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 프랑스에서 음악하시는 트친 한 분이 해석을 부탁하며 트위터에 공개적으로 올린 오래된 편지글입니다. 프랑스에 있는 이런 역사적 자료의 발굴 작업에 참여하시는 분인 듯합니다. 한문, 특히 초서에 밝으신 분이 계셔서 도와주시면 좋겠다 싶어 여기 올립니다. 사실 제가 한의사라 여느 분들보다 한문에 익숙하지만 한의학 문헌에서나 그럴 뿐입니다. 초서나 흘림체가 등장하면 외계어이긴 마찬가집니다.^^ 관심 가지고 살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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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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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drug에 대한 타락하지 않은primal 사람들의 태도는 우리의 태도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절대로 마약을 순전히 오락 목적으로만 사용하지 않으며, 종교의식·성인식·장례식의 한 부분으로만 사용하거나, 주술적 여행 또는 의학적 진단으로 사용한다. 그들이 마약을 사용하는 목적은 지각을 강화하고, (신적) 환상vision을 불러오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간극을 없애서 영과 접촉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마약을 실제reality에 대한 시야vision를 넓히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에게 마약의 목적은 오로지 도망이다.(207쪽) (원문 단어 붙임, 번역 바꿈-인용자)


같은 drug인데 타락을 기점으로 하나는 묘약이고 다른 하나는 마약이다. 묘약은 “실제reality에 대한 시야vision를 넓히는” 약물이다. 마약은 실제에 대한 시야를 가리려 “도망”치도록 하는 약물이다. 그 약물이 무엇이냐가 중요하지 않은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따지고 보면 앞서 직면 회피에서 거론한 활동과 여가 모두 마약과 본질이 같다. 그뿐 아니다.


강력한 마취 효과, 혹심한 부작용, 맹렬한 중독성을 고루 갖춘 마약 중의 마약은 따로 있다. 교회 세습하면서 하나님도 세습이라 떠드는 개신교 목회자나 도를 깨달았다는데 정치적 무지는 깨닫지 못하는 승려를 양산하는 통속종교가 바로 그것이다. 이신득의, 견성오도가 마비시킨 실제 시야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망상에 사로잡혀 무릎 꿇고 손 비비고 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믿는다지만 세월호사건 진실 한 올 알아내지 못했고, 죽어가는 아이 하나 건져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 신앙이 도망치는 마약일 뿐이라는 거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믿는다지만 세월호사건 터진 뒤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 조계사는 왕생극락 빈다는 현수막이나 내걸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 신앙이 도망치는 마약일 뿐이라는 거다.


종교가 마약으로서 통속성을 깨뜨리려면 김삼환, 혜민 따위의 혀끝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우리사회 “실제reality에 대한 시야vision를 넓히는” 묘약으로 거듭나고 성불해야 한다.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 아닌 이 낮은 땅 후미진 곳에서 살고 있는 소소하고 미미한 존재다. 부처님은 황금으로 칠한 불상 속에서 미소 짓지 않고 함께 고통당하며 눈물짓는 존재다.


양약良藥은 처음에 쓰지만 나중에 좋은 효과로 나타난다. 마약은 거꾸로다. 종교든 LSD든 도망의 끝은 멸망이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해 꿰뚫고 나아가려 한다면 종교도 LSD도 훌륭한 방편이 된다. 글이 막힐 경우 덮어두고 나가 고요히 술잔을 기울이는 때가 내겐 제법 있다. 대부분 돌파구를 거기서 연다. 결국 마약이라는 술도 묘약 삼으면 된다.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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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일>



유치환



하늘도 땅도 가림할 수 없어

뽀야니 적설積雪하는 날은

한 오솔길이 그대로

먼 천상의 언덕배기로 잇닿아 있어

그 길을 따라가면

그 날 통곡하고 떠난

나의 청춘이

돌아가신 어머님과 둘이 살고 있어

밖에서 찾으면

미닫이 가만히 열리더니

빙그레 웃으며 내다보는 흰 얼굴



청마 시 가운데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다. 이 시를 언제 처음 접했는지는 아슴아슴 기억이 희미하다. 적어도 30년은 훨씬 전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두 군데 빼곤 정확히 암송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 시를 노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노래의 가사로서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이다. 눈이 내리는 날은,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한없이 보고 싶지만 끝내 만나고 싶지는 않은 어머니와 함께 이 시가 하루 종일 내 영혼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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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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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적 불화를 처리하려 할 때 우리가 쓰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단순한 직면 회피다. 활동activity과 여가distraction-노동, 취미, 사교, TV 시청과 다른 오락-로 삶을 채운다. 이것들은 우리 주의를 외부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정신적 불화와 직면할 기회를 차단한다.(205쪽)(원문 단어 붙임, 번역 바꿈-인용자)


요즘 틈틈이 미셸 마페졸리가 쓴 『부족의 시대』를 읽고 있다. 통찰의 근본 지점이 같기 때문에 존중하고 유념하여 독서를 진행한다. 중요하다 여기는 대목에서 멈추고 점검하는 습관이 붙었다. “혹시 자아폭발 이후 생긴 것 아닐까?” 스티브 테일러 브레이크다.


