적으로는 SF 장르의 경우 단편보다 장편을 훨씬 선호하기 때문에 <지구 끝의 온실>과 <므레모사>를 더 재밌게 보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읽으면서 이 작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김초엽의 에세이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또한 그 책의 제목이 <책과 우연들>이란 걸 보자마자,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작가님은 내 생각과는 아주 많이 다른 분이었다. 소설을 쓰는 데에 수많은 노력과 고민이 선행되었고, 사람들의 평가에 위축이 들기도 또는 감동을 받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소설가의 에세이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 데엔 이런 이유들이 있는 것 같다. 본인이 소설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그저 독자로서만 소설을 즐겼던 때와는 달리 본인이 소설을 직접 쓰게 되니 막막한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더욱 소설이 소중해졌다는 내용들이, 만약 나도 소설을 쓰게 된다면 꼭 그러한 생각이 들 것만 같은 이입을 불러일으켰다. 



SF 장르를 주로 쓰시는 소설가이다보니 과학 분야의 책들이나 해외의 다른 SF 소설들과 관련된 내용이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SF 소설을 썩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재밌나보다… 하며 넘기며 읽었다. 그러다가 내게 아주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부분이 있어 그 내용을 소개할까 한다. 왜냐하면 그 부분이 ‘서평’을 쓰는 사람의 입장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김초엽 작가님이 독자로서 어떤 책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수준으로 감상을 블로그에 남기신 적이 있는데, 그 책의 저자분께서 직접 그 비판을 보고선 답글을 남겼다는 내용이었다. 김초엽 작가님은 저자가 직접 자신의 글을 볼 줄 몰랐기 때문에 그런 글을 적은 것이지만, 그 저자의 답신(?)을 보니 너무 놀라고도 창피해서 곧바로 그 블로그 글을 지우셨다고 한다.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다만 작가님과는 정반대의 경험이다. 나는 김병운 소설가의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을 읽고 너무 좋아서 그 책을 찬양하는 정도의 리뷰를 남긴 적이 있다. 이후 해당 책의 북토크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북토크가 끝난 후 책에 작가님의 사인을 받던 중에 벌어진 일이다.

 - “이름이 뭐예요?”

 - “OOO 입니다.”

 - “어? 인스타그램에 리뷰 남겨주신 분 아니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그렇게 벅차오를 수가 없었다. ‘맞아요!!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라고 소리치며 온갖 주접을 떨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사람들이 꽤 있던 그 자리였기 때문에 들뜬 마음을 최대한 자제하며 “헉, 어떻게 아셨어요?” 정도의 문장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님께선 자신의 책에 대한 리뷰를 종종 찾아보신다고 하셨고, 좋은 평을 남긴 내 글에 고마움을 느끼셨다고 했다. 물론 나는 그런 작품을 써주셔서 더 감사드린다는 말과 함께 행복한 마음으로 북토크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나는 좋은 감상을 남겨서 작가님과 웃는 얼굴로 대면할 수 있었지만, 만약 별로였던 감상을 남긴다면 꽤나 껄끄러웠을 것 같다는… (아마 껄끄러운 수준이 아니겠지, 훨씬 그 이상이겠지) 생각이 든다. 아마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북스타그램’을 하고 있을 것이고, 그런 분들께 이 책은 정말 공감가는 부분이 많지 않을까 싶다. 특히 SF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더욱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락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잘 나가는 연극 배우, 출중한 재능의 연기력을 가진 배우가 어느날 갑자기 한낱한시에 연기를 못하게 된다. 아무 이유도 없고 또 그에 대한 아무 설명도 없다. <전락>은 이 배우 주인공이 연기력을 한순간에 잃게 되어 ‘전락’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각 50페이지 씩 총 150페이지 정도의 짧은 소설이다. ‘장편’이라기에도 조금 부족할 성싶어 ‘중편소설’이라 칭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느껴질 정도니까 말이다. 때문에 책의 두께와 뒷표지 줄거리를 읽을 때만 해도 이러한 얇은 분량에서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향하는 급행열차를 타게 된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위주로 전개되지 않을까 싶어 흥미로웠던 것이다.



