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한 끼 식사를 한의원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오늘은 416아이들과 점심을 함께했다. 막걸리 한 잔 따라 놓으니 아이들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진실의 소리도 이내 들려올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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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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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발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급격히 하강하는 불을 붙인다면, 섹슈얼리티 또한 지고한 것에서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저 하늘 높이 있는 관념론에서 평범한 일상적 오감의 영역으로 낙차를 그리는 점강법-유머가 크고 높고 강한 것에서부터 점차 작고 낮고 약한 것으로 끌어내려 표현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한다는 이론-이다. 이는 인간사 가운데 이 영역에 대한 억압이 특히나 강력하기에 그것의 방출이 그에 맞먹을 정도로 즐겁다는 사실과 더불어, 성적인 것이 언제나 유머의 확실하고 든든한 원천인 이유 중 하나다.(42쪽)


섹슈얼리티가 유머의 “든든한 원천”이란 사실은 우리가 익히 경험했다. “평범한 일상적 오감의 영역”, 그러니까 육체의 영역에 있으니 “우스꽝스러운 것” 또한 우리가 경험했던가? 실재로서 섹슈얼리티는 과연 우스꽝스러운가? 일단 이 문맥에서 테리 이글턴의 명확한 대답은 듣기 어렵다. “억압”이라는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점강과 방출의 관계를 그가 정리하지 않는 한, 도리어 모호해진다. 섹슈얼리티를 포괄하는 육체 전체 문제로 나아가본다.


매슈 베비스는 인간을 두고 ‘자신의 고유한 동물성을 불쾌하거나 웃긴 것으로 여기는 동물’이라고 서술·······했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보기에·······희극에는 육체와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알고 있는 정신의 모순된 혼합물이 내재되어 있다. 윈덤 루이스는 “모든 인간은 하나같이 ‘인간’처럼 행동하는 ‘물物’ 즉 육체이기에 웃기다.”라고 말했다. 사이먼 크리츨리는 “마지막으로, 웃기는 것은 육체가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오롯이 육체를 가지지도, 육체가 되지도 못하는 데 따른 부조화(불일치)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심지어 농담을 하기도 전부터 웃기는 생명체다.(44쪽)


이 문맥에서는 테리 이글턴의 명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여기서도 들을 수 없다. 매슈 베이스, 조너선 스위프트가 취하는 태도와 윈덤 루이스, 사이먼 크리츨리의 태도는 상반된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태도가 다소 의심스럽지만 ‘인간성인’ 이라 하지 않고 ‘인간성이라고 알고 있는’으로 표현한 것을 근거로 삼았다.) 테리 이글턴은 평가 없이 그냥 나열했다. 도리어 “부조화(불일치)”라고 중립화하고, 그냥 이렇게 봉합했다. “요컨대, 우리는 심지어 농담을 하기도 전부터 웃기는 생명체다.” 육체가 웃기는가, 아니면 육체를 웃긴 것으로 보는 정신이 웃기는가? 잠깐 기다리기로 한다.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다.


밀란 쿤델라는·······천사의 관점과 악마의 관점을 대비시켰다. 천사의 관점은 세상이 질서정연하고 조화로우며 의미로 꽉 들어차 있다고 본다.·······망상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임의성이나 우연성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이런 세계에서 나오는 말은·······“똥이 없다.” 반면, 악마의 말은 똥 천지다.·······악마는 의미와 가치가 일소된 세계 이야기를 한껏 즐긴다.·······악마는 천사의 경이로움에 갑자기 구멍을 내어 그것의 가식과 허세를 꺾어버리는 조소다.·······악마는 타고난 해체론자다.·······악마적인 것이 대체로 유머와 관련 있는 것도 당연하다.·······“웃음은 사탄과도 같다.”고 한 샤를 보들레르는 다음에 이런 문장을 덧붙인다. “그러므로 오롯이 인간적이다.”(51-54쪽)


정신과 육체가 급기야 천사와 악마의 문제로 극단화된다. 악마는 “”이다. 똥은 “천사의 경이로움에 갑자기 구멍을 내어 그것의 가식과 허세를 꺾어버리는 조소”다. 가식과 허세는 “망상”의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이다. 망상의 다른 이름이 바로 “의미와 가치”다. 의미와 가치는 이미 가소롭다. “우리는 심지어 농담을 하기도 전부터 웃기는 생명체다.” 이 말은 여기서 비로소 그 올곧은 뜻을 드러낸다. 그렇다. 웃기는 것은 육체가 아니다. 웃기는 것은 정신이다. 정신이랍시고 있는 생명체라서 인간은 웃기는 존재다. 전복이다. 


