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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정희진이 쓴 글로 일어난 논란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글깨나 읽는 사람들에게 정희진은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나는 그가 쓴 <내전과 공존>을 읽기 전 제목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전쟁이라면서 어떻게 공존이란 말을 쓰는가? 읽으면서 또 이상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둘 있다정희진이 말하는 공존이 과연 공존인가? 단호하게 대처하는 일과 존재를 존중하는 일이 어떻게 반대 개념인가그 글과 강성현이 페이스북에 쓴 글을 함께 올린다.

 

 

정희진(여성학자)

 

지난달 말 윤동주 시인 80주기를 맞아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새벽에 공항 가는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느닷없이 된소리로 쭝국 가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우리나라 선관위 직원 대부분이 중국 사람이라는 주장부터 특정 정치인들은 사라져야 한다며 열변을 토했다.

 

이럴 때 그와 생각이 다른 승객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해야 할까. 무시하며 자는 척해야 할까. 이견을 제시하고 설득해야 할까나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고문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 그런 상황을 우리는 폭력이라고 부른다. 나는 폭력 상황에 노출되었고 동시에 공모했다.

 

12·3 이후 윤석열 대통령의 내란 기획이 불과 두세 달 만에 내전(內戰) 상태로 변화했다고 본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은 한국 사회에 내전은 없다고 진단한다(경향신문 314일자). 아직 30% 이상의 두꺼운 중도층이 있고, 인종적 갈등에 기댄 종족주의형 정체성의 정치가 출현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물리적 폭력을 국가가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부의 공공 서비스와 행정의 질이 우수하다는 것이 그의 근거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상부구조의 측면, 이를테면 반북, 반중, 반여성 이데올로기에다 종교의 감정화 등 정치적 정동(情動·affection)의 면에서, 대한민국은 현재 내전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헌재가 어떤 판단을 내리든 간에 어느 쪽도 승복하지 않으리라는 예상과 염려도 이러한 정서적 내전상태 때문이리라. 모두 헌재의 판단 이후가 더 문제라는 데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전 세계적인 우익의 출현은 후기 식민(냉전) 체제와 신자유주의 통치의 산물이다. 독립을 해도 제국주의 지배의 후과(後果)로 자국민들끼리 이념적으로 혹은 인종적으로 분열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아프리카의 르완다이다. 르완다 내전의 배경은 식민 지배자였던 벨기에의 분할 통치다. 1959년에서 1996년까지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일어난, 다수지만 피지배 계급인 후투족과 소수인 지배 계급 투치족의 부족 간 갈등으로 인한 르완다 내전은 학살, 질병, 기아로 수백만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특히 19944월부터 7월까지 단 100일 만에 50~80만명이 학살되는 참사가 벌어진 르완다 사태는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이 역사는 테리 조지 감독의 2006년 영화 <호텔 르완다>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간헐적 충돌과 희생은 많았지만, 한반도는 지난 70여년간 평화로웠다.’ 지금 한반도의 상태도 미·소 냉전 체제의 유산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일명 태극기 부대인데, 실제로는 태극기만이 아니라 성조기와 영국기와 이스라엘기까지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시민운동가인 지인과 현재 한국의 극우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그의 말에 놀랐다. 그는 극우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호한 대처의 구체적 방도가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대화가 불가능한 상대에 대해 단호한 대처라는 발상에 당황했다. 이것은 정말 싸우자는 이야기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양쪽은 맨손으로 백병전이라도 할 기세다. 아니, 이미 법원 습격이라는 폭력 사태가 발생했고, 폭력의 연쇄는 앞으로도 예상되는 일이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생각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바람직한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이런 경우 단호한 대처는 진짜 내전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폭력의 반대말은,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지금 한국 상황에서 최선은 공존에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공존은 타인에 대한 배려나 공감이 아니다. 스스로 극도의 인내와 긴장을 동반하는 신경증적 상황의 지속이다. ‘를 없애겠다는 이들, ‘의 죽음을 기도하겠다는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들과 같이 살아가겠다는 각오는 평화가 얼마나 지옥 같은 전쟁 상태와 같은 것인가를 일깨워준다.

