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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통증에는 얼굴이 없다. 통증은 밖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통증은 바로 내 몸,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신호를 보내는 내 몸이다. 통증은 몸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몸이지, 외부에 있는 어떤 신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아니다. 통증과 씨름하는 일은 몸 바깥에 있는 무언가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몸이 몸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통증을 전부 내 몸 안에 있는 내 것으로만 본다면 몸 안에 고립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리고 고립은 조각나 부서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건강할 때 몸은 질서정연하고 주위 환경에 조응하며, 몸 부위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작동한다.·······
조화란 한밤중 다른 사람들이 잘 때 함께 자고 함께 휴식하는 것이다.(54-55쪽)
내 병은 통증을 밤과 연결했다. 종양이 몸을 장악하면서 통증은 정신을 장악했다. 통증이 빚어낸 고립과 외로움은 어둠 속에서 더 커진다. 아픈 사람이 평화로이 몸을 눕힌 사람들에게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한밤중, 통증 속에 있는 사람의 세계는 더는 하나로 붙어 있지 못하고 조각나 떨어져 나온다.(53쪽)
추방당하는 듯 아픈 사람이 겪는 경험은 통증과 함께 시작한다. 조화롭게 통일되어 있다는 감각 안에서만 통증은 아픈 사람이 느끼는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수 있다. 이 감각을 회복하려면 아픈 사람은 자신이 떨어져 나온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55쪽)
빈곤이 사회의 기조로 자리 잡고 있던 육칠십 년대 서울 산동네,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복작대며 사는 것은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적당히 눈치 봐가며 옷 갈아입는 일는 기본이고, 부부는 그 와중에 사랑을 나누기도 해야 했다. 책상커녕 방바닥에 엎드려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조차 녹록치 않았다. 초등학생은 공부 부담이 덜했으니 그나마 놀아가며 할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로 올라가면 시험 땐 여간 속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나는 가족이 잠든 이후 한쪽 구석에 삼십 촉 백열등에 갓을 씌워 빛을 가둔 뒤 둥근 밥상 다리를 접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시험공부를 하곤 했다. 가족의 평안히 잠든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두 가지 상반된 생각에 휘말렸다. 먼저 죄책감부터 달려들었다. 높은 성적 받아올 때 좋아는 하면서도 팥쥐 엄마는 시험 내내 전기요금 이야기를 반복했으니 말이다. 뒤 이어 고립감이 들이닥쳤다. 깊은 밤에 홀로 불을 밝힌 채 “평화로이 몸을 눕힌 사람들에게서 분리되기”란 얼마나 아뜩한 일이었던가. 추운 겨울에는 유난히 더했다.
하물며 통증임에랴. 홀로 통증에 시달리며 앓는 일은 참으로 막막한 일이다. 아무리 함께 통증을 느끼는 일이 불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아파서 몸부림치는 바로 그 옆에서 평화로이 몸을 눕힌 사람들에게 아픈 사람이 느끼는 야속함을 공박할 길은 어디에도 없다. 평화로이 몸을 눕힌 사람들이 잘못한 것 또한 전혀 없다. 함께 경험할 수 없는 일에 함께 엎어져 삶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두고 결코 사랑이니 도리니 할 수는 없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서로 닿지 못하거나 어긋나는 일은 안타까움 그 이상이다. 이런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문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다.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해결책이 없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온 가족이 밤잠 자지 않으며 함께 지킨다고 해서 통증이 없어지지 않음은 물론이다. 부질없다고 해서 “추방”으로까지 느낄 수 있는 아픈 사람 상태를 마냥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췌론의 여지가 없다. 이 모순을 어찌 할까? 일단 통증의 실재를 인정해야 길을 찾을 수 있다. 없애야 한다는 목표를 내려놓고 문제를 더 넓은 맥락에서 살피는 거다. 맥락을 넓힐 때 열리는 길이 바로 해소다. 해소란 문제를 있는 그대로 품어 안고서 더는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데 문제 삼지 않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가능하다. 통증을 느낌의 “일부”이게 하면 된다.
고립 상태에서는 통증이 느낌의 “전부”다. 느낌의 전부인 통증은 그 고립된 삶 전체를 부숴버린다. 고립된 채 삶 전체가 결딴나는 것을 막으려면 삶의 맥락을 넓혀야 한다. 맥락을 넓히는 것은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영역의 확장은 고립의 확장일 뿐이다. 고립을 무한히 확장해도 고립은 고립으로 남는다. 고립을 뚫으려면 단단한 경계를 정조준 해야 한다. 단단한 경계에 금을 내는 일이 바로 맥락 넓히기의 시작이다. 금은 틈의 계기다. 틈만 내면 고립을 뚫고 나올 수 있다. 허위단심 터서 나왔는데 허공이면 어찌 할까? 걱정할 거 없다. 경계 밖은 어디나 누군가의 알뜰한 영역이니까.
누군가의 영역에 벌거숭이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픈 사람은 자기 경계 안, 그러니까 고립된 자기 영역에 똬리 틀고 앉은 통증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통증이 일부로 느껴진다는 거다. 일부가 된 통증에 매달려 애면글면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통증보다 더 큰, 더 넓은 맥락의 삶을 끌어안아야 하지 않겠는가. 넓은 맥락에서 다시 느끼면 통증은 더 이상 치명적이지 않다. 치명적 통증이란, 실은 고립이 키운 거대 허깨비다. 아무리 거대해도 허깨비는 끝내 허깨비다. 허깨비 저주 따위가 파리 목숨 하난들 가져가겠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겪는 통증을 어느 누가 알겠냐며 스스로 고립된다. 또 많은 사람들은 통증에 지레 겁먹고 아예 마비의 길을 택한다. 이를 기화로 백색의학은 진통기술 팔아 떼돈을 번다. 진통기술은 분리 이데올로기 또는 타락문명의 아편이다. 아편을 버릴 때가 왔다. 우리는 이제 “조화롭게 통일”된 삶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떨어져 나온 사람과 자연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빗장을 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