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2장 본문입니다.  

 

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스러움만이 자기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 자기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남의 性을 다할 수 있고 남의 性을 다할 수 있으면 물(物)의 性을 다할 수 있으며  물(物)의 性을 다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하나가 될 수 있다.   

 

2. 흔히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성이 훌륭하면 그에 걸맞는 행위가 나온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세상에 어떤 사람은 본성이 훌륭하며 또 어떤 사람은 본성이 훌륭하지 않은가에 대한 선험적 구별을 전제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설혹 있다 해도 누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는 실천을 보고 나서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만큼 그 사람입니다. 자신이 실천한 만큼 그 사람입니다. 실천되지 않은 관념이나 지식이나 자세는 아직 그 사람이 아닙니다. 지극한 실천(至誠), 온 힘을 다한 선택만이 자기 본성을 나타낼 뿐입니다. 선택하지 않은, 실천하지 않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우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탐욕입니다. 탐욕을 거절하고, 견뎌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입니다. 그래야 중용의 이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입니다.  

 

이렇게 실천의 자리에만 자신의 본성을 매겨 넣어야 타인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참 소통은 실천의 소통입니다. 실천으로 관통하고 실천으로 흡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참 인식의 통합이 꽃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실천의 연대가 바로 사회적 본성입니다. 중용의 사회적 본질이 여기서 생겨납니다.  

 

인간사회가 중용의 이치를 담는 최종적 그릇은 아닙니다. 인간 아닌 존재, 그것이 생명이든 아니든 우리와 함께 시공간을 지나는 모든 존재와 소통함으로써 중용은 생태학적 지평을 획득합니다.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눈에 띄지 조차 않는  작은 벌레 한 마리, 돌 하나, 아니 물 한 방울까지 우리와 본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를 우리가 사랑하고, 배려하고, 보살핍니다. 그들 모두도 우리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보살핍니다.  

 

세계가 온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유아적 허상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 마주한 주체이며, 소통의 동등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일방적 제압, 착취는 있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새로워지고 자라야(化育) 합니다. 서로 경이로움을 향해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함께 그 존재 가치를 맘껏 펼쳐야 합니다. 이 경지가 大同입니다. 우리가 천지와 하나 되는(與天地參) 궁극의 차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천지와 하나 되는 일은 초월명상이나 면벽참선에서 일어나는 신비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지극한 실천의 부단한 확산, 치열한 선택의 무궁무진한 증폭을 통해 그리 되는 것입니다. 至誠에서 與天地參에 이르는 길가에 신비주의와 관념론이 더러 꽃으로 피어 우리를 잠시 쉬게 할 수는 있으나 여독이 풀리면 이내 일어서서 다시 걸어야만 합니다. 몸이 지나가지 않는 여정은 다 헛것입니다.   

 

3. 함께 살아야 할 인간 외 생명, 나아가 우리 모두의 삶의 근거이자 조건인 생태계 전반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무서운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저들이 승리하고 저들이 독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만 대가를 치르는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비는 선악을 따지지 않고 내리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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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1장 본문입니다.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  

 

정성스러움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性)의 작용이라 하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정성스러워지는 것을 교(敎)의 효과라 한다.  정성스러우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정성스러워진다.    

 

2. 치열한 실천을 통해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은 생명의 타고난 본디 작용(性)입니다. 이치를 깨우쳐서 적확하게 실천하는 것은 가르침(敎)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둘은 결국 하나입니다. 실천할수록 명쾌하게 깨달아지고 꿰뚫어 알수록 옹골차게 실천하는 법입니다. 인식과 실천은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면서 둘입니다. 아주 진부한 말이지만 한 순간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이 誠을 한사코 '정성스러움', '성실함'으로 파악함으로써 내적 자세 정도로 묶어두는 흐름이 굳어졌습니다만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우리는 誠을 철저히 동사적 의미로 읽습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정성스러움, 성실함의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내포를 넘어 적확하고, 어김없는 실천의 뜻까지도 담아낸다는 말입니다.  