 

극우와의 공존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한다는 의미다.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들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1992~2018)라는 시민단체에서 오랫동안 일한 지인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많은 이가 우리 단체 이름을 미군근절운동본부라고 불러요.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을 근절합니까. 미군은 철수해야 할 대상이고, 우리가 근절하려는 것은 미군이 저지르는 범죄지요.” 그는 미군 근절이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여성주의도 마찬가지다. 여성과 남성 모두 가부장제 사회 밖에서 살 수 없다. 삶은 가부장제와 협상과 저항을 반복하며 종속적인 주체(subject)로 살아가는, 구조와 개인이 모두 조금씩 변형되는 일이다. “가부장제 타파, 근절구호는, 구호일 뿐 실현할 수 없는 관념이다. 우리는 평소 근절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근절되는 세상사는 없다. 나쁜 통치는 형식을 달리할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번 달라지는 그 통치 형식(항시적 비상사태)을 이해하는 것이다.

 

언젠가 류승완 영화감독은 유명한 만화 <톰과 제리>가 주는 공포와 긴장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우둔한 고양이 과 영리한 쥐 제리의 공존에 관한 이야기다. 이러한 상황이 실제라면, 제리의 삶은 공포와 견딤 그 자체다. 대개 생태계를 먹고 먹히는 관계로만 이해하지만, 공존의 관계도 있고 천적과의 균형도 중요한 요소다. 문제는 그리고 우리의 고민은, 공존과 균형이 약자의 몫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운동은 공존을 위한 지혜를 모으는 일이다. 생각하는 사람인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해치고(극우), “단호히 대처”(진보)하고자 한다면 대립은 영원할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극우 현상을 분석한 202533~9주간경향’ 1618호의 표제는 극우가 됐다. 저쪽이 싫어서이다. 이 커버 스토리는 우리 사회의 극우가 진보의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극우가 된 이유가 그만큼 민주당, 진보 진영 등 범야권에 대한 기대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극우가 진보의 안티테제로 등장했다면, 결국 누가 잘해야 할까.’ 나는 다른 나라 극우의 인종주의적 성향과 달리, 이러한 상황이 다소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범야권의 발상의 전환과 각성에 따라 변화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극우에 단호히 대처해서는 안 된다. 상호 인정, 공존만이 모두가 살 길이다. 당연히 극우는 공존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극우다. 극우가 공존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극우처럼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는 양보했는데, 상대(극우)는 그렇지 않다는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다.

 

역설적이지만, 공존은 한쪽의 의지만으로도 가능하다. 어차피 극우의 사고는 누군가의 설득으로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가 한 대 때리면 나는 두 대 때린다. 혹은 상대가 먼저 때릴 것 같으므로내가 먼저 공격한다는 선제타격론을 논리적으로 반박한다고 설복되겠는가? 극우는 설득 대상도 투쟁의 대상도, 더구나 사라져야 할 이들도 아니다. 사람의 생각은 비판해도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

 

강성현(성공회대 교수)

 

"단호한 대처"를 폭력적으로, 물리적인 것으로 상상할까?

'공존'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상호인정'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할까?

 

과거 나는 잘 알고 지냈던 일부 '역사수정주의자'들과 토론을 시도하며, 서로 인정하고 거리를 좁혀보려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후 뉴라이트와 극우 비판 때문에 종종 표적이 되어 마음고생을 했고, 공포감을 느끼던 시간도 있었다.

