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어남과 죽음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서, 인간은 태어남의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고 죽음의 순간으로 미리 달려갈 수 없다. 오로지 섹스만이 인간의 소관이다.·······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섹스뿐이다. 그러므로 섹스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596-597쪽)
제국주의 가부장이 지배해온 역사는 전복(顚覆) 역사다. 위대함과 사소함을, 거룩함과 속됨을 홀랑 뒤집어버린 과정이 우리가 겪은 인간 역사다.
참 위대함·거룩함을 감추기 위해 사소함·속됨을 위대함·거룩함으로 둔갑시킨 짓이 바로 창조와 심판 능력을 부여해 신이라 이름 지은 허깨비다. 인간 소관이 아니라 인간이 말할 수 없는 생사 문제를 지배하려고 지어낸 허무맹랑한 서사가 남성 이미지로 칠갑한 신화와 종교 경전이다.
참으로 위대하고 거룩한 실재는 다름 아닌 섹스다. 해야 할 말이 참으로 많은 이 위대하고 거룩한 사건에 대해 인간은 장구한 세월 동안 허접한 가십류 담론을 배설해왔다. 해야 할 말이 참으로 적은 저 사소하고 속된 신에 관한, 그러니까 생사 문제에 대해 인간은 장구한 세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고급 담론을 빚어왔다.
섹스가 이렇듯 사소하고 속된 무엇으로 전락한 까닭은 바로 섹스에 대해 남성이 지닌 열등감 때문이다. 열등한 주제에 지배하려니 진실을 비튼 ‘구라’를 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섹스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 생명 창조, 그 주도권이 여성에게 있으며 심지어 전 과정에 걸친 섹스 감각마저도 여성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긍정하기는 싫고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으므로 남성은 전천후로 섹스 문제를 왜곡했다.
섹스라는 어휘를 쓰는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면 더욱 딱하다. 섹스라는 영어 어휘에 해당하는 아름답고도 의미심장한 순우리말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그 말을 공식적으로 ‘점잖은’ 글에 쓸 수 없는 뉘앙스를 장구한 세월 동안 만들어 넣었기 때문에 저기 『몰락의 에티카』에도, 여기 내 글에도 쓰지 못한다. 이중 억압, 그러니까 중압(重壓)이다.
억압을 풀고 전복을 다시 전복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섹스가 왜 위대하고 거룩한가를 근본에서 밝히는 일이다. 정치와 도덕 그늘을 벗어나 진실 빛 아래서 섹스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디테일은 뒤로 미루고 간단명료한 이치 하나만 밝혀본다.
섹스는 비대칭 대칭으로 이루어진 세계 진실 요체에 해당한다. 관통과 흡수를 쌍방향으로 주고받는 모든 거래(去來) 시원에 다름 아닌 섹스가 있다. 삶과 죽음, 들숨과 날숨, 먹기와 싸기, 잠자기와 깨어 있기, 일과 쉼, 이 모든 대칭 거래 사건, 그러니까 거룩한 생명 운동 시리즈는 섹스에서 비롯한다. 이에 대한 통찰을 건너뛴 이른바 큰 지혜들이 공허한 까닭은 결코 다른 데 있지 않다. 진실에서 벗어나 제국 가부장이 견지하는 ‘야동’ 관점을 고수하는 한 깨달음과 슬기로움은 미망을 떨쳐버릴 수 없다.
국가가 159명 국민을 고의로 죽이고도 ‘사고’로 처리하는 몰염치 또한 결국은 ‘야동’ 관점으로 정치를 희화화하는 제국주의 부역 패거리 탐욕에 기인한다. 근본을 말아먹고 진위를 전복한 사악한 자들 손아귀에서 생명을 구하려면 적나라한 진실 정곡을 단도직입으로 찔러 들어가 모든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결기가 필요하다. 고급 지성이든 통속 저널리즘이든 에두르는 얄팍한 타협을 지속하는 만큼, 생명은 지금처럼 속절없이 죽어가리라.
