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는 무엇보다도 군인이었습니다.러시아에서 태어나 폴란드에서 살다 프랑스로 이주, 2차대전에는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으로 참전, 독일군과 싸운 공으로 레종도뇌르 훈장까지 탑니다.그런 그가 전쟁 경험을 풀어낸 작품을 쓴 것은 당연합니다.더군다나 2차대전 당시 폴란드 전선을 배경으로.
로맹 가리의 소설 중 우리나라에 제일 처음 소개된 것이 <하늘의 뿌리>.그리고 1972년 <유럽의 교육>이 번역됩니다.삼진출판사 전쟁문학전집에 당당히 들어있지요.그러다가 1980년대 중앙일보사의 현대문학전집으로 나옵니다.하지만 이 소설은 2003년에 다시 번역된 이후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사라집니다.한국에서 로맹 가리 하면 주로 단편으로'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와 장편<자기 앞의 생>의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반면 <유럽의 교육>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속칭 밀덕을 포함하여 군사분야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2차대전 당시 동부전선을 다룬 책이 많이 부족함을 실감할 것입니다.우리나라가 자본주의 진영이라서 주로 미군과 영국군이 활약한 서부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선을 다룬 영화나 책이 많이 소개되었기 때문이죠.소련군과 독일군이 주로 대치했던 동부전선은 아무래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더군다나 폴란드에서 벌어진 전투? 생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유럽의 교육>은 바로 폴란드 전선, 그것도 빨치산들의 이야기입니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에는 각양각색의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프랑스 파리의 빈민가가 나옵니다.그곳 사람들은 인종이나 민족이 다르지만 서로 어울려 삽니다.<유럽의 교육>에 나오는 폴란드의 빨치산들에는 나치독일과 싸우는 온갖 민족들이 다 있습니다.폴란드인도 나오고 유대인, 우크라이나인도 나옵니다.산 아래 마을에는 빨치산의 연락책도 있지만 독일군에 협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투쟁노선을 둘러싼 저항세력 간의 갈등도 있습니다. 산악지대에서 사는 빨치산들은 민족과 종교는 다르지만 모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물리치기를 절실히 바랍니다.당연히 로맹 가리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멀리합니다.카잔차키스는 <희랍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의 입을 통해 애국이나 민족을 내세워 잔인한 짓을 했던 과오를 지적하지만 <유럽의 교육>에서 로맹 가리는 더 강하게 전쟁의 광기가 정당화하는 잔인한 애국심을 비판합니다.
<유럽의 교육>에서는 영웅적인 빨치산 운운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특히 소년빨치산이 며칠 간 친하게 사귄 독일군을 사살하고 나서 전쟁의 잔인함에 고뇌하는 장면은 압권입니다.이 장면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마치 추리소설의 결말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기에 그저 읽어서 확인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해외에서는 로맹 가리의 작품 중 가장 잘된 작품으로 <유럽의 교육>이 꼽힌다고 합니다.우리나라에서는 요 몇 년 간 로맹 가리 붐이 일고 있습니다만, 이 소설을 언급하는 이가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소개합니다.반전운동이나 평화주의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읽어도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많습니다.여력이 있다면 <유럽의 교육>을 읽고 나서 연이어 <자기 앞의 생>을 읽어도 서로 다른 민족이 어울려 살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