 

지금 나는 그들과 직접적으로 논쟁하지 않는다. 논리나 방법으로 대화하며 공통의 감각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접었다. 만약 말과 글로 논쟁이 벌어진다면, 난 단호하게 대처하고 대응한다. 논문과 책을 쓰고, 페북이나 유튜브 등 뉴미디어를 활용하며, 필요하면 방송과 신문 미디어에 기획을 제안하거나 인터뷰를 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각오를 하고 대응한다. 악의를 가진 혐오 집단과 마주할 때, "단호하게"라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그들이 쏟아내는 폭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 대응의 대상은 뉴라이트나 극우가 아니라, 그들과의 충돌을 지켜보는 토론 가능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 분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싸운다.나는 뉴라이트나 극우를 물리적으로 공격하거나 또 다른 혐오, 증오 발화로 대응할 생각이 없다. 그들의 폭언과 위협 속에서도, 폭력을 감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자리에서, 또는 그 옆자리에서 주눅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싸우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뉴라이트나 극우들을 변화시키려 하지는 않는다. 그들과의 논쟁에서 이길 수 있다거나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기는 정신승리이고, 그들에게 하는 어떠한 말글의 논리도 무화되기 때문이다.

 

공존이란 무엇인가? 나는 극우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과의 공존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어쩌면 앞으로도 처한 상황인 것이고, 그렇다고 공존을 위해서 상호 인정까지 할 생각은 없다. 현재 극우가 표적집단에게 저지르는 부정과 타자화, 비인간화는 자칫하면 끔찍한 물리적, 사회적 파괴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1.19 서부지법 폭동에서 그런 에너지를 느꼈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는 대응, 아니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얼마 전 KKK집단과 대화하며 친구가 되었다는 사례들을 접했다. 흥미로운 경험이지만, 나는 그것이 특수한 경우라고 본다. 그런 사례들을 통해 어디까지 성찰할 수 있을지 누군가는 극한에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한다.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상대와의 대화를 지속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한계까지 지속해야 그들에게 나와 우리를 이해시키고 공존할 수 있을까? 만약 극우가 변화한다면, 그 때 비로소 대화할 여지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극우 관련 조사와 분석에서 나는 현재 극우 대중의 절반 정도만이 극단적인 의미에서 우파라고 분석한 걸 읽었다.

 

나는 극우를 단순히 '급진적인(radical)' 우파 사상과 생각을 가진 집단으로 보지 않는다. 급진적 우파는 특정 집단을 혐오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 그리고 피해자들에게 그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수법을 퍼뜨리고 행하는 이들이다. 나의 대응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내 눈 앞에서 물리적으로 치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리와 수법이 왜곡과 사기로 점철되어 있음을 폭로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extreme)' 우파는 다르게 보아야한다. 그들은 혐오를 넘어 타자를 비인간화하고, 린치하며, 굴복시키려 한다. 심지어 죽이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존''상호인정'이 과연 가능한가? 타자화되고 폭력에 스러져간 집단은 살아 있다면, 그냥 숨쉬고 사는 것이다. "살다 보면 그냥 살아진다"라는 말이 난 너무 싫었다. 제주 출신 연구자로서 나는 국가폭력과 극우 집단의 폭력이 결합하는 지점을 연구해왔다. 현재 극우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와 상징, 그리고 물리적인 폭력도 불사하는 모습은 역사 속 가해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 그들은 반공청년단, 백골단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그게 힘이 세 보이고 쿨하다고 생각해 과거 가해자 집단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나는 극우의 폭력에 단호하게 대처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현재로선 요건과 절차에 따라서 형식적으로, 때로는 기층 사회적 약자 집단의 누군가에게 폭력적으로 자행되기도 했던 에 그 역할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법기술자들의 법률전쟁이 극우들을 돕는 이 상황에서 헌법과 법률, 그리고 이의 요건과 절차에 따른 형사절차에 기댄다는 것은 어쩌면 무기력해보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법치주의 앞에 민주적이라는 말을 붙여 민주적 헌정질서를 존중하고 그 취지에 따른 법 집행을 더 강조할 수밖에 없는 궁색한 상황이다. 동시에 현재로선 그게 나의 단호한 대응의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게 형사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게 전부는 아니기에 언어의 내란 시대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담론 투쟁을 해야 한다. 나는 법적인 진실 규명과 이에 따른 법적 해결이 전부라고 생각해 본적 없다. 역사적, 사회적 진실의 차원은 더 입체적이고, 극우의 폭력의 메커니즘에 관심을 갖고, 이에 맞서 어떻게 대처하고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극우의 얼굴은 특정 극우 목사, 유튜버, 정치인 등의 얼굴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극우는 ''가 아니라 '어떻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고민해온 분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극단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나는 앞서 말한 차원에서 단호한 대처와 대응을 할 것이다. 폭력적인 방식의 맞다툼이 아닌 채 얼마든지 단호하고 조직적인 대응을 할 수 있고, 그렇게 극우의 확산을 막고 고립되게 할 것이다. 그 때 비로소 휘말려 들어갔지만 이탈하는 그 누군가를 대면하고 상호 인정하기 위해 공존을 다른 의미로 확장시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단호한 대응은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갈 새로운 사회, 공동체를 만들어갈 때 필요한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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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희종(서울대 명예교수)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많은 이들이 나이 들어가며 접하게 되는 치매(Dementia)를 정신을 잃는다는 것으로 착각한다. 아밀로이드 축적 등으로 뇌세포가 죽어서라고. 전형적으로 치매를 생물학적 형태로만 파악하는 외눈박이 관점이다.

