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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ㅣ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사토 겐타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5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을 읽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는 약 덕분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사람들은 흔히 전쟁, 정치, 사상가의 이름으로 역사를 기억하지만, 사실 인간의 생사를 쥔 건 병과 약이었다.
말라리아를 막아낸 키나나무 껍질,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킨 페니실린, 머리까지 쪼개질 듯한 고통을 덜어준 아스피린.
이 책은 바로 그 약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어떻게 한 알의 물질이 제국의 흥망과 사회의 구조, 사람들의 일상까지 바꿔놓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목만 봐도 전율이 이는 이유다. 10가지 약이라는 숫자 안에는 세계사의 드라마가 농축되어 있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등장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전염병의 이름들과 얽혀 있다. BSE, SARS, MERS 같은 질병은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지금의 코로나19까지 이어지는 장면들을 읽다 보면, 질병이란 인간이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 상대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약의 발견으로 새로운 길을 열었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찾아낸 순간, 인류는 세균과의 전쟁에서 반격의 무기를 쥐게 된다.
책 속에서 묘사되는 그 장면은 과학적 발견의 우연성과 필연성이 얼마나 기묘하게 맞물려 있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이 책은 특정 약의 발명사가 아니라, 그것이 사회와 세계 질서에 어떤 파장을 불러왔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이 없었다면 유럽의 열강이 아프리카를 깊숙이 탐험하고 식민화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수많은 제국의 확장 뒤에는 총과 칼이 아니라 약이 있었다. 동시에 퀴닌 덕에 살아난 이들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식민지 수탈의 그림자가 겹쳐 있다는 점도 빼놓지 않는다.
약이 구원자인 동시에 또 다른 권력의 도구였다는 사실은 읽는 내내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해주었다.
또 다른 장에서는 소독약과 마취제의 등장이 의료현장을 어떻게 혁신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상처를 치료하러 갔다가 감염으로 목숨을 잃던 시대에서, 깨끗하게 소독하고 통증을 줄이는 수술이 가능해진 시대까지의 변화는 극적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수술실 풍경이 불과 200년 전에는 기적과도 같았다는 점에서, 인류가 약을 통해 얼마나 눈부시게 진보해왔는지 실감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약이 곧 문명이라는 통찰이었다. 정치와 경제, 사상과 예술이 역사 교과서를 장식하지만, 그 모든 배경에는 인간이 질병과 맞서 싸운 기록이 존재한다.
저자는 과거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페니실린과 아스피린을 넘어서는 신약이 반드시 등장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인류가 걸어온 길이 이미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역사를 움직인 것은 거대한 제국이나 천재적인 지도자만이 아니었다. 한 줌의 가루, 한 알의 알약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지키고, 또 새로운 길을 열어온 것이다.
이 책은 인류와 질병, 그리고 약의 싸움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쉽고 흡입력 있게 엮어낸 탁월한 기록이다. 읽고 나면 약국의 진열장이 더 이상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곳은 세계사의 현장이자, 우리가 살아남아온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