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블루 in 그린세러피



1. 코로나블루, 올 것이 왔다

 

코로나블루, 올 것이 왔습니다. 기어이 올 것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진즉 알아차렸습니다. 왜 시치미를 뗀 채 격정 반응을 보이는 걸까요? 이대로 가면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줄곧 알고 있었음에도 설마 그날이 오늘이겠나 하다가 덜컥 도둑 같이 오니 그제야 호들갑을 떨며 위기와 근본을 연동시키는 지혜를 발휘하는 게 지난 6천 년 동안 반생명적 문명을 일궈온 인간의 퇴화된 생명 감각입니다. 자신에게서 생명 세계 전체 네트워킹을 분리한 인간은 돈과 전천후 생명 감각을 맞바꿔버린 것입니다. 이 거래의 필연적 결과가 코로나블루입니다. 바이러스가 습격해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우정, 애써 불러들인 병입니다.

 

인간은 문명의 전 과정을 통해 정신에서 육체를, 이성에서 감성을, 나에서 남을, 남성에서 여성을, 성인에서 아동을, 백인에서 유색인을, 이성애자에서 성소수자를, 비장애인에서 장애인을, 자본가에서 노동자를, 종주국에서 식민지를, 창조자에서 피조물을, 시간에서 유한성을 분리해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에서 자연을 분리해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 분리 안에 존재하는 복잡한 층위와 계열입니다. 여기에 대한 정확하고 날카로운 인식 여부는 코로나블루 이해, 대처 자세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쇠는 동물 분리와 식물 분리 경계에 존재합니다. 식물 학대와 착취를 코로나블루의 원인 또는 상관성 문제로 적시할 수 있을까요?

 

식물 분리가 제게 논쟁적 각성으로 자리 잡은 계기는 비건입니다. 비건에게 질문합니다. “동물권만 있고 식물권은 없는가?” 또는 동물권보다 식물권이 더 근원적이지 않은가?” 비건이 얼굴 있는 것은 먹지 않는다, 식용 동물을 키우려고 아마존을 불태운다, 코로나블루는 인간이 동물과 관계를 잘못 설정해 일어났다고 말할 때, 저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멈출 때, 저는 반대합니다.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얼굴이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동물 대신 식물만 먹는다고 해도 인간은 아마존을 불태우는 짓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코로나블루는 인간이 동물보다 먼저 식물과 잘못된 근원적 관계를 설정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다시 정색하고 당위 질문을 합니다. “왜 동물을 먹으면 안 되는가?” 제 개인 현실 질문으로 바꿉니다. “왜 동물을 먹지 않는가?” 저는 동물권 때문에 동물 먹기를 멀리하는 게 아닙니다. 동물이 식물보다 훌륭한 먹을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인간이 어떠함을 결정하는 주요 근거가 됩니다. 저는 동물의 분리·편향·기생 에너지와 정보를 취하고 싶지 않습니다. 식물의 통합·양향·자생 에너지와 정보를 취하고 싶습니다. 제겐 식물이 동물보다 격조 높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식물을 먹고, 따라서 극진히 감사합니다. 저는 식물을 먹을 때, 하늘이 저를 먹인다고 여깁니다. 이제 마침내 근원 질문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먹는 행위는 다른 생명을 죽여 내 생명으로 다시 살려내는 역설의 사건입니다. 살육도 필연이고 생육도 필연입니다. 인간은 먹음으로써 존재를 구현합니다. 격조 높은 생명을 차마먹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차마 먹기 때문에 먹는 행위는 거룩하면서도 즐거운 제의입니다. 이 제의에서 진정한 사제는 먹는 인간이 아니라 먹히는, 아니 먹이는식물입니다. 먹는 인간은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 생명을 전유할 권리를 전제하고 먹는 것은, 심지어 동물권을 보호하기 위해 식물을 먹는 것은 수탈입니다. 수탈당하는 식물 생명의 고통에 무감한 동물성을 저는 거절합니다. 먹는다는 것의 근원을 접어둔 어떤 최종판단도 저는 수용할 수 없습니다.

 

예를 갖춘 근원 식사에 탐욕과 향락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지나치게 많이 지나치게 맛있게 먹는 문명국가 중위 이상 집단이 없다면 저 많은 식용 동물은 물론 기업농이 벌이는 대규모 식용 식물의 생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극대화한 탐욕과 향락의 식사 문제를 존재윤리 차원에서 재검토해야 인간 대멸종이 저지됩니다. 이것이 바로 식물성 의식입니다. 식물성 의식에 터하지 않은 동물성 의식으로는 참된 종말론적 윤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종말론적 윤리는 코로나블루 앞에 선 인간을 배려한 최대한의 기회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코로나블루를 이해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식물의 그린세러피가 인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이 글의 일부 내용은 『식물의 사유』 주해리뷰5<생명을 망각한 세계-식물성 의식을 요청함> 해당 부분을 수정해 가져왔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코로나블루 in 그린세러피

 

 

코로나19가 뒤집어엎고 있는 세계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예측불가입니다. 소시민, 특히 조직에 속하지 않고 개인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삶이 뿌리째 뽑혀나갑니다. 오늘의 질곡보다 내일의 속수무책이 더 아뜩하게 느껴집니다. 변방 개원의인 저 또한 추호도 예외 아닌 상황에 속절없이 무릎 꿇은 채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환자 치료는커녕 가벼운 통증 환자의 발길조차 끊어지고 있습니다. 이 와중, 코로나블루라 이름 할 수밖에 없는 병을 앓는 분이 찾아와 상담과 약으로 치료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견디면서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최소한의 말을 남겨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입니다. 어제와 내일을 조촐히 초대하면서