종종 방금 식사를 했으면서도 기억 못하고 다시 밥 달라는 치매는 몸의 신호를 무시한 왕성한 정신 작용의 발현이다. 몸에 의해 형성되어 몸과 함께 작동하던 정신 작용의 통제 불능 활약인 셈이다.
몸이라는 ‘안이비설신‘에 의해 만들어진 ’의식’이기에, 나이 들어 신체 기능이 떨어짐에 따라 몸에 의한 연결과 관계성이 약해져 정신 작용 자체가 제멋대로 발현 되는 현상이 치매다.

이는 암 세포들이 주변 조직과의 정상 소통이 망가져 주변과의 관계성이 깨지면서 제멋대로 분열해 자라나는 것과 유사하다. 면역 네트워크를 이루는 많은 세포와 물질이 건강하지 않을 때 암이란 질병이 나타나듯이, 뇌신경망의 여러 세포 건강성이 무너져 정신작용이 제멋대로 작동할 때 치매가 된다. 즉, 신체와 정신이라는 ‘안이비설신의’의 통합성이 깨짐으로서 ‘의식’이 몸과의 관계성을 벗어난 상태.


이는 몸의 통합성이 지체에서 무너져 팔다리가 따로 움직이거나, 감각 중의 하나가 별도로 움직이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 치매란 정신을 잃는 것이 아니라 몸의 통합성을 잃어가는 것이다. 전형적인 환원론에 근간해 뇌세포 속 아밀로이드 등의 원인 물질 찾기로만 해결하겠다니, 훗날 얼마나 원시적 접근이라 할 것인가(근대 과학이 그렇지만). 내 관점으로 보면 아밀로이드 등의 물질은 원인물질이라기보다는 결과물인 셈이다.

생명체는 몸 기반임을 잊고 정신을 독립시켜 형이상학의 의미 부여해 온 인류 문화가 치매의 함의를 가려버린다. 고령화로 신체가 노쇠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되는, 몸의 다른 감각과 분리된 정신 작용이라니… 모든 것은 관계와 균형이 통합적일 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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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일이송(영화감독)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트럼프 때문에 지지율이 폭등하는 사람이 있다. 멕시코의 대통령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무려 85%의 지지율을 끌어모았다. 천장을 뚫을 기세다.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과두제 우익들뿐. 이런 정도의 지지율은 30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어쩌면 앞으로 90%까지도 가능할 거라고.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 그리고 기후과학자 출신의 멕시코 첫 여성대통령의 임기가 폭발적인 지지를 안고 시작된 것이다.