스티브 테일러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보면 활동과 여가, 또는 노동과 휴식이 인간에게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권리며 향수享受다. <개미와 베짱이>에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에 이르기까지 긍정과 우호 일방통행로로 질주한다.


스티브 테일러 브레이크를 밟고 보면 신성한 권리인 노동, 기품 있는 클래식 애호, 곡진한 동작의 요가·······이 모두가 정신적 불화에 대한 방어기제다. 그 도로로 더 나아갈수록 어둠이 짙어진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멈추고 점검한다. “내 ‘무심코’ 지수는 얼마일까?”


무심코 도망치기에 편승할 때 현실은 잔혹하다. 잔혹한 현실에서 보호되어야 한다는 느낌조차 도망치기다. 정작 보호되어야 할 필요는 “자신의 마음”(206쪽)에서다. 불화와 도망의 대열에 무심코 뛰어들어 달리는 자신의 마음이야말로 잔혹한 수탈의 본진이다.


잔혹한 수탈의 본진인 마음, 정확히 말하면 불화가 준동하는 분열된 정신을 ‘유심히’ 단도직입으로 마주해야 근본적 변화가 시작된다. “권태, 불안 그리고 우울의 판도라 상자”(206쪽)를 여는 것이 새로운 길을 닦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맞짱 떠서 맞구멍 내기다.


맞짱 뜨기는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권태, 불안 그리고 우울과 함께 “있는” 것이다. 질량을 동원해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 에너지를 동원해 흐름을 바꾸지 않는다. 분열과 불화의 실재가 내 정신의 실재에 그냥 배어들고 나도록 인지 장場에 고이 머문다. 그뿐이다.


이 고운 시작이 없으면 어떤 뜨르르한 초월도 없다. 마음병 숙의치유 과정 초기에 내가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 “뭘 하려고 자꾸 애쓰지 마세요.”다. 그런 애씀이 도망치기라는 사실을 깨닫고서야 아픈 사람의 좀 쑤심은 멈춘다. 바로 그 순간, 신이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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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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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 간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그들이 죽음을 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고유한 개인성이 그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존재를 자연이나 공동체, 또는 그들이 속한 종족의 존재와 완전히 구별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타락과 함께 개인은 더욱 분리되고, 개인의 존재는 그들 삶의 전체적인 토대와 축이 된다. 그 종말은 예정된 공포다. 한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공동체나 남은 우주가 계속 유지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이 문제다.(199쪽)


“아버지, 왜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러시아 속담이다. 이치상 죽음 공포는 있을 수 없다. 죽음은 경험 가능한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죽음 공포의 본질은 상실 혐오다. 타락 인간에게는 목숨도 소유물이다. 자기 소유물인 목숨을 빼앗기는 상황이 너무도 싫은 나머지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목숨 소유는 부, 권력, 명성, 사람, 시간, 쾌락으로 구성되므로 이것들의 상실이 휘몰고 오는 극한 혐오가 죽음 공포의 ‘유물론적’ 본질이다.


“인간이 품고 있는 죽음 공포는 자연 인식의 결핍에서 비롯한다.” 루크레티우스의 말이다. 자연 인식 결핍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에서 분리시켰기, 아니 분리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실재에서 인간을 포함한 전체 생태계로서 자연은 모든 존재의 유기적 네트워킹이므로 죽음은 변화와 순환의 평범하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계기다. 하나의 죽음은 다른 하나의 삶과 반드시 맞물린다. 개체의 소멸은 전체의 생성과 동격으로 거룩하다.


“죽음은 성장의 마지막 기회다.” 엘리자베스 K. 로스의 말이다. 죽음을 계기로, 죽음을 통해서 인간은 전체 진실, 즉 자연에 최후의 주술적 투과를 단행한다. 이 주술적 투과는 자아 부피가 영에 가까울수록 완전해진다. 공포·탐욕·어리석음을 덜어내며 점 하나로 나아가는 성장과정인 삶이 종점에 이르는 찰나를 죽음이라 한다. 종점은 정점이다.


정점에 도달한 삶이 죽음이라면 죽음의 느낌은 절정감일 터이다. 절정감은 삶과 죽음의 분리를 단칼에 베어버리는 법열일 터이다. 이 법열은 삶과 죽음을 자유로이 구사할 때 고요한 떨림으로 찾아온다. “용무생사用無生死.” 부설浮雪거사의 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표표히 넘나들 수 있으려면 깨쳐서 증득하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증무생사證無生死.” 부설거사의 말이다.


깨쳐서 증득하기 전 몸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지무생사知無生死.” 부설거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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