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혁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민자영의 본관은 여흥 민씨. 경기도 여주 출생이었다. 빈곤한 양반 집안의 자녀로 자랐지만,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끝내려 개혁 정치를 시도하는 흥선대원군이 간택을 단행, 그를 고종의 왕후로 책봉했다.

 

민자영은 왕후가 됐지만 고종이 이 귀인만 좋아했기 때문에, 한동안 왕과 자리를 함께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궁내의 여러 세력 간의 갈등 관계를 이용, 자기편을 만들고 세력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흥선대원군은 민자영의 여흥 민씨가 쇠락한 양반 가문이라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지만 완전한 오판이었다. 점점 자기 세력을 불려 나간 민자영은 결국 대원군을 탄핵하고 자기 일족들로 요직을 온통 채우기 시작한다. 대원군이 그토록 견제하려 했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그의 무수한 개혁 정책이 아니라, 며느리가 끌어들인 여흥 민씨에 의해 끝났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폐해가 물론 많았다 하나, 부정부패로 본다면 여흥 민씨는 역사상 그 끝판왕이었다.

 

민자영은 별기군이라는 신식 부대를 창설해 놓지만, 그 부대를 운영할 재정은 준비되지 않았었다. 밑에 돌을 빼서 위에 얹는 식으로 구 군영에 들어갈 곡식을 빼서 별기군에 지급하자 구식군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게 임오군란이었고 민자영이 도망치자, 대원군이 돌아온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민자영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대원군을 끌어내고 다시 입궐했다.

 

여흥 민씨 일족의 부정부패는 지독해서 재정이 텅텅 비어 가니 녹이 나오지 않고 지방 수령들은 저마다 자기 고을을 쥐어짜서 생계를 해결하기 시작한다. 민란의 시작이었다. 동학 농민 전쟁이 고부에서 시작해 일파만파로 치닫자, 민자영은 또 청나라를 끌어들인다. 뒤따라서 제물포로 입항한 일본군은 기관총을 들고 와 동학 혁명군을 학살하고 청나라도 몰아낸다. 자기 나라 민중이 일으킨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나라를 전쟁터로 만들고, 이제 조선은 일본에 통째로 먹힐 일만 남도록 만든 책임에서 민자영이 절대 자유로울 수가 없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또다시 청이 개입하자 급진 개화파들은 급히 일본으로 망명했고,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민자영이 이번엔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한다. 그리고 일본 공사는 일본인 낭인들을 동원해 민자영을 암살한다. 이 순간에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쳤다는 말은 판타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일이고 실제로 그는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한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민자영은 대단히 사치스러웠다. 실제 논문에 명례궁 수입이 291만 냥이었을 때, 궁의 지출은 444만 냥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엄혹하던 시기 민씨는 무엇에 그리 돈을 많이 썼을까? 궁의 지출 중 대부분이 식료비였다. 이는 연회, 다례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더 큰 지출은 고사(굿, 제사) 탓이 더 컸다.

 

민자영은 궁중에 신당을 짓고 무당과 중을 불러들여 허구한 날 고사를 지냈고 빈객들에게 선물을 잔뜩 줘 보냈다. 민자영 이전의 어떤 궁주들도 이렇게 큰돈을 들여 풍성한 연회와 고사를 지낸 바가 없었다. 화폐가치가 폭락하고 물가는 천정부지이며 일본 등으로부터 차입금이 증가하고 세수는 중간에서 탈취하는 탐관오리들로 인해 증발하던, 위기의 시대였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앉아 있던 민자영은 그나마 있는 세수조차 무속인들을 부르고 이 사람 저 사람 불러 연회를 베풀며 저렇게 탕진하고 있었다. 1880~1894년의 일이었다. 민자영 같은 이가 정권을 쥐고 있는 이상, 이미 조선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를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과 같다. 세수는 곤두박질치고 정부는 재정이 비었고 외환 보유고도 빠르게 줄어간다. 연기금까지 헐어 환율을 방어하고 있으나 한국 화폐의 가치는 계속 떨어져 가고 증시는 나 홀로 내리막길. 이런 판국에 명태* 등의 증언에 의하면 무속적인 이유로 청와대를 버리고 새로운 공관과 집무실로 이주하는데 막대한 돈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집무실에 무속인들을 불러들여 항공기에 태워 순방을 돌아다니며 해외에 나가선 쇼핑을 즐기고 의료, 교육 등에 희한한 정책들을 남발한다. 국가 원수는 주말마다 골프를 치러 다니고 주중에는 술에 절어 있는 동안 외척들이 나라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이 시기를, 후대에는 어찌 기록하고 있을까.