0. 코로나블루가 왔다

 

~ 코로나블루가 코로나19보다 더 무섭구나!” 지난 11월 말쯤 트위터에서 본 글입니다. 전후 문장이 없어 맥락 파악은 불가능하지만 코로나블루를 쉽게 여겼던 선입견의 전복을 표현한 것 아닐까 하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사실 그 동안 우울증 자체를 쉽게 입에 올리고 쉽게 여기는 것이 사회풍조였습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다.” 대표적인 bullshit입니다. 초국적 제약회사 마케팅의 소산임은 물론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살로 치달아가는 다른 무서운 병이 이 말고 더 있습니까. 블루라는 표현이 주는 낭만적 느낌과 무관하게 코로나블루든 무슨 블루든 우울증은 무서운 병입니다. 블루인 사람이든 아닌 사람이든 같은 경각심이 필요합니다.

 

경각심의 주체는 개인만이 아닙니다. 코로나블루를 견인하고 있는 것이 코로나19 팬데믹이기 때문입니다. 국민국가 단위는 물론 문명공동체로서 인류 전체가 공공적 경각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불의의 습격 같지만 필연적 과정을 거쳐 우울증은 인간의 근본 의제로 상정되었습니다. 코로나블루라는 우연적 비의학적 명칭은 인류 질병역사에 길이 남음과 아울러 머지않아 보통명사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이 사태를 관통하고 있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인 개벽의 카이로스로 전화해내야 합니다. 개벽은 거창한 혁명이 아닙니다. 재난의 불평등을 뒤집어쓰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조용한 행진입니다.

 

코로나19는 현실적으로 동네 개인진료소에서 직면할 사안이 아닙니다. 코로나블루는 원인을 포함한 발병 조건이 코로나19라는 사실만 빼면 일반 블루, 즉 우울증과 다를 리가 없으므로 세밀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40년 동안 상담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15년 전부터는 정신장애, 특히 우울증을 상담으로 치료하는 임상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뼈아픈 실수도 많았고 죄책감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던 실패도 많았지만 실수와 실패의 시간이 그냥 날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감격에 겨운 다른 시간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경험과 깨달음에 기대 코로나블루를 초군초군 다시 들여다보고 치유 길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블루 in 그린은 불멸의 재즈곡 blue in green』(마일스 데이비스, 빌 에반스)에서 가져왔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테파노 만쿠소가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동물은 외부 자극의 종류가 다양함에도 언제나 동일한 솔루션을 이용해 응급상황에 맞선다. 이 대응이 바로 이동이다. 이동은 해결책이 아니라 난관을 회피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식물에게 중요한 것은 효율적인 문제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더위나 추위, 혹은 천적의 출현에도 불구하고그 자리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다양하게 변화하는 상황에 직면해 지속적으로 솔루션을 혁신한다.”(식물 혁명(146~147))

 

사실 그 동안 나 역시 동물의 이동을 회피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식물의 해결책도 능동적 혁신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 소식 접하면 망집이 궤멸된다. 한 생각 돌이키면 세상이 전복된다. 인간이 일으킨 거대한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찬란한 문명도 눈부신 과학도 숭고한 윤리도 본질은 도망질이었다. 한 자리에 뿌리 내려 살기로 한, 무참히 밟히고 꺾이고 베어짐에 적응하기로 한 선택은 지구 바이오매스 거의 전부를 차지한 식물의 적극 행동이었다.

 

식물 혁명에 따르면 식물의 생명 성취는 상호 필수불가결한 기축으로 구동된다. 분산(분권) 시스템, 군집 지능(집단 지성), 공동체 네트워킹의 셋이다. “초록민주주의”(137). 이는 원효를 좇으며 내가 40여 년에 걸쳐 구성해온 사상체계의 핵심과 일치한다. 놀랍지 않다. 정말 놀라운 것은 식물 세계가 이미 도달한 자연Sein을 인간 세계는 아직 당위Sollen로 추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도망질을 딱 멈추고 전방위·전천후로 식물에 귀의해야 한다.

 

식물에 귀의해 인간은 그 무엇보다 이 요구가 특이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각성부터 한다. 인간의 광적 도망질이 빚어낸 지구생태 위기가 매순간을 종말론적 카이로스로 자리매김 하기 때문이다. 각성은 지구 전체에 동시적으로 일어나, 평등하고 평화롭고 평범한 분권 연방체 구성, 평등하고 평화롭고 평범한 생명 간의 상호소통으로 수승한 집단 지성 생성, 평등하고 평화롭고 평범한 150인 공동체 200만 개 이상의 네트워킹 가동으로 번져간다. 헛꿈 아니다.

 

인류는 목하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 있다. 어찌 감염만 순식간에 지구 전체로 확산되겠나. 위기를 실감한 인류는 동시에 수십억 장의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리지 않았나. 지구생태 위기에 대한 식물 생명적 각성에서 비롯하는 일련의 운동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대대적 사막화가 문명폭발의 뇌관이 되었듯, 지구적 전염병은 문명개벽의 도화선이 될 것이다. 이 개벽은 인간 텍스트에 터한 인간 혁명이 아니다. 이 개벽은 식물 텍스트에 터한 식물 혁명이다.

 

식물 혁명은 Revolution not through but by vegetal being이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