그녀가 이토록 지지를 받는 이유는 관세 폭탄을 들고 설치는 트럼프를 두 번이나 능란하게 조련했기 때문이다. 캐나다 트뤼도나 우크라이나의 젤린스키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협상 테이블을 뒤집지 않고서도, '얼음 여왕'이라는 별명답게 침착하게 트럼프를 상대하며 원하는 걸 얻어내고 있다.

셰인바움의 전술이란 이런 것이다. 미국으로 가는 멕시코 이주자가 문제라고? 미국으로 건너가는 펜타닐이 문제라고? 멕시코 카르텔이 문제라고? 그런데 멕시코로 오는 총은 어디에서 오냐? 그거 다 미국에서 온다. 일단 멕시코 국경에 군인 1만명을 보내고 펜타닐을 줄일 테니, 트럼프 너는 멕시코로 오는 무기를 단속해라.

셰인바움은 이번 차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다. 트럼프가 첫번째 토끼라면, 난공불락의 마약 카르텔이 두 번째 토끼다.

문제적인 멕시코 범죄 카르텔에 대해, 셰인바움은 자신의 멘토이자 전 좌파 대통령인 오브라도르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오브라도르가 '총이 아니라 포용' 정책으로 카르텔과 상생하고 빈곤을 근절시켜 범죄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했다면, 셰인바움은 빈곤 근절과 함께 강력한 범죄 대응을 주장한다.

멕시코시티 시장 시절, 그녀는 경찰력을 강화하고 민관의 정교한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 덕에 범죄가 58%가 감소했고 고의적 살인은 51% 줄었다. 혁혁한 성과였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면서도 이 기조를 유지하고 있던 차에, 멕시코 카르텔이 문제라고 난리를 치는 트럼프를 만나게 된 것이다.

셰인바움은 현재 밀어붙이고 있다. 이 짧은 기간 전국 살인 사건이 16% 줄었다. 수십 톤의 펜타닐을 압수했고, 오피오이드를 생산하는 실험실들을 파괴했으며 주요 마약상들을 체포했다. 또 악명 높은 수배 범죄자 29명을 체포해 미국으로 보냈다.

트럼프가 셰인바움에 대해 '존경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주접을 떨고 관세를 유예시킨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셰인바움은 트럼프도 잡고, 멕시코의 고질적인 범죄 카르텔도 줄여보려고 한 것이다.

한편으론 트럼프를 달래가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론 멕시코 주권을 주장하며 멕시코 시민들의 자존심을 추켜세우고 있다. 멕시코 시민들의 85%가 그녀를 지지하는 데는 이와 같은 영민함이 자리하는 것이다.

현재 그녀를 지지하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히는 건 트럼프를 상대로 한 외교이고, 두 번째는 '노인에 대한 지원', 세 번째는 '학생 지원', 네 번째는 '일반 사회 프로그램' 등이다. 좌파 대통령으로서 어떻게 정책을 펴나가고 있는지 얼추 가늠되는 항목들일 것이다.

트럼프에 맞서 멕시코 자존심을 수확하는 기조는 오히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모양새다. 이렇게 국민적 지지가 커지면 원하는 정책들을 펼쳐내기가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변덕이 죽 끓는 트럼프이고, 또 멕시코 범죄 카르텔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상황을 더 지켜봐야겠지만, 운 나쁘게 지구에서 가장 고약한 스트롱맨과 가장 근접에서 부딪혀야 하는 '연약한 여성 대통령'으로 치부되었던 셰인바움이 오히려 지금까지 가장 현명하고 슬기롭게,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승기를 가져간 것처럼 보인다.

난세에 이렇게 영민한 대통령을 갖는다는 건 든든한 일일 것이다.

오늘 여성의 날, 마초들을 제치며 대활약을 펼치는 여성대통령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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