1부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듯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2부에서 갑자기 ‘페기’라는 여성 인물이 등장해서는 분위기가 반전된다. 이 여성은 주인공의 새로운 연인으로 등장하는데, 주인공과 나이 차이가 스무 살 정도 되는 데다가 원래 ‘레즈비언’이지만 이 남자 주인공을 갑자기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다수 만들어졌다. 그런데 물음표들이 해소되기는 커녕 3부로 가면 가관이다. 둘이서 작당하고 술집에 어느 취한 여성을 꼬시더니 셋이서 …… (뒷내용은 생략한다.) 심지어 묘사가 상당히 노골적이어서 도무지 불쾌한 기분을 지울래야 지울 수가 없었다. 필립 로스 작가의 작품 처음으로 읽는 책인데, 불편하다거나 불친절한 느낌의 작가라는 익히 들어왔더래도 정도는 너무 심하지 않았나 싶다. 애석하게도 책장에 필립 로스의 대표작 <울분> 꽂혀 있는데, 아무래도 동안은 절대 펼치지 않을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래 - 천명관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9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다. 주변에서 재밌다는 얘길 많이 들어왔기도 했고 부커상 최종 후보에 든 작품이기도 하며 그로 인해 수많은 북튜버들도 이 책에 대한 호평 일색의 리뷰들을 보아 온 사람으로서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은 하늘을 치솟았다. 그리고 <고래>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까지 읽어온 소설 중에선 가장 밀도 높은 서사를 담은 작품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

보통 소설을 읽노라 함은 하나의 큰 기승전결을 갖춘 ‘사건’ 내지는 ‘서사’를 만나게 될 것이라 기대하고서 책장을 펼친다. 그래서 만약 그 기승전결의 구조가 명확하지 않거나 (예를 들면, 심리 묘사 위주의 소설), 얕은 사건들의 반복되는 구조라면 (예를 들면,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 개인적으로는 그 이야기에 충분히 몰입하지 못하게 된다.

.

반면 <고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러 개의 기승전결 구조를 갖춘 서사들이 등장과 소멸을 계속하여 반복한다. 옴니버스와 별반 다르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주인공 혹은 주변 배경이 작품마다 달라지는 옴니버스 형식과는 달리, <고래>는 주인공이 삶을 계속해가며 겪게 되는 풍부한 이야기들을 모조리 담았다. 초반에 두-세명의 인물이 별개의 서사처럼 등장하긴 하지만, 후에는 하나의 구조로 엮이며 이 모든 것이 또 하나의 거대한 서사였음이 밝혀진다. 주인공 ‘금복’이 어린 시절 ‘생선 장수’를 만나 아버지로부터 도망친 사건, ‘걱정’을 만나 결혼하는 사건, ‘칼잡이(?)’를 만나 영화라는 매체에 눈을 뜨게 되는 사건, 홀로 ‘춘희’를 낳게 되는 사건 등등… 이후로도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금복’에게 일어난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들이 정말 ‘휘몰아치듯’ 전개된다. 독자로서는 당연히 그 서사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밖에, 그러므로 다들 이 작품을 두고 왜 이렇게 재밌다고들 하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다 읽으니 그렇게 재밌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는 감상이 남는다. 음… 이 작품에 대한 리뷰들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불호’라는 후기가 많았는데, 그 리뷰들에는 공통적으로 ‘여성에 대한 표현들 혹은 여성들이 겪는 일들이 거북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 작품에 대해 느낀 별로였던 점도 위 후기들과 (조금은 다르지만)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다는 생각도 든다.

.