2. “문제는 섹스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달리 없다는 데에 있다. 어째서 그런가?···섹스는 결합인데, 결합은 불가능하고, 불가능을 반복하는 일은 고통이기 때문에···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외면해야 한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597쪽-마지막 두 문장 순서 바꿈은 필자)
결합을 위한 유일 유력한 길인 줄 알고 들어서서 가보니 도리어 결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심연을 목도하고 마는 섹스 고통. 고통인 섹스를 직시해야만 알아차려지는 진실. ‘진실은 늘 고통과 더불어 오고,’ 그 고통을 한사코 피하려는 인간에게 섹스는 진실을 은폐할 다시없는 수단이 된다. 진실을 외면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보상, 그러니까 생명 창조-그렇지 않은 섹스가 물론 있다-와 쾌락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결합했다고 스스로 속일 수 있는 천하 마약인 셈이다. 마약에 중독되지 않고 진실을 맞이하려면 결곡 곡진한 질문이 필요하다.
결합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결합이란 사태가 가능하기는 한가? 결합이 가능하지 않다면 당연히 고통스러운가?
섹스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둘이 되기 위해서 하는 거룩한 행위다. 좀 더 진실에 육박한 기술(記述)은 “아름다운 둘이 되는 일이 바로 결합하는 일이다”(593쪽)다. 이 말을 두고 형용모순이니 이율배반이니 떠들기 전에 대뜸 알아차려야 할 진실이 있다. 즉, 우리가 결합을 오해하고 있다는 진실. 우리가 여태껏 속아온 결합은 제국주의적, 변증법적 결합이라는 진실. 제국주의적, 변증법적 결합은 반드시 폭력을 전제한다는 진실. 폭력을 전제한 결합은 없어야 한다는 진실. 아니. 당최 없다는 진실. 그 결합을 결합이라 한다면 극한 분열을 결합이라 우기는 짓이라는 진실. 우기는 섹스로는 참된 결합, 그러니까 아름다운 둘이 될 수 없다는 진실. 아름다운 둘이 될 수 없으므로 괴로움으로 받아들인다는 진실.
이제 진경으로 썩 들어서 본다. 아름다운, 아름다운 둘. 아름답다는 말이 핵심 중 핵심이다. 칼릴 지브란 절창 일부를 듣는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그렇다. 저 출렁이는 바다 때문에 아름답다. “무섭도록 내밀하고 끔찍하도록 격렬”(597쪽)한 “심연”(597쪽) 때문에 아름답다. 그 바다를, 그러니까 “몰락”(5쪽)을 “선택”(5쪽)하였기 때문에 “참혹하게”(5쪽) 아름답다. 아파서 아름다운 그 표정 둘은 “숭고”(5쪽)하다. 아프(痛)되 괴롭지(苦) 않다. 고통이라는 잘못 교배된 키메라 허깨비는 사라진다. 허깨비를 피하려고 외면하는 일도 사라진다. 직면하면 말할 수 있다. 그 말을 우리는 “섹스‘하는’” 인간이라 한다.
혼과 혼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아름다운 둘이 되려 하는 사람들에게 그 바다를 메우라고 말하는 자, 그러니까 거짓 결합을 설파하는 자는 미상불 사탄의 주구, 그러니까 제국 백색문명 부역자일 테다. 부역자가 패거리로 몰려들어 아름다운 둘, 그 숭고함을 때려 부수는 일이 지금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다. 무섭도록 내밀하고 끔찍하도록 격렬한 심연, 그러니까 아프디아픈 진실을 덮어야 제 곳간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생명과 안정이라는 미소를 흘리며 치명적 섹스로 홀리고 있다. 제국 백색 문명에 짓밟힌 사람이여, 오늘이야말로 녹색 섹스 ‘하는’ 삶을 살 때가 아닌가.