 

파국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가복음 4:23)

 

미국이 기준금리를 낮췄다고 하지만 미국의 시장금리는 그와 별도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물가가 잡히지 않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연준이 달러 가격을 통제하지 못하는 초유의 시대다. 이런 시국에 한국은 얼른 중앙은행 금리를 따라서 내리고 앉았다. 환율과 물가가, 이미 폭탄을 가득 안고 있는 우리 경제에 폭발을 예고하고 있다. 모피아들은 옛 여흥 민씨 척족들이 나라 재산을 저마다 빼돌리듯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막는 이도, 거칠 것도 없는 세상이다. 우리의 미래도 19세기 말 조선의 운명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인다. 종부세를 부과한 데 대해 복수심에 불탔던, ··(방가, 홍가, 김가 집안)과 토건 기업 언론들이 여론을 호도해서 앉혀 놓은 말도 안 되는 정권이 하는 짓이다.

 

참고로 김건희의 본관은 선산이며 경기도 양평군 출신이다. 그의 일족은 아무 데서나 "뒈질 놈들"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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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째 매일 가는 동네 백반집이 있다. 처음 갔을 때 기억이 생생하다. 그 가격에 어떻게 이런 음식을 만들어낼까, 싶은 밥상이 차려져 나왔다. 달지 않아서, 다정함이 배어 있어서 한층 입맛을 돋우어 주었다. 제법 시간이 흘러 이제는 주인 내외와 소주도 한잔하는 사이가 됐다.

 

주인 내외는 여전하다. 그러나 밥상은 조금 달라졌다. 장사 좀 잘되면 달라지는 그 변화가 아니다. 멋대로 뛰어버린 물가 고려하면 주위 다른 식당처럼 여러 차례 올려 받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일어난 변화다. 만들어 파는 쪽에서는 느낄 수 없을 수 있지만 사서 먹는 쪽에서는 기민하게 느낄 수 있다. 음식 질이 확실히 낮아졌다.

 

얼핏 생각하면 값 올리고 질 높은 음식 파는 게 나을 듯하지만, 30년 가까이 동네 장사해 온 처지라 천 원 올리는 일도 쉽지 않다. 동네 백반집 해서 떼돈 벌려 하겠나만 그래도 이문은 남겨야 하니 결국 배추 한 포기라도 예전보다 더 시든 것으로 사다 김치 담글 수밖에 없다.

 

나로서는 더 살갑게 그들 속을 헤아려야 할 처지다. 14년째 매일 온다고 나한테만 천 원을 덜 받으니 말이다. 그래도 달라진 밥상을 모를 리는 없다. 알면서도 고맙게 기꺼이 먹는 까닭은 여기서 먹을 수밖에 없는 내 조건 또한 헤아리기 때문이다. 돈도 돈이지만 주위 다른 식당에 가지 않는 내 나름 지닌 판단 기준이 가로놓여 있다.

 

처음 개원해서 끼니 해결할 식당을 두루 찾아보았다. 이 집을 빼놓은 거의 모든 식당이 음식을 함부로 다룬다는 인상을 받았다. 비싸지도 않을뿐더러 남에게 파는 음식이니 세태에 걸맞은 풍조다 여기지만 그렇더라도 그 앞에 고개 숙이고 앉아 꾸역꾸역 먹을 일은 아니지 않은가.

