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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와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 간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그들이 죽음을 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고유한 개인성이 그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존재를 자연이나 공동체, 또는 그들이 속한 종족의 존재와 완전히 구별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타락과 함께 개인은 더욱 분리되고, 개인의 존재는 그들 삶의 전체적인 토대와 축이 된다. 그 종말은 예정된 공포다. 한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공동체나 남은 우주가 계속 유지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이 문제다.(199쪽)
“아버지, 왜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러시아 속담이다. 이치상 죽음 공포는 있을 수 없다. 죽음은 경험 가능한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죽음 공포의 본질은 상실 혐오다. 타락 인간에게는 목숨도 소유물이다. 자기 소유물인 목숨을 빼앗기는 상황이 너무도 싫은 나머지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목숨 소유는 부, 권력, 명성, 사람, 시간, 쾌락으로 구성되므로 이것들의 상실이 휘몰고 오는 극한 혐오가 죽음 공포의 ‘유물론적’ 본질이다.
“인간이 품고 있는 죽음 공포는 자연 인식의 결핍에서 비롯한다.” 루크레티우스의 말이다. 자연 인식 결핍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에서 분리시켰기, 아니 분리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실재에서 인간을 포함한 전체 생태계로서 자연은 모든 존재의 유기적 네트워킹이므로 죽음은 변화와 순환의 평범하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계기다. 하나의 죽음은 다른 하나의 삶과 반드시 맞물린다. 개체의 소멸은 전체의 생성과 동격으로 거룩하다.
“죽음은 성장의 마지막 기회다.” 엘리자베스 K. 로스의 말이다. 죽음을 계기로, 죽음을 통해서 인간은 전체 진실, 즉 자연에 최후의 주술적 투과를 단행한다. 이 주술적 투과는 자아 부피가 영에 가까울수록 완전해진다. 공포·탐욕·어리석음을 덜어내며 점 하나로 나아가는 성장과정인 삶이 종점에 이르는 찰나를 죽음이라 한다. 종점은 정점이다.
정점에 도달한 삶이 죽음이라면 죽음의 느낌은 절정감일 터이다. 절정감은 삶과 죽음의 분리를 단칼에 베어버리는 법열일 터이다. 이 법열은 삶과 죽음을 자유로이 구사할 때 고요한 떨림으로 찾아온다. “용무생사用無生死.” 부설浮雪거사의 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표표히 넘나들 수 있으려면 깨쳐서 증득하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증무생사證無生死.” 부설거사의 말이다.
깨쳐서 증득하기 전 몸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지무생사知無生死.” 부설거사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