3. “‘나’는 ‘나’를 ‘너’에게 먹임으로써 ‘나’ 자신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다. 사랑은 우리를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 그것이 봉헌의 기적이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아름다운 둘이 되기 위해서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593쪽)
칼릴 지브란 절창 전부를 듣는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시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연 재구성은 필자)
결혼식에 가면 주례가 흔히, 아니 빼놓지 않고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로 사랑을 강조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며느리 아니고 딸이라며 시아버지더러 안아주라 하고, 사위 아니라 아들이라며 장모더러 안아주라 한다. 이런 언행들이 모두 호들갑 떠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주례를 설 때, 반대로 서로 남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호들갑은 도리어 현실 인식을 모호하게 하고 왜곡시켜 진실을 흐트러뜨릴 따름이다. 부부는 정녕 일심동체일까? 그래야 할까? 이미 칼릴 지브란이 답을 주었다.
저명인사 부부가 TV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 자기들은 한평생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사회자와 방청객이 함께 감탄하는 광경을 가끔 볼 수 있다. 실은 감탄이 아니라 탄식해야 마땅하다. 한평생 부부싸움이 성립하지 않을 조건은 딱 두 가지다. 서로 싸울만한 거리 밖에 있었거나, 어느 한쪽이 늘 죽어지냈거나. 후자 경우, 가부장적 우리 사회에서라면 당연히 여성 배우자 쪽일 터이다. 둘 다 정상적인 부부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기에 감탄과 존경을 보내는 일이 난센스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자아를 버리지 않는, 그러니까 봉헌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문제는 그 봉헌이 쌍방향이냐 아니냐다. 쌍방향성이 확보되어야 ‘타자성의 긍정과 자기 상실의 긍정이라는 이중 긍정’(593쪽)이 가능하다. 나를 버려 너를 살리는 행위가 마주 이루어짐으로써 자타와 생사 모순이 공존 역설로 달여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일방적 희생 자기 해체도, 일방적 수탈 자기 구축도 세상을 죽음으로 내몬다. 주는 사랑이 희생이 아니고 받는 사랑이 수탈이 아닐 때 비로소 이중 긍정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식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 사회는 이중부정 힘에 맹렬하게 이끌리고 있다. 제국 백색문명에 부역하는 특권층 패거리한테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타자성 부정, 자기 상실 부정 말이다. 특권층 부역 패거리는 파렴치한 자기 구축을 위해 절대다수 타자성을 잔혹하게 부정한다. 그 파렴치와 잔혹은 대놓고 함부로, 전방위·전천후로 드러난다. 놀라운 점은 드러날수록 파렴치와 잔혹이 더해간다는 사실이다. 누가 이 상황을 만들었을까. 어찌해야 아름다운 둘이 될까. 분노가 쌓이는 이상으로 공포·불안이 깊어진다.
깊고도 푸른 공포·불안을 극복할 아름다운 둘에서 “아름다운”은 그저 정서적 수사가 아니다. 신비주의와 기계론을 동시에 관통하는 질량이며 에너지며 ‘소식’이다. “둘”은 그저 ‘하나 아닌 둘’이 아니다. 하나, 둘에서 ‘둘 아닌 둘’이다. 이는 청원 유신 마지막 문장 “山是山 水是水”, 바로 그 산인 산, 물인 물 실재다. 아름답지 않으면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면 아름답지 않다. 이 아름다운 둘에서 팡이실이로서 사랑이 창발한다.
4. 앞 세 이야기는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 주해(알라딘 서재: 싸리·버들 글숲)에 쓴 내용과 순서를 고쳐 다시 썼다. 이 수정에는 1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는 동안 진전된 공부가 일정 정도 반영돼 있다. 여기에 다음을 부가한다.
