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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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바라보는 동안 그 아름다움은 내 안에서 짧은 시가 되었다.


  나뭇가지 뒤 가로등이

  서리 낀 창 위에

  무늬를 던진다

  유리를 닦지 마라

  사람들이 깨어날라


  ·······이야기되어야 한다. 표현되어야 한다. 형편없는 시구일지는 몰라도 나는 다시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표현할 수 없는 통증 속에서 아픈 사람은 고립되며, 입을 다물면서 추방된다고 느낀다.·······표현함으로써 아픈 사람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온다.·······

  ·······질병과 통증은 삶을 조각내지만, 사는 이유를 모두 빼앗겼다고 혹은 사는 이유가 막 사라질 참이라고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다시 조화를 발견하곤 하며, 그렇기에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본 그 밤에 통증은 덜 중요했다. 내 몸에서 나를 떼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몸 밖으로 나를 연결했기 때문이다.(58-61쪽)


원문을 보지 못했다. 그냥 그 상태에서 위 번역을 다시 번역한다.


  나뭇가지 따라나선 가로등

  서리 안은 창, 그

  가슴에

  무늬 하나 살포시

  유리 얼룩 그대로, 그대

  곤히 잠자라


뭐, 그냥 유치한 변주다. 구태여 이런 퍼포먼스 하는 까닭이 있다. 내가 꽂힌 지점은 바로 “표현”이다. 나는 표현을 “묘사”라 묘사하고 싶다. 묘사가 더 감각적이다.


더 감각적이란 말은 더 정확하고 더 예술적이란 말이다. 더 정확하고 더 예술적인 묘사를 왜 해야 하나? 그렇게 묘사된 통증은 비상해지기 때문이다. 비상해진 통증은 자기 거점을 지운다. 이것은 역설이며 역설이 아니다. 붓다의 진리며 메시아의 진리다.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본 그 밤에 통증은 덜 중요했다.


아! 이 도저한 고요, 철저한 균형. 원효 냄새를 맡는다. 바리 살갗을 만진다. 삶의 전경을 본 거다. 그 전경에서 통증을 발효시킨 거다. 비로소 통증은 통증인 거다. 통증으로 말미암아 고립된 에고가 참 나, 그러니까 우리 사이 나로 돌아왔다. 우리 사이 나로 돌아온 것은 “내 몸에서 나를 떼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몸 밖으로 나를 연결했기 때문이다.” 내 몸 밖으로 나를 연결하는 것이 다름 아닌 예술이다. 예술의 비상으로 모든 뮤즈는 치유 신으로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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