 

明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밝음'이라하든 '밝아진다.'라고 하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이 드러나지 않는 해석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明은 선택과 결단에 의거한 인식 추구 행위입니다. 따라서 억압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그 어둠을 뚫고 올바른 인식을 지니는 것 자체가 이미 실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은 쉽고 실천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허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억압이 합리화된 사회일수록 인식의 전환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한 때 반독재 투쟁에서 전설적 실천가였던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의 환원을 통해 스러져 갔는지 우리는 수없이 목도한 바 있습니다. 올바른 인식은 그 자체로 벡터적 동력을 지니는 법입니다. 그들이 변절했다는 것은 그들의 인식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바꿨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는 "잃어버린 10년" 운운 하는 자들이 지금 만들고 있는 우리사회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설혹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바꾼 주체들을 짐승 취급하면서 어떻게 그 열매는 독식하려 드는 것인지 그 심사를 도무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明은 誠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한결같은 실천 안에서 明은 明입니다. 誠은 明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제 방향을 잡은 인식 안에서 誠은 誠입니다.  

 

3. 일전 송년 모임에 갔는데 뜻하지 않게 정치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30년 넘게 공무원으로 일한 친구와 가벼운 설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직 대통령에게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면서 현직 대통령은 신 대하듯 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보와 지식은 죄다 일방적 홍보에 의존한, 한 방향으로만 줄을 선 것들이었습니다. 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소주 한 잔 따라주면서 이렇게 말 하고는 이야기를 접었습니다.  

 

“찬 소주 한 잔 하고 정신 좀 차려야겠구만, 자네!”     

 

돌아오면서 그 친구와 같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깊은 좌절감이 느껴졌습니다. 늘 훈계조에다 단정적인 어법으로 자신의 배타적 인식과 실천의 악순환 구조를 강화하는 사람들에게 誠과 明의 선순환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사람들의 세상을 어떤 지혜와 인내로 살아내야 할지, 연거푸 들이켠 술 때문에 몸은 흔들리는데, 정신은 명료해지기만 하고, 어허,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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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철학의 선구적 사상가 원효 살림지식총서 327
김원명 지음 / 살림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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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 100쪽도 되지 않는 소책자입니다. 당최 여기서 무슨 큰 지식이나 정보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 연구자들에게서 뭐 더 나올 것도 없으니까요. 다만 이 책은 원효 사상이 우리 상고시대 정치철학에 젖줄을 대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어?, 이거 봐라! 하고 집어든 것입니다. 

2. 저자는 원효철학의 추측적 기원이라는 장에서  실증주의적 접근이 어렵고, 불교계는 아예 무관심이긴 하나,  당대의 역사의식과 문제의식 속에서 추측적 기원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승불교적 전통을 신라에서 원효가 고유하게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이해하고 꽃피울 수 있는 한국 고유의 지혜 전통 속에 원효가 있었기 때문이다. 혜공이나 대안, 혜숙과 같은 인물들은 바로 토속적인 벌거숭이 승려였다. 원효의 후반기는 이들과의 교유 영향이 컸다......."(27쪽) 

사실 원효 당시 상황을 보면 토착사상을 불교가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대당 유학승 집단을 중심으로 한 왕실 주변의 주류 기득권 세력과 원효를 위시한 "토속적 벌거숭이 승려"들이 맞서고 있었습니다. 한승원의 소설 <원효>의 해석에 따르면 전자의 근거지는 황룡사요, 후자의 근거지는 바로 분황사였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바, 원효의 법호가 바로 분황이라는  사실에 터 잡는다면 이런 추정적 정황이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원효가 당(唐) 유학을 두 번 시도했다가 결국은 그 뜻을 접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른바 자주불교의 웅대한 나래를 펼쳐 나아간 것은 명백히 사회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일대사건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민중의 삶 그 한가운데서 솟아오르는 생명 감각과 이치 직관으로 외부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상들을 걸러내고 넘어서는 작업은 그 자체로 외래 사상을 자신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삼고 있는 세력의 심장을 정조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긴장 요소를 이 책의 저자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단군조선의 의사결정 전통인 대감굿, 화백(和白)에서 원효사상의 토착적 근거를 찾습니다. 그러나 신라 화백회의가 여기서 온 것이고, 그렇다면 왜 다른 승려들, 특히 왕실비호 세력인 정치 승려 집단의 사상은 여기에서 발원했다고 하지 않는지  궁금해집니다. 누구보다 화백회의 한가운데서 놀았던 자들인데 왜 그들은 당나라에서 수입한 외래품 불교를 가감없이 숭상했을까요? 

