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째 매일 가는 동네 백반집이 있다. 처음 갔을 때 기억이 생생하다. 그 가격에 어떻게 이런 음식을 만들어낼까, 싶은 밥상이 차려져 나왔다. 달지 않아서, 다정함이 배어 있어서 한층 입맛을 돋우어 주었다. 제법 시간이 흘러 이제는 주인 내외와 소주도 한잔하는 사이가 됐다.
주인 내외는 여전하다. 그러나 밥상은 조금 달라졌다. 장사 좀 잘되면 달라지는 그 변화가 아니다. 멋대로 뛰어버린 물가 고려하면 주위 다른 식당처럼 여러 차례 올려 받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일어난 변화다. 만들어 파는 쪽에서는 느낄 수 없을 수 있지만 사서 먹는 쪽에서는 기민하게 느낄 수 있다. 음식 질이 확실히 낮아졌다.
얼핏 생각하면 값 올리고 질 높은 음식 파는 게 나을 듯하지만, 30년 가까이 동네 장사해 온 처지라 천 원 올리는 일도 쉽지 않다. 동네 백반집 해서 떼돈 벌려 하겠나만 그래도 이문은 남겨야 하니 결국 배추 한 포기라도 예전보다 더 시든 것으로 사다 김치 담글 수밖에 없다.
나로서는 더 살갑게 그들 속을 헤아려야 할 처지다. 14년째 매일 온다고 나한테만 천 원을 덜 받으니 말이다. 그래도 달라진 밥상을 모를 리는 없다. 알면서도 고맙게 기꺼이 먹는 까닭은 여기서 먹을 수밖에 없는 내 조건 또한 헤아리기 때문이다. 돈도 돈이지만 주위 다른 식당에 가지 않는 내 나름 지닌 판단 기준이 가로놓여 있다.
처음 개원해서 끼니 해결할 식당을 두루 찾아보았다. 이 집을 빼놓은 거의 모든 식당이 음식을 함부로 다룬다는 인상을 받았다. 비싸지도 않을뿐더러 남에게 파는 음식이니 세태에 걸맞은 풍조다 여기지만 그렇더라도 그 앞에 고개 숙이고 앉아 꾸역꾸역 먹을 일은 아니지 않은가.
자기 아들딸도 내려와 먹는 이 백반집 말고는 선택할 곳이 없다. 토요일은 휴무라 어쩔 도리 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웃거리다 마지못해 먹는다. 두어 해 전부터 그런 식당 음식을 대할 때, 뭔가 다른 감정이 일어나곤 했다. 지난 주말 시장 어느 골목에서 추어탕을 먹다가 문득 그 느낌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음식에 모욕당하는구나.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정확한 표현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먹다 말고 나는 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고 단숨에 들이킨 다음 생각에 잠겼다. 모욕 주체가 음식 자체도 음식점 주인도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곧이어 들이닥친 생각은 “삶이 나를 모욕하는구나.”였다.
이 뜬금없는 비약은 그만한 근거가 있다. 늦깎이긴 하지만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이 열린 이후 내 삶은 정치경제학 비판, 특히 최근 제국주의 공부를 거치며 개인사와 공동체 현안을 일치시키는 쪽으로 흘러왔다. 특권층 부역자 정권이 대놓고 나라를 다시 식민지로 되돌리는 중인 오늘 현실 삶은 그대로 나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
모욕 그것도 밥상머리에서 받는 모욕이란 얼마나 비참한가. 어떤 악의도 지니지 않은 식당 주인이 무심히 차려낸 음식에서 모욕이 느껴지는 일은 어떤 선의도 지니지 않은 김명신이 유심히 짓는 협잡에서 모욕이 느껴지는 일과 본성에서 같다. 큰 악은 작은 선을 무심코 물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