마지막 글 인용문에 나오는 “먹임”과 “봉헌”이라는 말에 좀 더 내밀하게 배어들어 본다. 나를 너에게 먹인다는 표현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성과 그 사랑은 내 생명 실재를 네게 먹이는 일이다. 봉헌이라는 표현 또한 관념이 아니다. 성과 사랑은 내 생명 실재를 네게 제물로 바치는 일이다. 먹임과 봉헌이라는 표현에는 더함도 덜함도 없는 액면가가 매겨져 있다.
성교 사건은 식사 사건이며 제의 사건이다. 제국 백색문명은 이 모두를 도구화했다. 도구화는 오락화다. 오락화는 희화화다. 희화화는 종말론적 증후다. 오늘 우리 사회 풍경이 웅변으로 증언한다. 감각적으로 가장 손쉽게 확인하는 방법은 TV 채널을 차례로 돌리는 일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든 프로그램이 희화화된 장면을 곧바로 마주할 수 있다. TV만이 아니다. 대중매체 거의 전부가 그렇다. 이는 정치 희화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국가수반과 그 아내가 스스로 희화화하는 풍경을 시시각각 마주하니 모방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 상황에서 놓여나려고 통속한 지성과 저널리즘으로 비판하는 일은 겨 묻은 손으로 똥 묻은 손을 씻는 짓이다.
나그네가 병들었을 때 고치려면 고향으로 돌아간다. 우리 존재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본다. 단세포 생명체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체 하나를 먹는/먹이는 태초 사건에서 다세포 생명체가 탄생했다. 먹다/먹이다, 이 표현은 오늘날 인간이 지니는 이해 능력에 비추어 사건 전체를 담아낼 수 없다. 단세포 생명체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체 하나와 성적으로 결합해서 다세포 생명체, 그러니까 “다른 존재”, 다시 그러니까 “아름다운 둘”이 되었다는 표현이 더해져야 한다. 하나가 더 필요하다. 단세포 생명체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체 하나에게 봉헌하여/되어 창발적 제의, 그러니까 네트워킹 사건이 일어났다는 표현까지 더해져야 한다. 이 진실 전경 앞에서 낄낄대는 순간 저 “봉헌의 기적” 거룩한 계보에서 이탈한다.
거룩한 계보는 다른 이름을 지닌다: 공생. 린 마굴리스가 밝힌 우리 시대 최고 진실, 인간은 정확히 질량으로, 에너지로, 소식으로 이 세포내공생 계보를 따른다. 공생으로서 인간 심신 생명 구성 자체가 이미 다른 생명과 성교하고 식사하고 봉헌한/하는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성교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일은 다른 생명체를 먹는 일, 죽어서 다른 생명체 먹이가 되는 일과 본성이 같으며, 이 두 일 모두 신성하고도 질탕한 제의 본성을 지닌다.
성교와 식사와 제의는 서로 가로질러 감으로써 “아름다운 둘”이 소통하는 전경을 풍요롭게 만든다. 인간이 지니는 성적 지향, 또는 성정체성이 이렇게 인간 경계를 넘어간다. 내가 숲에 들어가 걸으며 풀을 만지며 냄새 맡는 일은 숲과 성교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이 식사하는 행위도 이렇게 인간 경계를 넘어간다. 내가 숲에 들어가 걸으며 풀을 만지며 냄새 맡는 일은 내가 숲을 먹는 일이기도 하고 숲이 나를 먹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이 행하는 제의도 이렇게 인간 경계를 넘어간다. 내가 숲에서 길을 잃는 일은 숲에 빙의되는 일이다. 내가 숲에서 버섯에게 몰입하는 일은 버섯에게서 신성을 불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녹색 성, 그 사랑은 인간, 그 너머 모든 생명이 평등한 공동 주체로 제국 백색문명에 맞서 통일전선을 이루도록 하는 거룩하고 질탕한 팡이실이 사건이다. 무심코, 함부로, 더군다나 낄낄거리며 대해서는 망한다. 망조는 벌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