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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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는 자신의 가족 중에 본능적인 폭력성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의 낱낱을 섬세하면서도 과감하게 드러내어 작품 속으로 독자들을 끌고 들어가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는 독자라면 영원히 행복할 줄만 알았던 한 가정이 처참하게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나 역시도 책을 다 읽은 뒤에 찾아온 여운이 참 무겁고 짙었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어느 파티장에서 만나 첫눈에 반하며 결혼까지 골인한다. 그들은 엄청나게 부유하진 않았지만, 아이를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사는 가정을 꾸려나가고 싶어 한다. 그렇게 그들은 6년 동안 4명의 아이를 출산하였고, 양가 부모님의 경제적, 노동적 도움을 받아가며 대저택을 장만하여 친척들을 초대하고 파티를 여는 등 그들이 꿈꿔왔던 ‘행복’을 하나하나 실현해 나간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가 들어서면서 문제가 생긴다. 아내 ‘해리엇’은 임신 기간에 신통치 않은 고통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괴로움의 나날로 보내고 결국 아이를 출산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완전히 달랐다.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근육질의 다부진 몸을 가진 그 아이 ‘벤’은 본인을 보러 온 다른 형제 ‘폴’의 팔을 뒤로 꺾어버리기도 하고, 저택으로 놀러 온 다른 가족들의 애완동물들을 죽이기도 하는 등 범상치 않은 폭력성을 보인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는 고함을 치고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것은 기본이고, ‘벤’ 때문에 다른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게 되거나 가족들의 휴가를 위해 잠깐 ‘벤’을 돌보았던 장모 ‘도로시’는 온몸이 피멍투성이가 되는 등 ‘벤’으로 인해 다른 가족들은 많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 결국, 남편 ‘데이비드’는 다른 가족들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서라는 생각에 ‘벤’을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운영되는 요양소로 보내버리지만, 아내 ‘해리엇’은 그래도 본인의 자식인데 그곳에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벤’을 그곳에서 구해온다. 이로 인해 ‘해리엇’은 남편과 자식을 비롯한 모든 가족들에게 비난받으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현실에서 ‘다섯째 아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시적인 본능 중 하나인 ‘폭력성’으로 보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폭력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를 살아가면서 그것이 발현되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모두가 같은 마음이라면 혹은 같은 수준으로 통제된다면 좋겠건만 사람마다 그 정도에는 필연적으로 차이가 있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본성을 잘 누르고 살아가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의 조절을 어려워하거나 심지어는 악의적으로 그를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이 작품 속 ‘벤’의 경우에는 본인이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는 경우인 듯하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인생을, 사회를 살아가면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만약 이런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그들을 대할 것인지 한 번쯤은 깊이 고찰해보아야 할 듯싶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의견을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면 십중팔구는 이렇게 답한다. ‘피해라’, ‘너만 피곤하다’, ‘굳이 상대해서 좋을 것 없다’ 등등. 맞는 말이다.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든 피할 것이다. 하지만 내 가족이 이렇다면? 내 자식이, 내 형제가 이런 사람이라면? ‘가족’이라는 강력한 연으로 한데 묶여있다면 피하고 싶다고 마냥 피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 질문을 한 편의 소설로 풀어낸 것이 바로 <다섯째 아이>이다.

 


나라면 어떨까. 만약 내가 ‘벤’의 부모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무래도 나는 아직 부모보다는 자식의 입장에서 인생을 살고 있다 보니 ‘벤’을 요양소에 보내고 남은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 어머니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해져서 설거지 중이셨던 어머니를 붙잡고선 무작정 <다섯째 아이>의 줄거리를 대강 말씀해 드렸는데, 엄마는 ‘아이가 불쌍하다’며 ‘어떻게든 끝까지 책임지고 데리고 키울 것’이라고 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자식인데 어떻게 나몰라라 하면서 방치할 수 있냐며, 내가 ‘벤’처럼 폭력적이고 온 가족의 불행을 가져오는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지라도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을 거라 하셨다. 그 말을 들으니 괜스레 코끝이 찡하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너무 당연한 것을 괜히 물어본 것인가 싶어 어리석은 나를 탓하게 되면서도 그런 감정을 들게 한 우리 어머니한테 깊은 감동받았다. (사랑해요 엄마…) 더불어 그때 나는 나 자신을 ‘벤’으로 가정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감정 등을 아직은 감도 잡지 못하겠다는 걸, 아직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튼 어머니와의 짧은 대화 후에 다시 이 작품에 대해 생각해보니, 양측 모두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마치 딜레마에 빠진 상황처럼 말이다. 다른 가족들의 평화와 안정을 간절히 바랐던 남편 ‘데이비드’와 자기 자식이 죽어가는 꼴을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었던 아내 ‘해리엇’ 두 사람의 마음이 모두 이해되어 안타까운 마음만 들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벤’을 구출한 이후 다른 가족들의 힐난을 감당해야 했던 ‘해리엇’에 동정심이 들면서도, 그런 시선을 던졌던 다른 가족들도 무턱대고 책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 요양소에 보낼 것이라는 처음의 생각이 변하진 않았다. 설령 내가 입장이 되어 요양소로 들어가는 희생을 감수해야만 할지언정 남은 가족들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아직 자식을 가져보지 않아서,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아직은 많이 어리고 어리석어서 이런 생각에 그친 같다. 그러므로 언젠가 내가 부모가 되어 자식을 갖게 된다면, 그때 다시 책을 읽고 싶다. 지금 시점보다 사회생활의 풍파를 많이 겪고 경험을 쌓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진 뒤에 <다섯째 아이> 다시 읽는다면, 그때의 감상은 지금과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지금은 보지 못한 것을 그때 가서는 충분히 고려할 있기를 조심스레, 그리고 마음 깊이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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