원효사상의 젖줄을 단순하게 이런 식으로 찾아서는 안 됩니다. 경주 김씨 세습으로 굳어진 이후 신라 왕조의 아이덴티티를 냉철하게 살펴보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김씨 신라는 그 기원이 김일제라는 흉노족 수장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흉노 일족을 거느리고 한(漢)의 건국을 도왔던 자입니다. 왕망의 난이 일어나 입지가 흔들리자 자기 세력을 이끌고 한반도 동남부로 들어왔습니다. 그가 바로 김알지입니다.  

김씨 신라는 이렇듯 동이족의 단군조선과는 전혀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씨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것도 이런 반(反), 적어도 비(非) 동이적 아이덴티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런 진실을 안다면 통일신라 라는 말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아야만 합니다.  

왕씨 고려는 동이적 아이덴티티를 지닌 집단이 건국했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신라계 귀족들이 고려사회를 실질적으로 접수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중국에 대한 굴종 자세를 보면 신라적 아이덴티티가 부활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이씨 조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송시열로 상징되는 서인 노론 집단의 아이덴티티는 김부식의 그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들이 결국 이씨 조선을 일본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득권, 이른바 주류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 정권의 아이덴티티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골이 송연해질 것입니다. 

요컨대, 원효 사상이 동이족의 단군조선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하려면 이것을 순진하게 바로 신라와 연속시켜서는 안 됩니다. 신라 내부의 정치경제학적 긴장과 모순을 날카롭게 들여다 보아야합니다. 그 결과 나타나는 불연속성에 주의하면서 원효사상의 위치를 설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효를 반민족적 매판사상가, 반민중적 국론통일주의자로 몰아버리게 됩니다. 

원효의 일심화쟁(一心和諍)은 결코 북한을 무력으로 쳐서 하든, 붕괴를 기다려서 하든, 흡수통일하는 논거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배집단이 입만 열면 떠드는 국론통일의 수호신으로 원효를 들먹이면 안 됩니다.  원효의 통불교는 제식훈련 하는 군대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은 원효를 왜곡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왜곡한 원효는 의상과 다름 없습니다. 의상은 왕실불교 수호자입니다. 김씨 신라의 아이덴티티에 입각한 화엄세계를 꿈꾼 자입니다. 그는 토속적인 벌거숭이 승려들과 전혀 관계 없는 자입니다. 원효를 이런 의상과 한 무덤에 끌어 묻으려 하는 자들이 의도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저자의 전망은 이 함정을 어느 만큼 피해갑니다.  

".......화쟁을 국민총화와 남북통일 원리라 해석한 것이 주로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라면 2000년대의 오늘날은 남북의 조화로운 공존의 원리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원효의 논리로 볼 때, 둘이라 하기에 우리는 한 민족이자 한 나라다. 또 하나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상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한 마음에 기초해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면서 궁극적으로는 한 마음의 본원의 바다에 돌아가지만 둘 중 어느 하나가 승리하는 방식은 아니다......."(85쪽) 

구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선문답식 나가는 말 때문에 다시 멍해지기는 했지만 가까스로 중심은 잡은 것 같습니다. 

3. 저자에 따르면 <판비량론>을 포함한 다수의 원효 저작이 중국과 일본, 그리고 심지어 인도에까지 전해지고 번역되어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무려 천 년 이전의 일입니다. 그 사이 우리는 원효의 그 엄청난 저작들 가운데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어쩌면 저 김부식과 같은 무리들이 일부러 폐기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원효를 거의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변죽만 울리는 떠듦으로 시간을 또 다시 잃고 있습니다. 
불자들 조차 '영혼의 은사' 원효는 모른 채 혜능을 읊조리고, 초기불교를 주려끼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아이덴티티를 지닌 사람들일까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사무치는 마음으로 21세기의 원효를 기다립니다. 아니 각자 영역에서 자기 자신의 원효이기를 간절히 빕니다. 