 

자기 아들딸도 내려와 먹는 이 백반집 말고는 선택할 곳이 없다. 토요일은 휴무라 어쩔 도리 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웃거리다 마지못해 먹는다. 두어 해 전부터 그런 식당 음식을 대할 때, 뭔가 다른 감정이 일어나곤 했다. 지난 주말 시장 어느 골목에서 추어탕을 먹다가 문득 그 느낌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음식에 모욕당하는구나.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정확한 표현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먹다 말고 나는 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고 단숨에 들이킨 다음 생각에 잠겼다. 모욕 주체가 음식 자체도 음식점 주인도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곧이어 들이닥친 생각은 삶이 나를 모욕하는구나.”였다.

 

이 뜬금없는 비약은 그만한 근거가 있다. 늦깎이긴 하지만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이 열린 이후 내 삶은 정치경제학 비판, 특히 최근 제국주의 공부를 거치며 개인사와 공동체 현안을 일치시키는 쪽으로 흘러왔다. 특권층 부역자 정권이 대놓고 나라를 다시 식민지로 되돌리는 중인 오늘 현실 삶은 그대로 나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

 

모욕 그것도 밥상머리에서 받는 모욕이란 얼마나 비참한가. 어떤 악의도 지니지 않은 식당 주인이 무심히 차려낸 음식에서 모욕이 느껴지는 일은 어떤 선의도 지니지 않은 김명신이 유심히 짓는 협잡에서 모욕이 느껴지는 일과 본성에서 같다. 큰 악은 작은 선을 무심코 물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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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나는가난과 현명한무식을 비대칭 대칭 반제국주의 전쟁 병기로 삼은 근저에는 용감한공포 불안을 병기 삼은 토대가 놓여 있다. 사실 이 구도는 불가(佛家) 가르침인 삼독(三毒) 탐진치(貪瞋痴)가 근원 문제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음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밝히 드러났다.

 

삼독 가운데 성냄()은 근원 범주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성냄()은 공포 불안에 앞설 수 없다. 공포 불안이야말로 인간이 느끼는 근원 감정이다. 출생 자체가 공포고, 출생 이후 삶 전 과정이 불안이다. 느낌으로서 의식되는 공포 불안, 더 나아가 병리로서 공포 불안은 인간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과잉 증후다. 특히 병리로서 공포 불안은 자체 음성 되먹임이 가능하지 않은 인간 특유 감정 상태다. 나머지 정신장애와 정신병은 모두 이 공포 불안 또는 공포 불안 장애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공포 불안 장애와 결합했을 때 더 위중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공포 불안은 다양한 원인과 과정을 통해 들어온다. 보통 개인과 그를 둘러싼 문화적, 자연적 환경을 얘기하지만, 오늘날 무엇보다 직시해야 할 문제는 바로 정치경제학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제국주의다. 제국주의, 특히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이 정착형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조성한 공포 불안이 이미 지구 전체를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제노사이드를 강령으로 하는 절대 살육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조건으로서 공포 불안을 낳는 영원 자궁이다. 목숨 잃는 일보다 더 참담한 위해와 상실은 없다. 공포 불안을 병기로 삼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공포 불안을 병기로 삼는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제국주의가 살포하는 공포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 영혼 팔아 부역하거나 비굴하게 숨지 않고 도리어 그 공포 불안을 직면해 끌어안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말이다. 제 천명대로 고난받는 용감한삶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용감하게 산다고 해서 공포 불안이 사라지지 않음은 물론이다. 뒤집어 말하면 공포 불안을 가슴에 가득 품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마음 짓이 용감함이다. 용감히 나아가면 다양한 위해, 분명한 불이익,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역자는 이미 죽은 자고, 도망자는 현재 죽어가는 자임을 안다면 공포 불안은 더 이상 ··이 아니다. 이치상 공포 불안을 가슴에 가득 품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마음 짓 자체가 공포 불안 장애를 치유하는 핵심 방편이므로 이 반제국주의 전쟁 최종병기가 바로 모든 정신장애를 치유하는 근본 의기(醫器)인 셈이다.