전복된 시선으로 다시 본다. 높은 데, 그러니까 정신세계에서 낮은 데, 그러니까 육체세계, 대표적인 예 섹슈얼리티로 하강함으로써 즐겁고 재미난 웃음이 유발되는 거 아니다. 정신세계의 가식과 허세를 폭로해서 억압을 풀고 원 없이 육체세계에 오감으로 가닿을 수 있기 때문에 즐겁고 재미난 웃음이 유발되는 거다. 이는 점강이 아니다. 복귀다. 복귀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다.


점강법에는 다른 심오한 의미가 있다.·······진리, 아름다움, 용기 같은 ‘높은’ 인간적 가치들은 경애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인간이 높은 이상에 부응하며 살지 못한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그 약점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도록 높은 관념으로 사람을 겁박해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다.·······윌리엄 엠프슨은·······이렇게 말했다. “가장 정제된 욕망은 가장 평범한 것에 내재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이다.”·······매혹적인 예민함, 의협심, 미덕, 지성의 가장 눈부신 발현은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경우에는 언제나 후자를 택하는 편이 낫다. 그리하여 점강법은 한낱 우스꽝스러운 희극적 비유이기를 중단하고,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비전이 된다.(49-50쪽)


가장 평범한 것” 그러니까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 다시 그러니까 우리의 육체세계에 “내재한” “가장 정제된 욕망”으로 복귀하는 것이 진실 추구의 길이다. 그 복귀는 “한낱 우스꽝스러운 희극적 비유”를 넘어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비전”이 된다.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비전을 가장 평범한 언어로 바꾸면 혁명의 꿈이다. 혁명의 꿈은 가장 평범한 것에 내재한 가장 정제된 욕망의 가장 평등하고 가장 평화로운 네트워킹의 소식이다. 우스개는 바로 그런 소식이다. 이 무슨 눈물겨운 진리란 말인가.^^ 테리 이글턴은 전복과 복귀를 눈치 채지 못한 채 이 진리에 도달했으니 이 무슨 우스꽝스런 축복이란 말인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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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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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현실 원리reality principle’라고 말한 것의 압제에 맞서면 모종의 유아적 만족감이 발생한다. 상징적 질서의 빈틈없이 강제된 구획과 정밀함이 생성되기 전에 형성된 탓에 논리나 조화, 선형성을 과감히 날려버릴 수 있는 상태로 퇴행하기 때문이다. 격렬한 웃음으로 말미암아 신체의 조정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는 이러한 태곳적 무력함으로 회귀하는 외형적 징후다. 놀이가 아이에게 하는 기능을 유머가 어른에게 한다. 다시 말해 현실 원리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고, ‘쾌락 원리pleasure principle’로 하여금 어느 정도 주도면밀하고 세심하게 조정되는 ‘자유 놀이free play’를 할 수 있게 한다.(41쪽)


프로이트의 현실 원리와 쾌락 원리 이론은 개인의 욕망과 억압에 초점을 맞춘다. 대상관계이론은 개인과 외부세계의 관계 형성에 초점을 맞춘다. 전자와 후자가 놀이를 보는 시선은 같지 않다. 프로이트만으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대상관계이론에는 있기 때문에 나는 여기 터해 놀이와 우스개 이야기를 할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의 도움을 받아서다.


마사 누스바움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도널드 위니캇의 대상관계이론은 놀이를 “잠재공간을 확보하는 상상력의 활동”으로 이해한다(『정치적 감정』285쪽). 잠재공간은 “사적인 내적 경험도 아니고, 순수한 외적 현실도 아니다. 이것은 그 둘의 중재자”(289쪽)다. 중재를 통해 “신뢰, 호혜성, 타인의 세계에 대한 존중”(288쪽)을 구축한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평화롭고 평범하고 평등한 네트워킹의 자양분을 마련하는 것이다.


놀이는, 그러니까 우스개는 단순히 개인을 의미(현실)의 억압에서 재미(쾌락)로 해방하는 것이 아니다. 우스개는 웃음의 연대를 창조한다. 우스개는 공동체적 행위다. 심지어 혼자 하는 놀이, 스스로에게 거는 우스개조차도 공동체적이다. 우스개 공동체는 재미를 증폭시킨다. 증폭된 재미는 의미의 억압에 맞서는 유쾌한 복음으로 퍼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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