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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아픈 사람은 전문가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의학의 한계를 인정하려면 먼저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의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질병은 질환을 앓으면서 살아가는 경험이다. 질환 이야기가 몸을 측정한다면, 질병 이야기는 고장 나고 있는 몸 안에서 느끼는 공포와 절만을 말한다. 질병은 의학이 멈추는 지점에서,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그저 측정값들의 집합이 아님을 인식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은 내 삶에도 일어난다. 내 삶에는 체온과 순환도 있지만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도 있으며, 이런 것들은 측정될 수 없다. 질병 이야기에 그 몸 같은 것은 없으며 오직 내가 경험하는 내 몸만이 있다.·······
·······내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다.·······
·······의학계에는 개혁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환자들에게 질환 이야기를 ‘하사’하는 대신 환자들과 함께 질병 이야기를 나누는 법을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의사와 간호사들은 이미 잘하는 일, 즉 ‘고장 난 부분을 고치기’를 계속하되 그 이상을 하겠다고 나서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질병은 삶을 위협하지만 살아갈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얼마나 고통스럽든 얼마나 아픈 것을 피하고 싶어 하든 상관없이 우리에겐 질병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 책의 과제는 바로 이 필요를 표현하는 것, 그리하여 질병을 축하할 수 있는 말들을 찾는 것이다.(27-32쪽)
며느리 자라 시어미 되니 시어미 티를 더 잘한다는 속담이 있다. 호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자신이 겪은 고통을 헤아려 며느리에게 관대할 것 같지만 그 반대라는 이야기다. 학대당하면서 파괴된 인격이 치유·복원되는 과정이 없는 한 학대당한 경험은 상처로 남는다. 상처는 방어기전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통증으로 다가오는 질병도 마찬가지다. 통증을 없애는 것으로 치료를 끝냈다고 의자도 환자도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중병일수록 심리적 치유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한다. 백색의학 현실에서는 어림없는 얘기지만 말이다.
나는 20대 초반에 특별한 방식으로 극심한 통증을 경험했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복통은 이를 바득바득 갈게 만들 만큼 격렬했다. 절정에 달했을 때에는 죽음의 사자가 끄는 옷자락 소리를 들었다. 밤새 몸부림치다 이튿날 아침 일찍 내과의원으로 향했다. 급성충수염으로 이미 많이 진행되어 터지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했다. 서둘러 수술 가능한 병원으로 이동했다. 의료진에게 사흘 뒤에 중요한 시험이 있다고 말했다. 자기들끼리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주고받더니 신속하게 수술절차를 진행했다. 수술부위 근처의 체모를 제거한 다음 주사를 한 대 놓았다. 잠시 뒤 칼로 배를 가르는 작고도 예리한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싸늘한 칼날의 촉감도 가차 없이 전해졌다. 이어서 집도의의 손이 창자 뭉치를 뒤적거린다 싶더니 그 중 일부가 쓱 들어 올려졌다. 바로 뒤,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짧지만 맹렬한 통증이 엄습해왔다. 염증 때문에 부풀어 오른 충수 부위를 가위로 잘라내는 순간이었다. 참을 수 없어 악!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실로 꿰매는 땀 땀의 감각이 전해지는 동안 수술실 천정에는 별이 총총 뜨고 바닥에는 회전목마가 빙빙 돌았다. 어 어 하는 사이 수술이 끝났다. 집도의는 제법 큼직한 충수를 들어 보여주며 가볍게 말했다. “시험 있대서 마취 없이 근육주사만 놓고 수술했다.” 당혹감을 낚아채기라도 하듯, 이내 그는 나를 잡아 일으켰다. 다시 한 마디 툭 던졌다. “4층 병실까지 걸어서 올라가!”
의자가 된 뒤 다양한 통증을 호소하며 찾아오는 환자들을 수없이 마주한다. 통증이 인간에게 얼마나 절대적인 벽인지 잘 알기에 최선을 다해 경청한다. 공감한다. 이 기본 위에서 상반된 태도를 견지하곤 한다. 지나치게 호들갑떠는 사람에게는 무심한 눈빛을 보내 기세를 누그러뜨린다. 지나치게 억누르는 사람에게는 상냥한 눈빛을 보내 기운을 풀어준다. 사실 젊은 시절에는 누가 아프다 말하면 ‘그까짓 걸 가지고 뭐.’ 하고 서늘하게 반응했다. 내 아픈 경험이 삶에 녹아들어 인격의 한 결로 자리 잡지 못한 탓이었다. 의자로서 매일 매순간 아픈 사람과 함께 숨 쉬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어서야 비로소 인간이 어떻게 아픔과 함께, 아니 아픔을 살아가야 하는지 마음 나눌 틈을 냈다.
백색의학 체제 아래서 의자가 환자와 삶을 이야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럴 시간도 없거니와 있다 해도 대부분 의자에게는 능력이 없다. 도구적 치료 기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상황은 지극히 열악하다. 6년을 교육하는 의대에 제대로 된 인문학 강좌 하나 없는 나라다. 현실적으로 볼 때 의자에게 환자와 더불어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숙의하라 요구하는 것은 물색없는 소리다. 의자 자신도 “‘고장 난 부분을 고치기’를 계속하되 그 이상을 하겠다고 나서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의과대학에 질병인문학과를 개설하고 의자와 동등하게 대우받는 전공 인력을 양성하여 병원에 배치하는 것이 낫지 싶다. 이들은 환자의 요청에 따라 강의, 상담, 글쓰기 등의 방식으로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숙의한다. 비용은 병원이나 국가가 부담한다. 의료의 공공성이 거의 바닥 수준인 우리 상황에서는 이게 더 요원한 얘기일 수도 있겠으나, 그 만큼 그 필요는 더욱 긴절하다.
공동체가 붕괴된 백색문명에서 질환을 앓은 사람이 이대로 방치된다면 파국 또는 경착륙의 가능성은 한층 높아진다. 질환이 학대의 본질로 남아 영혼을 떠도는 한 백색문명에 저항하는 힘은 점점 고갈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질병과 함께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자상한 숙의와 격려를 선물로 받는다면 “얼마나 고통스럽든 얼마나 아픈 것을 피하고 싶어 하든 상관없이” 누구라도 백색문명에 저항하는 전사가 될 것이다. 오늘 두통·현훈(어지러움)·오심(메스꺼움)·수면장애·방광신경증 등을 호소하는 환자가 백색처방전을 들고 찾아왔다. 예민해 보이니까 항불안제, 어지럽다니까 메니에르병 치료제, 메스껍다니까 도파민 수용체 차단제·······이런 식이다. 백색의사는 그 화학합성물질이 치료약이니 장기간 복용해야 한다고 했단다. 어찌 할거나. 그와 긴 시간 동안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이야기했다. 비록 불 난 산에 한 마리 벌새일 따름인 나지만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하니까.
[사족]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disease를 질환으로 illness를 질병으로 번역한 것을 언급하려 한다. 환患은 괴로움을 나타내는 串과 마음 心을 합해 만든 글자이며, 병病은 아파서 드러누운 사람의 형상 疒과 분명해진다는 뜻을 얻은 제상 모양 글자 丙을 합쳐 만든 글자다. 전자는 아픔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을 담았다. 후자는 아픈 증상이나 사람의 드러난 모습을 담았다. disease를 질병으로 illness를 질환으로 하는 게 저자의 의도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