 

나는 80년대 짱돌 들고 거리에 섰다가 막다른 골목 홀로 백골단과 마주쳤던 공포에서 이명박 정권 때 경찰, 검찰, 법원을 드나들며 온갖 수모를 당한 끝에 한의원이 박살 나 낭인으로 떠돌았던 불안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뒤 박근혜를 거쳐 마침내 김명신에 이르는 실로 오랜 시간 동안 내 천명대로 고난받는 용감한삶을 찾아 헤맸다. 남루하고 초라한 여정이었지만 반제 전사로서 정체성을 간직하려 애썼다. 물론 나는 여전히 공포 불안 한가운데 있다. 더는 얼어붙지도 벌벌 떨지도 않을 수 있을까, 생애 마지막 질문을 위해 공포 불안 공부 길로 되돌아왔다.

 

그토록 혹독한 공포 불안에 시달렸던 내가 왜 극진히 정성을 기울인 우울증 환자에게 태고부터 드리워져 있었던 공포 불안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혹시 내가 내 공포 불안을 직면하지 못하고 엉금엉금 지나갔던 탓은 아닐까? 그렇다. 내게는 이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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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필부로 사는 동안 참 무던히도 비범한 지식을 추구해 왔다. 법학, 신학, 의학을 차례로 공부하면서 교과서 범주 너머로 나아가는 가속도가 점점 더 가팔라졌다. 스승은 둘이었다: 원효 사상과 물리학. 원효 사상은 내 사유 본진으로서 메타인지 능력을 만개시킨 사사 스승이다. 물리학은 빈틈없는 인과 사유를 통해 세계 본성으로 육박해 가도록 자극한 사숙 스승이다.

 

방정식 체계로서 물리학은 어렵다. 나는 서사로서 물리학에 다가가면서 내 아름으로 품을 수 있는 만큼만 배웠다. 예컨대 최근에 내가 고민한 문제인 “E=mc²는 어디서 왔을까?”에 대해 문송답게 간단명료한 서사로서 답을 찾아다녔으나 헛일이었다. 어떤 과학자가 아인슈타인이 E=mc² 유도 과정을 밝히지 않아서 자기 나름대로 유도했다며 제시한 전개식을 마주했는데 겉모양을 한눈에 보고 놀라서 아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포기한 채 혼자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때 홀연히 뉴턴 방정식 F=ma가 떠올랐다. 대뜸 이렇게 추정했다. “아인슈타인은 E=mc²F=ma에서 유도했다. 방법은 미적분이다.” 딱 여기까지다.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멈춤과 또 다른 까닭에서 더 멀리 나가는 물리학 지식을 이제는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찾아왔다.

 

요 두 달 동안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멈추고 서성일 때 날아든 책이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 노벨상 받은 석학 9인과 인터뷰한 내용을 재구성한 책이다. 내용 자체가 나를 바꾼 게 아니다. 읽는 동안, 이 최고 지성들이 첨단 지식에 이르기까지 들어간 어마어마한 돈 생각이 불현듯 든다. 다음 순간, 그 빛나는 지식과 기술은 내게 무엇일까, 하는 생각으로 번진다.

 

두 생각은 결국 하나다. 양자물리학이든 천체물리학이든 구미 제국 아니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거대 자본을 들여야 그 지식과 기술 축적이 가능하다. 그 지식과 기술 덕에 나는 컴퓨터며 스마트폰을 쓴다. 그러나 내게 도달한 편의는 그 지식과 기술의 부산물 또는 떡고물에 지나지 않는다. 내게는 그나마 부산물 또는 떡고물 정도라도 떨어지지만,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는 아이에게는 아무것도 가닿지 못한다. 저 돈 억만 분의 일이면 굶어 죽는 아이들을 모두 살릴 수 있다. 아이들을 희생시키더라도 인류가 도달해야 할 지식과 기술이라 할 때 과연 그게 무엇일까? 결국은 극소수 지배층에나 혜택이 돌아갈 이상향 건설에 쓰일 도구다. 인류를 다행성 종족으로 만들겠다는 일론 머스크가 그 증거다. 이때 인류는 백인, 특히 앵글로아메리칸 특권층을 말한다.