4. 책 자체는 skimming 하듯 읽고 치워도 크게 실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이 책에서 암시 받은 문제의식이 묵직하게 자리 잡아서인지 책을 자꾸 만지작거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뭐 더 읽을 일은 아닌 것이 그 미련이란 게 결국 원효가 던지는 질문 때문일 테니까요. 오늘 여기 원효가 섰다면 과연 뭐라 했을까? 어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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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엽서 2012-05-12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라 김씨왕조가 남하한 흉노계통이라는 것은 어떤 사료에 근거한 학설인지 궁금합니다.
 

 

1. 제20장 일곱 번째 문단입니다.  

 

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誠者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有弗學 學之 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弗措也. 有弗辨 辨之 弗明弗措也. 有弗行 行之 弗篤弗措也.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 必明 雖柔 必强.    

 

誠은 하늘의 도이고 誠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誠한 자는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며 저절로 도에 적중하니 성인이다. 誠해지려고 하는 자는 선을 택해서 굳게 붙잡는 자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한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운다면 능해지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묻는다면 알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하면 얻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별하면 밝히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하면 독실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하나를 할 수 있으면 자기는 백을 하고 남이 열을 할 수 있으면 자기는 천을 한다. 과연 이 방법을 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연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진다.  

 

2. 길고 긴 제20장이 이제야 끝납니다. 처음에는, 울퉁불퉁하고 부자연스러워서 앞부분을 모조리 없애고 딱 이 문단만 가지고 제20장 공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내용만으로도 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다만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적 타당성을 획득해 가며 의미군을 쟁여 온 텍스트라는 역사적 현실성을 인정해 수신(修身)을 지도리 삼아 중용과 誠을 연결하는 문맥으로 이전 문단들을 자리매김 해 본 것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 자유나마 누릴 수 있는 세상이 고맙습니다. 조선시대 윤휴는 주희와 다른 해석을 했다 해서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임까지 당했으니 말입니다. 물론 지금 세상은 지금 세상대로 더 가혹한 질곡이 있지만 주희가 산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니 그 아니 다행이겠습니까.  

 

3.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誠은 성실함, 정성스러움이라고 이해하기에 앞서 중용의 中과 본질적으로 같은 뜻으로 새겨야 합니다. 제16장에서 살폈듯이 만물의 주체로서 도에서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體物而不可遺) 치열하게 실천한다는 역동적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적확하다, 벗어나지 않는다, 어긋나지 않는다는 내포로서 中과 연속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완전한 誠과 애쓰는 誠之를 구별합니다. 완전한 誠이야 舜 임금 같은 성인이나 할 수 있는 경지이니 현실적으로는 오로지 푯대요 깃발일 뿐입니다. 나머지 우리 모두는 찰나 찰나 선을 택해서 굳게 붙잡아야 하는(擇善而固執之) 노력 과정 자체로 살아갑니다. 늘 깨어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하는(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순간순간을 무릎으로 지나갑니다.  

 

안 하면 몰라도 하려 들면 하고자 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남보다 더 분투하는 과정에서 우유(愚柔)가 명강(明强)으로 바뀝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과정 자체가 誠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실천이 한 줄기 한 줄기 모여 중용의 강을 이루어 냅니다.    

 

중용은 존재가 아닙니다. 중용은 실천입니다. 중용은 결과가 아닙니다. 중용은 과정입니다. 중용은 완성이 아닙니다. 중용은 영원한 노력입니다. 중용은 특별한 자의 포효가 아닙니다. 중용은 평범한 자의 함성입니다. 바로 이런 중용의 모습을 돋을새김 한 표현이 誠입니다.  

 

4. 인터넷으로 열린 새로운 세상을 폄훼하고 통제하려는 자들이 여전히 독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 되겠지요. 아마도 인터넷 세상의 주체들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분산, 평등형 주체이기 때문에 통괄지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제약과 소란함을 통해서 그들은 쌍방향 소통을 합니다. 바로 이게 희망입니다.  

