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은 2005년이고,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처음 출판된 것이 2016년이니, 어쨌든 그 이후 내가 어느 순간에 이 책을 읽든 공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겠다.
점점 더 개소리가 많아지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개소리에 관한 진지한 이론이 없으니, 저자가 몇 가지 가설적이고 예비적인 철학적 분석을 제공함으로써 개소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을 발전시켜보고자 한다는 말에 궁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저자는 개소리의 개념 구조를 개략적으로 규명하는 목적으로 이 책을 집필한 것이고, 그러는 데에는 이 정도의 부담 없는 두께와 글이 적합한 것이다.
너무 두껍거나 부담스러운 겉모습으로는 '개소리'를 담아내는 데에 적합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특히 프린스턴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며 저명한 도덕철학자가 이야기하는 '개소리'는 더욱 신선한 느낌이 들어서 이 책을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어쩌면 이 책은 저자와 상반되는 이미지의 단어이기 때문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집중은 했지만 미세한 의미 차이를 이해하기 힘든 것은 언어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개소리와 협잡, 허튼소리, 쓸데없는 말, 말도 안 되는 얘기, 실없는 소리, 헛소리, 사기, 엉터리 등의 동의어 목록부터 설명에 집중하며 머리를 쓰며 읽어나가도 도통 느낌이 와닿지 않았고, 개소리와 불 세션의 차이를 말할 때에 한참을 단어에 집착하며 머리를 굴려도 결국은 언어의 차이 때문에 와닿지 않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역시 도덕철학자가 들려주는 개소리에 대한 이야기는 개소리까지도 철학적으로 사색하게 만드는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우연히도 더운 공기와 대변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더운 공기를 특히 소똥 bullshit에 어울리는 동의어처럼 보이게 만든다. 더운 공기가 모든 정보성 알맹이가 빠진 말인 것처럼, 대변은 영양가 있는 모든 게 제거된 물질이다. 대변은 영양분의 시체, 즉 음식에서 필수 요소가 다 빠져나가고 남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대변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재현이다. 우리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대변을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아마도 우리가 대변을 그토록 혐오스러워하는 건 죽음을 너무도 친숙하게 만들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어쨌든 대변은 자양분이라는 목적에 기여할 수 없다. 마치 더운 공기가 의사소통이라는 목적에 기여할 수 없는 것처럼. (46쪽)
또한 이 책을 읽으며 개소리쟁이와 거짓말쟁이에 대한 사색도 인상적이었다.
정직한 사람이 말할 때, 그는 오직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바를 말한다. 거짓말쟁이는, 이에 상응하게 자신의 발언이 거짓이라고 여기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렇지만 개소리쟁이에게는 이 모든 것이 무효다. 그는 진리의 편도 아니고 거짓의 편도 아니다. 정직한 사람의 눈과 거짓말쟁이의 눈은 사실을 향해 있지만, 개소리쟁이는 사실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개소리를 들키지 않고 잘 헤쳐 나가는 데 있어 사실들이 그의 이익과 관계되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들이 현실을 올바르게 묘사하든 그렇지 않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이다. (58~59쪽)
그러고 보면 우리는 개소리에 대해 관대했나 보다. 거짓말보다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왔다면 이 책을 계기로 개소리에 대한 고찰을 해볼 필요가 있겠다.
거짓말을 하려면 진리를 모르면 할 수 없지만, 개소리는 굳이 공들여 만들 필요 없이 약간의 뻔뻔함만 있으면 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