 

저들이 간직한 비전은 기독교 성서가 전하는 미신에서 발원한다. 선택된 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려 올라간다는 휴거 주술에 마름 짓하는 첨단 고급 지식과 기술에 나는 더 이상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결단한 가난처럼 결단한 능동 무식을 반제국주의 전쟁 병기로 삼는다. 제국주의 근본정신인 과대망상에 맞서 휴먼스케일 아름 슬기로 싸운다. 백전백패야말로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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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출근길, 언덕진 골목을 내려오는데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난다. 걸음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조금 걸어 옆으로 비켜주는 순간 경적이 울린다. 나는 돌아선다. 차를 가로막고 선다. 운전자가 화난 표정으로 창문을 연다. 내가 묻는다:왜 경적을 울립니까? 그가 답한다: 차가 오면 빨리 비켜야 할 게 아닙니까? 내가 다시 묻는다: 이런 골목길에서 차가 오면 사람이 비켜야 합니까? 그가 다시 답한다: 당연하죠. 내가 못 박는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흉기가 될 수도 있는 차가 사람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따라오는 게 옳습니다.

 

하마터면 싸움 날 뻔했으나 옆자리에 앉은 여성-배우자로 보이는-이 얼른 사과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차는 쌩하고 떠나고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검푸른 새벽하늘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사실 이럴 때마다 내가 혹시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닐까, “검열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고 수십 년 동안 바뀌지 않는 풍조라면 내가 유난 떤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일일이 대응하는 일도 이젠 넌덜머리가 나지만 그럴수록 모욕당한다는 느낌은 강해진다.

 

생겨날 때부터 그랬겠지만, 자동차는 그 자체는 물론 소유자, 심지어 운전자까지 귀한대접을 해줘야 마땅한 선진 문물로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했다. 자가용차는 부와 성공, 결국 계급을 의미했다. 재물을 떠나 이동 수단 개념으로까지 나아간 요즘이지만 이 통념은 오히려 강고해지고 있다. 무슨 차를 가졌는가로 신분을 알아본다. 당연하다. 대형 고급 승용차 모는사람이 경차 끄는사람 무시한다. 당연하다. 심지어 오늘처럼 보행자보다 자동차, 정확히는 그 소유자나 운전자를 우선시한다. 당연하다. 왜 갈수록 당연해질까?

 

<가난이 병기다>에서 언급한 제국주의 생활 양식 3대 아이콘이 자가용차, 자기 집, 육식이다. 이것들은 정착형 식민 과정을 환기하는 상징이다: 정복 전쟁과 자동차, 점령·소유와 자기 집, 제노사이드와 육식. 제국주의를 완성해 가는 역사를 따라 이 아이콘은 제국 경계 넘어 식민지까지 물들이며 탐욕 극대화에 주구로 복무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짝퉁이나 싸구려 떡고물이 식민지 무지렁이 부역자들에게까지 떨어뜨려짐으로써 적극·능동 부역 체제가 난공불락 지경으로 치달아 가고 있다.

 

자가용차는 제국 용병이 거침없이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진군 이미지를 화려하고 경쾌하게 만들어내어 가부장 오르가슴을 만족시킨다. 일방 독단으로 조작하고 조종하는 소유·운전자는 제국 통치자 심리를 그대로 복사할 수 있다. 운전대를 잡는 순간부터 제국 아바타가 되어 역사도 문화도 없는 인류를 살육하도록 천명 부여받은 성스러운 전사가 되니, 누군들 골목길 아니라 주차장에서라도 경적을 울려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가용차가 어떻게 제국 성막이며 군대며 병기가 아닐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가는 식민지 백성 사정을 나도 무지렁이 부역자인 한 한사코 외면할 수만은 없다. 이해도 공감도 십분 넘친다. 그러나 알고는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중첩 식민지를 살아가며 어떤 모순에 침윤되어 있는지를, 알아도 사무치게 알아야 한다. 일제 마지막 총독 아베가 축원한 바를 완수하려 뉴라이트 바지 사장 앞세워 대통이 날뛰고 있는 오늘 내 정치적 상상력은 이렇게 애먼 새벽 운전자에게까지 신랄하게 꽂힌다. 40일도 채 남지 않은 내 60대를 이 모멸로 채우고 싶지 않다.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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