조금 더 명확히 설명해볼까? <고래>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인물들은 모두 기구한 운명에 처한 듯하다. 이들이 겪는 사건들이 정말, 보는 사람도 고통스럽다고 느낄 만큼 험하다는 말이다. 여성 주인공들이 한국 근대사회에서 겪는 기구한 일이라 함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만하지 않은가. 더구나 여성 인물들 뿐만 아니라 남성 인물들도 어딘가 다치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불운한 최후를 맞거나 등등 눈살 찌푸릴 만한 일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이런 점이 내게는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뭐랄까, 작가가 인물들을 너무 거칠고 험하게 다룬 느낌이랄까? 난 소설 속 인물들은 소설 속에서 영원히 갇히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완성된 듯한 열린 결말의 소설이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데, <고래>는 딱 그런 작품이었다. 그래서, 정말 재밌게 읽었음에도 이 작품에 대해 그다지 좋은 평을 내리지는 못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섯째 아이>는 자신의 가족 중에 본능적인 폭력성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의 낱낱을 섬세하면서도 과감하게 드러내어 작품 속으로 독자들을 끌고 들어가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는 독자라면 영원히 행복할 줄만 알았던 한 가정이 처참하게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나 역시도 책을 다 읽은 뒤에 찾아온 여운이 참 무겁고 짙었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어느 파티장에서 만나 첫눈에 반하며 결혼까지 골인한다. 그들은 엄청나게 부유하진 않았지만, 아이를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사는 가정을 꾸려나가고 싶어 한다. 그렇게 그들은 6년 동안 4명의 아이를 출산하였고, 양가 부모님의 경제적, 노동적 도움을 받아가며 대저택을 장만하여 친척들을 초대하고 파티를 여는 등 그들이 꿈꿔왔던 ‘행복’을 하나하나 실현해 나간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가 들어서면서 문제가 생긴다. 아내 ‘해리엇’은 임신 기간에 신통치 않은 고통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괴로움의 나날로 보내고 결국 아이를 출산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완전히 달랐다.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근육질의 다부진 몸을 가진 그 아이 ‘벤’은 본인을 보러 온 다른 형제 ‘폴’의 팔을 뒤로 꺾어버리기도 하고, 저택으로 놀러 온 다른 가족들의 애완동물들을 죽이기도 하는 등 범상치 않은 폭력성을 보인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는 고함을 치고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것은 기본이고, ‘벤’ 때문에 다른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게 되거나 가족들의 휴가를 위해 잠깐 ‘벤’을 돌보았던 장모 ‘도로시’는 온몸이 피멍투성이가 되는 등 ‘벤’으로 인해 다른 가족들은 많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 결국, 남편 ‘데이비드’는 다른 가족들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서라는 생각에 ‘벤’을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운영되는 요양소로 보내버리지만, 아내 ‘해리엇’은 그래도 본인의 자식인데 그곳에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벤’을 그곳에서 구해온다. 이로 인해 ‘해리엇’은 남편과 자식을 비롯한 모든 가족들에게 비난받으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현실에서 ‘다섯째 아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시적인 본능 중 하나인 ‘폭력성’으로 보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폭력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를 살아가면서 그것이 발현되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모두가 같은 마음이라면 혹은 같은 수준으로 통제된다면 좋겠건만 사람마다 그 정도에는 필연적으로 차이가 있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본성을 잘 누르고 살아가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의 조절을 어려워하거나 심지어는 악의적으로 그를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이 작품 속 ‘벤’의 경우에는 본인이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는 경우인 듯하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인생을, 사회를 살아가면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만약 이런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그들을 대할 것인지 한 번쯤은 깊이 고찰해보아야 할 듯싶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의견을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면 십중팔구는 이렇게 답한다. ‘피해라’, ‘너만 피곤하다’, ‘굳이 상대해서 좋을 것 없다’ 등등. 맞는 말이다.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든 피할 것이다. 하지만 내 가족이 이렇다면? 내 자식이, 내 형제가 이런 사람이라면? ‘가족’이라는 강력한 연으로 한데 묶여있다면 피하고 싶다고 마냥 피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 질문을 한 편의 소설로 풀어낸 것이 바로 <다섯째 아이>이다.

 


나라면 어떨까. 만약 내가 ‘벤’의 부모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무래도 나는 아직 부모보다는 자식의 입장에서 인생을 살고 있다 보니 ‘벤’을 요양소에 보내고 남은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 어머니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해져서 설거지 중이셨던 어머니를 붙잡고선 무작정 <다섯째 아이>의 줄거리를 대강 말씀해 드렸는데, 엄마는 ‘아이가 불쌍하다’며 ‘어떻게든 끝까지 책임지고 데리고 키울 것’이라고 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자식인데 어떻게 나몰라라 하면서 방치할 수 있냐며, 내가 ‘벤’처럼 폭력적이고 온 가족의 불행을 가져오는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지라도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을 거라 하셨다. 그 말을 들으니 괜스레 코끝이 찡하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너무 당연한 것을 괜히 물어본 것인가 싶어 어리석은 나를 탓하게 되면서도 그런 감정을 들게 한 우리 어머니한테 깊은 감동받았다. (사랑해요 엄마…) 더불어 그때 나는 나 자신을 ‘벤’으로 가정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감정 등을 아직은 감도 잡지 못하겠다는 걸, 아직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튼 어머니와의 짧은 대화 후에 다시 이 작품에 대해 생각해보니, 양측 모두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마치 딜레마에 빠진 상황처럼 말이다. 다른 가족들의 평화와 안정을 간절히 바랐던 남편 ‘데이비드’와 자기 자식이 죽어가는 꼴을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었던 아내 ‘해리엇’ 두 사람의 마음이 모두 이해되어 안타까운 마음만 들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벤’을 구출한 이후 다른 가족들의 힐난을 감당해야 했던 ‘해리엇’에 동정심이 들면서도, 그런 시선을 던졌던 다른 가족들도 무턱대고 책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 요양소에 보낼 것이라는 처음의 생각이 변하진 않았다. 설령 내가 입장이 되어 요양소로 들어가는 희생을 감수해야만 할지언정 남은 가족들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아직 자식을 가져보지 않아서,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아직은 많이 어리고 어리석어서 이런 생각에 그친 같다. 그러므로 언젠가 내가 부모가 되어 자식을 갖게 된다면, 그때 다시 책을 읽고 싶다. 지금 시점보다 사회생활의 풍파를 많이 겪고 경험을 쌓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진 뒤에 <다섯째 아이> 다시 읽는다면, 그때의 감상은 지금과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지금은 보지 못한 것을 그때 가서는 충분히 고려할 있기를 조심스레, 그리고 마음 깊이 바라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