 

아마도 이들이 이른바 "21세기 중용집단"의 원형이 될 것입니다. 쌍방향 소통으로써 배우고(學), 묻고(問), 생각하고(思), 분별하고(辨), 실천하는(行) 자율 주체로서 자신이 바라는 사회를 구성해 가는 평범한 성지자(誠之者)인데 더 이상 누구의 훈계 따위를 들어야 할까요? 그들의 직관과 담론을 희화화하는 자들은 지금 제 발등을 찍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그들은 어리석다(愚), 약하다(柔) 무시당하지만 내일 그들은 밝고도(明) 강한(强) 시민으로서 성숙한 한국사회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이룩할 중용세상, 저 大同을 희망으로 부둥켜안고 지금 우리를 에워싼 어둠, 견뎌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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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0장 여섯 번째 본문입니다.  

 

在下位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 獲乎上有道 不信乎朋友 不獲乎上矣. 信乎朋友有道 不順乎親不信乎朋友矣. 順乎親有道 反諸身不誠 不順乎親矣. 誠身有道 不明乎善 不誠乎身矣.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의 신임을 얻어서 다스릴 수 없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친구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못하면 윗사람에게 신용을 얻지 못한다. 친구에게 신임을 얻는 데에도 방법이 있으니 어버이(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친구에게 신임을 얻지 못한다. 어버이(의 뜻)에 따르는 데에도 방법이 있으니 자기 몸을 돌이켜 보아 성실하지 않으면 어버이(의 뜻)에 따르게 되지 않는 것이다. 몸을 성실하게 하는 데에도 방법이 있으니 선(善)에 밝지 않으면 몸에서 성실하게 되지 않는다.  

 

2. 네 번째 문단에서 최상위 정치인에게 길게 다스림의 원칙을 설파한 데 이어 여기서는 백성과 직접 맞닥뜨리는 현장 관료에게 행정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윗사람, 친구, 부모로 이어지는 인간관계의 연결고리를 통해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이런 패턴은 제20장 전반에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실천 주체인 자기 자신을 성찰(反)하여 적확하지 못하면(不誠), 즉 어긋남이 있으면, 벗어나 흐르면 모든 인간관계에 파행이 오게 되고 결국 올바른 행정은 펼쳐지지 않습니다. 관료의 행정적 실천이라는 것도 본질적으로 인간관계의 지평을 떠날 수 없는 것이고, 그 인간관계의 고갱이에는 늘 자기 성찰이 자리하는 법입니다.  

 

3. 자기 성찰의 기준은 善에 밝으냐, 아니냐, 입니다. 善은 무엇입니까? 군더더기가 필요하지 않지요, 그대로 중용입니다. 善으로 표현되는 사적 실천이야말로 중용으로 표현되는 공적 실천의 뿌리요, 동력이요, 증거입니다.  사적 부도덕성에 눈감은 채 공적 도덕성을 입에 담는 것은 사기요 협잡입니다.  

 

흔히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들을 합니다. 허나 그 말은 여기에 쓸 게 아닙니다. 공적인 일을 사적인 이득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쓰는 상식적 경계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 현실은 이 문제에서 오류를 범함으로써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있습니다.   

 

실천적 차원에서 사적 투명성과 공적 아우라의 일치는 불퇴전의 원칙입니다. 사적인 차원에서 거짓 언행을 일삼은 자가 어느 날 공적 위치에 앉았다고 해서 환골탈태, 짐실하게 변하는 게 아닙니다. 사적 이익을 위해 위장전입 한 자는 여전히 국가 간 계약도 위장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입만 열면 도덕적 훈계를 합니다. 아, 물론 독선(獨善)이지요. 그들의 독선은 어디에 기대고 있을까요? 바로 수신하지 않은 자의 자기확신이지요. 오로지 자기 경험, 자기 종교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4. 초등학교 6학년 아이를 둔 엄마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현 정치세력과 척 질 사회경제적 신분이나 이념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 분 입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정치하는 사람들'은 왜 그럼 그리 무지할까요? 정보와 지식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핵심은 수신(修身)입니다. 자기성찰에 근본 결핍을 안고 있는 부류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지배블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에 어두운(不明乎善) 자들이 스스로 선하다 하면서 힘과 돈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성찰을 통해 자기규정을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말하기에 현실은 너무 어둡고 아픕니다. 그 희망을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희망을 버려 가고 있습니다. 지쳐 가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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